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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회틀(梅灰틀) 혼측(溷廁) 북수간(北水間)
 김민수
 2013-12-09 15:26:19  |   조회: 6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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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회틀(梅灰틀) 혼측(溷廁) 북수간(北水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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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 왕비, 왕세자, 세자빈, 대비 및 대한제국 황제, 황후, 황태자, 황태자비, 태후는 옥외 대소변을 배설하는 혼측(溷廁), 측간(廁間)이 아닌 침전의 방 한편에 4각형의 휘장을 둘러치고 이동식 변기 매회틀(梅灰틀)을 놓고 용변을 보았고 매회틀(梅灰틀)을 매화틀(梅花틀),매우틀(梅雨틀)이라고도 불렀으며 매회틀은 세 쪽은 막혀있고 한 쪽은 터져 있는 ‘ㄷ’자 모양의 나무로 된 좌변기이다. 매회틀(梅灰틀)의 앉는 부분은 조선시대에는 비단을, 대한제국시대에는 유럽에서 수입한 벨벳으로 덮었고 그 틀 아래에 청동으로 된 그릇 호자(虎子)를 두어 국왕과 왕후, 왕세자의 대소변을 받았다.


복이처(僕伊處) 소속 복이나인(僕伊內人)은 미리 매회틀 속에 매화 꽃잎을 태운 매회(梅灰)를 뿌려서 가져오고, 용변을 다 보면 매회를 덮고 내의원(內醫院)에 보내 어의가 조선 국왕 및 대한제국 황제의 건강상태를 살피고 탕약을 처방하게 했다. 매회틀(梅灰틀) 아래에는 분뇨를 받는 청동제 매화그릇 호자(虎子)가 있는데 매회틀 안에 넣고 빼낼 수 있었다. 용변이 끝난 후에는 2개의 물을 복이나인(僕伊內人)이 가져가 하나는 국왕의 손을 씻고 또 하나는 뒤를 씻는 북수(北水)하였으며 국왕이 손과 뒤를 씻은 후 복이나인이 비단으로 깨끗이 닦아 드렸다.


1461년 8월 19일 세조가 전교(傳敎)하기를, “개성부(開城府) 사람 전봉(全奉)이 송이버섯을 올렸는데 몸이 크고 품질이 좋으며, 유수(留守) 권지(權摯)가 올린 것은 작고 품질이 나쁘다. 권지는 순행(巡幸)할 때에 뒷간인 혼측(溷廁)을 만들지 아니했으니, 본래 임금을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 사헌부(司憲府)로 하여금 추국(推鞫)하여 아뢰게 하라.”하고, 인하여 권지를 파직(罷職)하기를 명하였다. 1475년 5월 14일 성종이 병조(兵曹)와 도총부(都摠府)에 전교하기를, “당번(當番)이 되어 관아에 들어가 숙직하는 입번(入番)하는 군사를 적간(摘奸)할 때에 군사가 새벽과 밤인 신혼(晨昏) 에 뒷간인 혼측(溷廁)에 왕래할 때와 활쏘기를 연습하는 습사(習射)할 때와 숙직(宿直)하는 직소(直所)에서 앉아 쉴 때에 칼을 차지 않은 패검(佩劎)하지 않은 자는 논하지 말라.”하였다.


세답방(洗踏房)은 빨래와 다듬이질, 다림질을 하고 세수간(洗水間)은 조석으로 국왕, 왕비 등의 세숫물과 목욕물을 대령하고 지(요강), 타구, 매회틀(변기) 등의 시중도 하며 수건, 그릇 등의 세탁과 세척을 담당하였다. 북수간(北水間)은 신체 뒤쪽인 북쪽을 닦아 청결하게 하는 뒷물을 하는 북수(北水)하기 위하여 만들었으며 따로 건물을 짓거나 건물 내에 한칸을 마련하여 몸의 뒷부분을 씻는 북수(北水)를 하였다. 내전 뒷마당이나 부엌에서 문을 닫고 함지박에 더운 물을 받아 물을 끼얹거나 젖은 수건으로 닦는 방식으로 목욕을 했다. 창덕궁 연경당(演慶堂) 별채에 북수간(北水間) 또는 나무로 만든 둥근 욕조 목간통(沐間桶)의 흔적이 남아있다.
2013-12-09 15:2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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