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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高祖 Gojo:1863 – 1897) 건양 대군주(建陽 大君主) 건양 유신(建陽 維新)
 김민수
 2014-03-02 08:32:41  |   조회: 7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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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高祖 Gojo:1863 – 1897) 건양 대군주(建陽 大君主) 건양 유신(建陽 維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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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국주의 총독부(日本軍國主義 總督府:1910-1945)가 1930-5년 사관(史官)이 매일 기록한 사초(史草) 등 사료(史料)의 수집(蒐集) 및 취사선택, 편수(編修), 수정, 첨삭하는 감수(監修)한 일본군국주의 통감부, 총독부 일지(日誌) 성격의 이왕가 고종순종실록 편찬위원(編纂委員)은 위원장은 시노다 지사쿠이며 감수위원(監修委員)은 경성제국대학 교수 오다 쇼고, 나리타 세키나이이며 사료수집위원(史料 蒐集委員)은 기쿠치 겐조이며 서무위원(庶務委員)은 스에마쓰 구마히코, 시가 노부미쓰이며 회계위원(會計委員)은 사토 아키미치이며 감수 보조위원(監修 補助委員)은 총독부 이사관 에하라 젠쓰이이며 편찬 보조위원(編纂 補助委員)은 총독부 도경시 하마노 쇼타로, 총독부 군서기 미즈바시 후쿠히코이며 사료 수집 보조위원(史料 蒐集 補助委員)은 기타지마 고조이다. 일본군국주의 총독부가 사관(史官)이 매일 기록한 사초(史草) 등 사료(史料)의 수집(蒐集) 및 취사선택, 편수(編修),수정, 첨삭하는 감수(監修)한 이왕가 고종순종실록은 일본군국주의 총독부(日本軍國主義 總督府:1910-1945)가 대한국(1897- )을 불법 통치한 대한시대 대한광복운동기(1906-1945)에 대한국(1897- ) 역사를 왜곡하고 통감부, 총독부, 일본 왕실, 일본군 기사를 중심으로 편수(編修),감수(監修)하여 편찬한 일본군국주의 통감부, 총독부 일지(日誌)이므로 통감부, 총독부, 일본 왕실, 일본군 기사를 삭제하고 고조(高祖 Gojo:1863 – 1897) 건양 대군주(建陽 大君主)실록을 수정, 편집하였다.










1895년 10월 7일 고조(高祖 Gojo:1863 – 1897) 건양 대군주 폐하(建陽 大君主 陛下)가 내부령(內部令) 8호 예방 항체를 몸에 주입하는 접종(接種) 법령인 종두 규칙(種痘規則)을 공포하였다. 11월 3일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이 황제(皇帝)의 탄일인 만수성절(萬壽聖節)인 임자년(1852) 7월 25일을 양력(陽曆) 9월 8일로, 명헌태후인 왕태후(王太后)의 경절(慶節)인 신묘년(1831) 정월 22일을 양력 3월 6일로, 왕태자(王太子)의 경절인 갑술년(1874) 2월 8일을 양력 3월 25일로, 왕태자비(王太子妃)의 탄일(誕日)인 임신년(1872) 10월 20일을 양력 11월 20일로, 태묘(太廟)에 다짐하고 고한 날인 12월 12일을 양력 1월 7일로 만들어 신력(新曆)에 따라 인명(印明)한 안건을 반포하여 시행하자는 뜻으로 상주(上奏)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좋다.”하였다. 11월 7일 칙령(勅令) 180호 천연두(天然痘)의 예방을 목적으로 종두의(種痘醫) 양성소 규정을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11월 15일 고조(高祖 Gojo:1863 – 1897) 건양 대군주 폐하(建陽 大君主 陛下)가 칙령을 내리기를, “정삭(正朔)을 이미 고쳐 태양력(太陽曆)을 쓰도록 한 만큼 개국 505년부터 연호(年號)를 세우되 일세일원(一世一元)으로 정하여 만대토록 자손들이 조심하여 지키게 하라. 짐(朕)이 머리를 깎아 신하와 백성들에게 우선하니 너희들 대중은 짐의 뜻을 잘 새겨서 만국(萬國)과 대등하게 서는 대업을 이룩하게 하라.”하였다. 총리대신(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이, ‘칙령(勅令)을 삼가 받들고 연호(年號)를 건양(建陽)으로 의정(議定)하고 내각의 논의를 거쳤습니다.’라고 상주(上奏)하니, 칙령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하였다. 내부(內部)에서 고시(告示)하기를, “이제 단발(斷髮)은 양생(養生)에 유익하고 일하는 데에 편리하기 때문에 우리 성상 폐하(聖上 陛下)가 정치 개혁과 민국(民國)의 부강을 도모하며 솔선궁행(率先躬行)하여 표준을 보인 것이다. 무릇 우리 대조선국(大朝鮮國) 민인(民人)은 이러한 성상(聖上)의 뜻을 우러러 받들되 의관 제도(衣冠制度)는 아래와 같이 고시(告示)한다. 1. 나라의 상사(喪事)를 당하였으니 의관(衣冠)은 나라의 거상 기간에는 그 전대로 백색(白色)을 쓴다. 1. 망건(網巾)은 폐지한다. 1. 의복 제도는 외국 제도를 채용하여도 무방하다.”하였다.





1896년 1월 11일 칙령을 내리기를, “짐(朕)이 조상들의 위업을 받들고 만국(萬國)이 교통(交通)하는 시운(時運)을 당하여 천시(天時)를 상고하고 인사(人事)를 살펴보건대 500년마다 반드시 크게 변천하니 너희 백성들은 나의 계고(戒誥)를 들으라. 전장 법도(典章法度)는 천자(天子)로부터 나오는 법이다. 아! 짐이 등극(登極)한 지 33년에 세계가 맹약(盟約)을 다지는 판국을 맞아 정치를 유신(維新)하는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정삭(正朔)을 고치고 연호(年號)를 정했으며 복색(服色)을 바꾸고 단발(斷髮)을 하니 너희 백성들은 내가 새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말라. 넓은 소매와 큰 관(冠)은 유래(流來)한 습관이며 상투를 틀고 망건(網巾)을 쓰는 것도 일시(一時)의 편의(便宜)로, 처음 시행할 때에는 역시 신규(新規)였다. 하지만 세인(世人)의 취향과 숭상함에 따라 국가의 풍속 제도를 이룬 것이니, 일하기에 불편하며 양생(養生)에 불리한 것은 고사하고 배와 기차가 왕래하는 오늘에 와서는 쇄국(鎖國)하여 홀로 지내던 구습을 고수(固守)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짐도 선왕의 시제(時制)를 변경하기를 어찌 좋아하겠는가마는 백성들이 부유하지 못하고 군사가 강하지 않으면 선왕들의 태묘 사직(太廟 社稷)을 지키기 어렵다.





옛 제도에 얽매여 태묘 사직(太廟 社稷)의 위태로움을 돌보지 않는 것은 때에 맞게 조치하는 도리가 아니니,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너희 백성들은 또 혹시 ‘선왕의 시제(時制)를 고치지 않고도 태묘 사직을 지킬 방도가 반드시 있다.’고 하겠지만 이 것은 한 구석의 좁은 소견으로서 천하 대세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짐이 이 번에 정삭을 고치고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세운 것은 500년마다 크게 변하는 시운(時運)에 대응하여 짐이 국가를 중흥(中興)하는 큰 위업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며, 복색을 바꾸고 머리를 깎는 것은 국인(國人)의 이목(耳目)을 일신시켜 옛 것을 버리고 짐의 유신(維新)하는 정치에 복종시키려는 것이니, 이 것은 짐이 전장 법도로써 시왕(時王)의 제도를 세우는 것이다. 짐이 머리를 이미 깎았으니 짐의 신민(臣民)인 너희 백성들도 어찌 받들어 시행하지 않겠는가? 나라는 임금의 명령을 듣고 가정(家庭)은 가장(家長)의 명령을 들으니, 너희들 백성들은 충성을 다하고 분발하여 짐의 뜻을 잘 새겨서 서로 알리고 서로 권하여 너희들의 머리카락과 구습을 한꺼번에 끊으며 모든 일에서 오직 실질만을 추구하여 짐의 부국강병하는 사업을 도울 것이다. 아! 나의 어린 자식들인 너희 백성들이여!”하였다.
2014-03-02 08:3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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