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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정(解慍亭) 신독정(愼獨亭)
 김민수
 2014-03-09 08:51:43  |   조회: 7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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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온정(解慍亭) 신독정(愼獨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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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년 4월 9일 태종이 해온정(解慍亭)을 창덕궁(昌德宮) 동북 모퉁이에 지었다. 태종이 지신사 황희(黃喜)에게 이르기를 “이제 새 정자(亭子)가 이룩되어 권근(權近)으로 하여금 이름을 짓게 하였더니 하늘이 맑고 땅이 편하다는 뜻을 취한 청녕(淸寧)으로 명명(命名)하기를 청하였는데 적당하지 못한 듯하여 내가 해온(解慍)으로 고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하니, 좌우에서 말하기를 “매우 좋습니다.” 하였다. 4월 23일 태종이 황엄 등 네 사람을 창덕궁(昌德宮)에서 연회하였는데 황엄이 중궁(中宮)을 뵙기를 청하였으므로 태종이 더불어 함께 내정(內庭)에 들어갔다. 드디어 해온정(解慍亭)을 둘러보고 나와서 광연루(廣延樓)에서 술을 베풀고 태종이 황엄에게 안장 갖춘 말을 주었다. 5월 18일 기원(奇原)을 해온정(解慍亭)에서 연회하였다. 기원은 본디 공근(恭謹)하여 감히 사신이라 자처하지 아니하고 동남쪽 모퉁이에 앉으니, 태종은 서북쪽 모퉁이에 앉았다. 술자리를 파하고 기원이 전정(殿庭)에 나아가 배사(拜謝)하고 물러갔다.

5월 27일 태종이 장차 인소전(仁昭殿)을 창덕궁(昌德宮) 북쪽에 다시 지으려고 북문(北門)을 나가서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터를 잡게 하니 유한우(劉旱雨)가 아뢰기를 “창덕궁(昌德宮) 주산(主山)의 기운이 이 땅에 모였는데 만약 땅을 파서 집을 지으면 반드시 궁궐에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하였다. 태종이 이직(李稷)을 불러 의논하니 이직이 말하기를 “주산(主山)의 맥(脈)이 아니고 따로 무지개 형상의 궁륭(穹窿)의 모양으로 나와서 남향의 형세를 이룬 것입니다. 전하가 만약 가까운 땅을 골라서 진전(眞殿)을 지으려면 이 곳보다 나은 데가 없습니다.”하니, 태종이 기뻐하여 곧 개기(開基)하도록 하고 해온정(解慍亭)에 돌아와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이직 이하 여러 대언(代言)들이 차례로 술잔을 올렸다. 7월 10일 해온정(解慍亭)에서 종친(宗親)에게 연회하였다. 7월 19일 태평관(太平館)에 나아가 사신을 청해 해온정(解慍亭)으로 와서 술자리를 베풀고, 4인에게 말 1필(匹)씩 주었다.

1407년 1월 11일 종친(宗親)에게 해온정(解慍亭)에서 연향(宴享)을 베풀었다. 2월 26일 종친(宗親)을 해온정(解慍亭)에 불러 활쏘기를 구경하였다. 3월 5일 종친(宗親)을 해온정(解慍亭)에 불러 활쏘기를 구경하였다. 5월 8일 해온정(解慍亭)에 거둥하여 성균 대사성(成均 大司成) 류백순(柳伯淳)을 불러 주역(周易)과 춘추(春秋)를 강론(講論)하였다. 8월 18일 해온정(解慍亭)에 나아가서 격구(擊毬)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1408년 5월 21일 내사(內史) 황엄(黃儼) 등에게 해온정(解慍亭)에서 잔치를 베풀고 금강산 여행을 위로하였다. 1409년 10월 18일 태종이 해온정(解慍亭)에 거둥하여 철령전(鐵翎箭) 수십 개를 구리통에 넣어서 작은 수레에 싣고 화약(火藥)으로 발사(發射)하는 화거(火車)를 쏘는 것을 구경하고 군기 소감(軍器 少監) 이도(李韜)와 군기감 승(軍器監 丞) 최해산(崔海山)에게 말 한 필씩을 주었다. 1410년 1월 16일 종친(宗親)을 해온정(解慍亭)에 불러 활쏘기를 구경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3월 8일 해온정(解慍亭)에 거둥하여 종친(宗親)들을 불러 활쏘기를 구경하였다. 4월 17일 해온정(解慍亭)에 거둥하여 종친(宗親)을 불러 활쏘기를 구경하였다.

1412년 3월 19일 태종이 상왕(上王)을 해온정(解慍亭)에 받들어 맞아 연향(宴享)을 베풀었는데 극진히 즐기다가 곧 파하였다. 태종이 돈화문(敦化門)까지 상왕을 전송하였다. 4월 8일 해온정(解慍亭)에서 관등(觀燈)하고 이튿 날도 또한 그와 같이 하였다. 좌우(左右)로 나누어 기둥을 세우고 등을 달았는데 내자시(內資寺), 내섬시(內贍寺)로 하여금 판비하게 하였다. 1413년 4월 12일 물이 얕아서 저절로 죽을까 염려하여 광연루(廣延樓)·해온정(解慍亭) 앞 연못의 물고기를 옮겨 경회루(慶會樓) 아래 큰 못에 놓아주도록 하였다. 1414년 6월 17일 해온정(解慍亭)을 신독정(愼獨亭)으로 고쳤다. 태종이 하윤(河崙)에게 말하기를 “고려국의 말엽에 궁중(宮中)에 소정(小亭)이 있었는데, ‘해온정(解慍亭)’이라고 하였다. 지금 정자(亭子)의 이름이 서로 같으므로 ‘신독정(愼獨亭)’으로 고치려고 하는데 어떠한가?”하니 하윤이 말하기를 “이 정자(亭子)는 궁(宮) 북쪽에 있으니 군신(群臣)이 시종(侍從)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름을 신독정(愼獨亭)으로 하는 것이 심히 아름답습니다.”하였다.

1416년 1월 12일 의정부 영의정(領議政) 성석린(成石璘)이 상언(上言)하기를 “민무휼과 민무회 등의 불충(不忠)한 죄가 명백하게 드러났으니 잠시라도 용인(容忍)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여 나라 사람들에게 밝히 보여서 후세에 감계(鑑戒)를 내리소서.”하니 이 날 밤에 류사눌(柳思訥)을 불러서 해온정(解慍亭) 아래에 이르러 류사눌이 아뢰기를 “오늘 정부(政府)·공신(功臣)·6조(六曹)·대간(臺諫)과 형조(刑曹)인 3성(三省)에서 청한 것이 윤당(允當)하니, 유윤(兪允)을 내리시기 바랍니다.”하니, 태종이 “민무구와 민무질은 이미 그 죄에 벌을 받았고, 민무휼과 민무회도 또 죄에 걸렸다. 민씨(閔氏)의 네 아들을 서로 잇달아서 죽이는 것을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하였다. 1417년 12월 4일 태종이 말하기를 “신(神)은 예 아닌 것을 흠향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일찍이 말하기를, ‘예에 당연한 것을 행한 연후에 천신(天神)·지기(地祈)가 돌아보고 도우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 가뭄이 있으면 신(神)마다 받들지 않는 것이 없어서 여러 신하들이 상제(上帝)께 기우제 지내기를 청하기 때문에 정해년(丁亥年) 가뭄에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에게 명하여 북교(北郊)에서 제사하고 나는 해온정(解慍亭)앞에서 밤새도록 꿇어앉아 기도하였는데 창녕의 덕망의 성함과 일국 신민의 비를 근심하는 정으로도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였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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