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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군(採石軍) 벌석군(伐石軍) 예석군(曳石軍)
 김민수
 2014-03-29 12:09:57  |   조회: 7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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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군(採石軍) 벌석군(伐石軍) 예석군(曳石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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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2년 7월 10일 호조에서 계하기를 “산릉 채석군(採石軍)이 더위와 습기 서습(暑濕)때문에 병든 병자(病者)가 많으니, 병사(病舍)인 병옥(病屋)을 10여 칸을 짓고 승려(僧侶)들인 승도(僧徒)들로 하여금 죽·쌀인 죽미(粥米)와 소금·장인 염장(鹽醬)을 가지고 치료하게 하소서.”하니,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7월 17일 산릉 벌석군(伐石軍)의 구료 물자(救療 物資)를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고 여러 날 지체한 호조 참의 허해(許晐)와 정랑(正郞) 이안경(李安敬)을 파직시키고 속장(贖杖) 70에 처하였다. 1452년 7월 8일 단종이 인산(因山) 전에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아니한 임금과 왕비(王妃)의 무덤인 산릉(山陵)의 토목 공사에 큰 돌을 장거리로 운반하던 군인인 예석군(曳石軍)들을 거느리고 기한 안에 역소(役所)에 이르지 못한 공조 좌랑(工曹 佐郞) 최공손(崔功孫)을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였다. 최공손은 성품이 본래 어리석어서 사리에 밝지 못하였으나, 정분(鄭苯)을 잘 섬겨서 감찰 좌랑(監察 佐郞)에 벼슬자리를 얻는 득배(得拜)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천하게 여겼다.





8월 16일 단종이 산릉의 예석군(曳石軍)에게 청주에 한약재를 넣어 중탕한 약용주인 자주(煮酒) 5백 병과 미역인 해채(海菜) 1백 근을 하사하였다. 처음에 개석(蓋石)을 노원리(盧原里)에서 취하여 헌릉(獻陵)으로 수송하였다가 이 때에 이르러 건원릉(健元陵)으로 옮겼는데, 역부(役夫)가 거의 8천 명에 이르렀다. 마침 잇달은 비인 연우(連雨)로 물이 불어나는 수창(水漲)하여서 건너가기가 쉽지 않아 사람들이 많이 목숨을 잃는 운명(殞命)하였다. 모든 읍리(邑吏)들로서 역부(役夫)가 적게 나왔다는 이유로 투옥(投獄)된 자도 또한 많았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삼가 상고하건대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상사(喪事)에 세종이 전개석(全蓋石)을 쓰고자 하여, 지신사(知申事) 원숙(元肅)으로 하여금 태종에게 계품(啓稟)하니, 태종이 말씀하기를, ‘운반하기도 어렵고, 죽은 이에게 유익할 것이 없다. 산 백성에게는 해가 있으니, 쪼개서 쓰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친히 안암동(安巖洞)에 가서 명하여 쪼개고 말씀하기를, ‘준수(遵守)의 여부(與否)는 우리 자손에게 있다. 자세히 기록하여 전하여 후세의 법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준수하지 못하고 이러한 폐단이 있었다.”하였다.
2014-03-29 12: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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