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광장
명성황후(明成皇后)를 녹원(鹿苑)에서 살해 후 오운각(五雲閣) 서봉(西峯) 아래에 잠매(潛埋)
 김민수
 2014-10-27 20:54:42  |   조회: 6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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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明成皇后)를 녹원(鹿苑)에서 살해 후 오운각(五雲閣) 서봉(西峯) 아래에 잠매(潛埋)





녹원(鹿苑)으로 옮겨 셋으로 베어내 소화(燒火) 후 하체(下體)만 철취(掇取)하여 잠매(潛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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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국주의(日本軍國主義 Japanese militarism) 총독부(1910-1945)가 1930-5년 사관(史官)이 기록한 사초(史草) 등 사료(史料)의 수집(蒐集) 및 주관적으로 취사선택, 편찬,수정하는 편수(編修), 교열, 첨삭하는 감수(監修)한 일본군국주의 통감부, 총독부 일지(日誌) 성격의 이왕가실록 편찬위원(編纂委員)은 위원장은 시노다 지사쿠이며 감수위원(監修委員)은 오다 쇼고, 나리타 세키나이이며 사료수집위원(史料 蒐集委員)은 기쿠치 겐조이며 서무위원(庶務委員)은 스에마쓰 구마히코, 시가 노부미쓰이며 회계위원(會計委員)은 사토 아키미치이며 감수 보조위원(監修 補助委員)은 총독부 이사관 에하라 젠쓰이이며 편찬 보조위원(編纂 補助委員)은 총독부 도경시 하마노 쇼타로, 총독부 군서기 미즈바시 후쿠히코이며 사료 수집 보조위원(史料 蒐集 補助委員)은 기타지마 고조이다. 일본군국주의 총독부가 사료(史料) 수집(蒐集) 및 취사선택, 편수(編修),감수(監修)한 이왕가실록은 일본군국주의 총독부가 대한국(1897- )을 불법 통치한 대한시대 대한광복운동기(1906-1945)에 대한국(1897- ) 역사를 왜곡하고 통감부, 총독부, 일본 왕실, 일본군 기사를 중심으로 편찬,수정하는 편수(編修), 교열, 첨삭하는 감수(監修)하여 편찬한 일본군국주의 통감부, 총독부 일지(日誌)이므로 통감부, 총독부, 일본 왕실, 일본군 기사를 삭제하고 대한제국 황실 기사를 중심으로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실록을 수정, 편집하였다.












대한제국 명성황후(明成皇后:1897년 책봉)는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탄강(誕降)하였으며 8세 이후 아버지 민치록 소유의 한성(漢城) 감고당(感古堂)에서 살았으며 1866년 왕비로 간택(揀擇)되어 운현궁(雲峴宮)에서 가례(嘉禮)를 거행하고 조선국 왕비로 책봉되었다. 1866년 2월 25일 중희당(重熙堂)에서 초간택(初揀擇)을 행하였다.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첨정(僉正) 민치록(閔致祿)의 딸, 유학(幼學) 김우근(金遇根)의 딸, 현령(縣令) 조면호(趙冕鎬)의 딸, 영(令) 서상조(徐相祖)의 딸, 용강 현령(龍岡 縣令) 유초환(兪初煥)의 딸을 재간택(再揀擇)에 넣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허혼(許婚)하라.”하였다. 2월 28일 이경재(李景在)를 가례 정사(嘉禮 正使)로, 민치구(閔致久)를 부사(副使)로 삼았다.2월 29일 중희당(重熙堂)에서 재간택(再揀擇)을 거행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하교하기를 “첨정(僉正)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3간택(三揀擇)에 들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허혼(許婚)하라.”하였다. 3월 6일 중희당(重熙堂)에서 3간택(三揀擇)을 행하였다.






대왕대비가 빈청(賓廳)에 전교하기를 “대혼(大婚)을 첨정(僉正) 민치록(閔致祿)의 딸로 정하려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하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좌근(金左根), 영의정(領議政) 조두순(趙斗淳),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경재(李景在), 좌의정(左議政) 김병학(金炳學), 우의정(右議政) 류후조(柳厚祚)가 아뢰기를 “삼가 자전의 하교를 받드니 실로 신령과 사람의 바람에 딱 들어맞습니다. 이는 태묘 사직과 신민들의 무궁한 복이니, 신들은 기쁨에 겨워 경하드리는 정성을 금치 못하겠습니다.”하였다.3월 9일 인정전에 나아가 납채례(納采禮)를 행하였다. 3월 11일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납징례(納徵禮)를 행하였다. 3월 17일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고기례(告期禮)를 행하였다. 3월 20일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책비례(冊妃禮)를 행하였다. 3월 21일 별궁(別宮)에 나아가 친영례(親迎禮)를 행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저택에서 하였다. 중희당(重熙堂)에서 동뢰연(同牢宴)을 행하였다.







3월 22일 신정왕후 조씨인 대왕대비(大王大妃) · 효정왕후 홍씨인 왕대비(王大妃) · 철인왕후 김씨인 대비(大妃)가 명성황후인 왕비의 조현례(朝見禮)를 받았다. 인정전(仁政殿)에서 진하(陳賀)를 받고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왕비가 집안을 잘 다스려야 집안에 도덕이 바르게 서고 천하가 안정된다. 예의에서 배필을 중히 여김은 그 것이 백성들의 시초이고 만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필을 맞아들이는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니 나라의 기초가 반석같이 영원히 공고해졌고, 온 나라 사람들의 간절한 기대에 보답하니 노래와 칭송하는 소리가 온 강산에 퍼짐을 볼 수 있다. 대개 임금의 정사는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꾸리며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정하는 것을 기초로 삼고 있는 만큼 반드시 명철하고 어진 왕비의 도움을 받아야 하늘과 태묘 사직(太廟 社稷)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배필을 직접 맞아들이는 예식이 어찌 중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집안으로부터 고향 마을, 나라 안에서의 교화는 이로부터 시행되게 된다.







태임(太任)은 정성스럽고 공경스러운 훌륭한 덕을 후대에 많이 물려주었기 때문에 800년 동안이나 되는 오랜 기간 나라를 이어나갈 수 있었고, 유신(有莘)은 순서 차례를 명백히 밝힌 높은 공적으로 하여 6, 7명의 임금들이 서로 대를 이어 훌륭히 계승해나갈 수 있게 하였다. 실을 잣고 천을 짜며 직접 길쌈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제사 그릇들을 직접 받들어 제상에 올려놓는 것은 선조(先祖)를 받들며 효도를 다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생각해보건대, 나는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여 지금까지 4년 동안 동조(東朝)에 의탁해왔다. 대왕대비로 말하면 우리 왕실의 순원 왕후(純元王后)의 빛나는 덕행을 계승하여 나라를 유지하고 편안하게 하는 데에서 높고 훌륭한 공업(功業)을 쌓았으며, 나로 하여금 돌아간 익종(翼宗)의 뜻과 일에 더욱 힘쓰도록 하며 보호하고 도와주고 가르쳐주시니, 그 덕은 크고 그 은혜는 지극하였다. 제사지내는 달이 이르게 되니 이에 대왕대비의 공덕을 찬양하도록 하명하였다. 세 전하는 대왕대비의 모범을 생각하며 높이 칭찬하고 온 대궐 안의 여인들은 주부로서의 도리를 다하던 대왕대비를 형상하여 노래하였다.







왕비 민씨(閔氏)는 대대로 충성스럽고 곧은 명문(名門) 집안이며, 인현왕후(仁顯王后)의 근친으로서 어질고 덕 있는 품성을 타고났다. 선친에게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아서 어린 나이에 벌써 모든 행동이 날마다 성취되어 책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좋은 명성을 일찌감치 드러냈으며 부드럽고 아름다운 행실은 마치 외갓집에 있을 때나 다름없었다. 길몽(吉夢)은 여러 대에 걸친 조상들의 덕에서 기인한 것이니 우(禹) 임금이 도산씨(塗山氏)에게 장가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점을 치니 모든 경사(卿士)가 다같이 좋다고 하므로 왕비로 책봉하였고 좋은 날을 택하여 복장을 갖추고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이미 올 해 3월 20일 기묘일(己卯日)에 책(冊)과 보(寶)를 주어 왕비로 책봉하였고 21일 경진(庚辰)일에는 대혼례(大婚禮)가 이루어졌다. 아름다운 덕을 마음에 간직하니 왕비로 책봉하고 떳떳한 의식 절차대로 금보(金寶)를 올린다. 왕비로서의 큰 명을 받으니 아름다운 덕이 부합되고 성장(盛裝)한 아름다운 자태는 왕비로서 갖추어야 할 덕에 맞았다. 후손들을 번성시키고 여러 비빈들을 거느리는데 음덕(陰德)을 펴면 그들이 부덕(婦德)을 각각 다할 것이다.







온갖 덕과 모든 품행을 온전하게 갖추니 그 은혜로운 교화를 받아서 백성들의 풍속도 아울러 아름다워지리라. 검소하고 검박한 생활을 하는데 솔선수범하고 사치는 경계하여 서로 이루어지는 도를 실천하고 온갖 복을 널리 펴면 집안과 나라가 함께 복을 받고 온갖 만물을 키워 모두가 살아나가게 하는 것은 천지(天地)의 덕과 같고 온 나라에 공덕이 해와 달처럼 밝게 드러나니 혜택을 널리 펴서 사령(赦令)을 베풀겠다. 이 달 22일 날 밝기 이전의 잡범들로서 사형죄 이하의 죄인들은 다같이 용서해 주라. 아! 왕비로서 훌륭한 덕을 다 갖추고 있으니 좋은 자손들이 틀림없이 번성하리라. 대대로 복이 뻗어 내려가서 왕가가 3대(三代)처럼 장구해질 것이며 왕비의 지극히 훌륭한 덕행을 여사(女史)들이 영원히 자손들의 번성을 노래하는 시에 쓸 것이다.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자세히 알지어다.”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 정기세(鄭基世)가 지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 70세가 되어 치사(致仕)를 한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인 봉조하(奉朝賀) 김흥근(金興根),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좌근(金左根), 영의정(領議政) 조두순(趙斗淳),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경재(李景在), 좌의정(左議政) 김병학(金炳學), 우의정(右議政) 류후조(柳厚祚) 등이 아뢰기를, “좋은 날 좋은 때에 혼례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전하께서 대궐에 나오셔서 하례를 받으셨으니 여러 사람들은 경사를 축하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배필을 삼는 혼례는 왕실 자손의 번영함을 뜻하는 종사(螽斯)의 경사이며 복록(福祿)의 근원입니다. 역경(易經)에는 먼저 건도(乾道)와 곤도(坤道)에 대하여 말하였으며 우서(虞書)에서도 역시 요(堯) 임금의 두 따님을 아내로 맞이한 것에 대하여 썼으며 모시(毛詩)에서도 관저장(關雎章)을 말하였습니다. 오늘은 바로 전하의 왕실과 나라에 있어서 상서로움의 단서를 만드는 시초이며 복록을 맞아들이는 때입니다. 예로부터 가례(嘉禮)에서 문왕(文王)의 후비(后妃)를 높이 칭송한 것은 그의 훌륭한 덕이 천지(天地)와 부합하여 복이 자손들에게까지 미쳤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경(詩經) 주남편(周南篇)의 종사장(螽斯章)을 노래하고 인지(麟趾) 편을 송축하니 억만 년을 내려가도록 아름다운 소문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하늘의 덕을 체득하고 역경(易經) 첫 장의 뜻을 깊이 살피시어 문왕처럼 높은 덕을 닦으신다면 훌륭한 자손들이 번성하는 경사를 오늘날에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것이 신들의 간절한 소망입니다.”하였다.









1873년 11월 고조(高祖)가 친정(親政)을 시작하자 명성황후(明成皇后)는 1876년 조일병자조규(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개화파를 지원했다.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발탁하여 우의정에 등용하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했다. 청일전쟁을 일본이 승리한 직후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이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얻은 이권을 내놓게 한 3국간섭으로 일본은 조선국에서의 지위도 흔들렸으며 명성황후는 일본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려 했다. 1883년 산수인물화가이며 최초의 사진사 지운영(池雲英)은 종로 마동(麻洞)에서 사진관을 개설하고 일반인의 사진을 촬영했으며 1884년 지운영(池雲英)은 미국인 퍼시벌 로웰과 함께 고조(高祖), 명성황후 사진을 촬영하였다.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明成皇后)가 건청궁 곤녕합(坤寧閤)에서 붕서(崩逝)하였다. 새벽인 효두(曉頭)에 일본군들이 광화문(光化門)으로 돌입할 때 홍계훈(洪啓薰)이 문을 막는 거문(拒門)하고 역적이라고 소리치자 검(劍)으로 그의 팔을 치고는 곧바로 건청궁 전각(殿閣)의 방실(房室)에 이르러 명성황후인 곤전(坤殿)의 어소(御所)에 달려들었다. 일본군(日本軍)이 손으로 명성황후를 머리채를 휘어잡는 졸계(捽髻)하고 처마끝 헌단(軒端)까지 끌고 가서는 검으로 가슴을 찌른 침흉(揕胸)한 후에 검은 빛깔의 천으로 말아 녹원(鹿苑)으로 옮겨서 셋으로 베어내 석유를 붓고는 불태우는 소화(燒火)하였다. 일본군(日本軍)이 타고 남은 소여(燒餘)한 주검을 태우고 남은 뼈인 유해(遺骸)를 하체(下體)만 철취(掇取)하여 오운각(五雲閣) 서봉(西峯) 아래에 잠매(潛埋)하였다.



군부 대신(軍部 大臣) 안경수(安駉壽)가 훈련대를 해산하자는 의사를 밀지(密旨)를 19일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에게 가서 알렸으며,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禹範善)도 같은 날 일본 공사를 가서 만나보고 알렸다. 8월 20일 날이 밝아오는 미명(未明)에 전(前) 협판(協辦) 이주회(李周會)가 일본군 소대장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함께 공덕리(孔德里)에 가서 대원군(大院君)을 호위해 가지고 대궐로 들어오는데 훈련대 병사들이 대궐문으로 마구 달려들고 20여 명의 일본 병사도 따라 들어와 갑자기 변이 터졌다. 20여 명의 일본군(日本軍), 친일 훈련대(訓鍊隊) 병졸(兵卒)과 순검(巡檢)이 서로 충돌하여 양편에 다 사상자가 있었다. 시위대 연대장(侍衛隊 聯隊長) 홍계훈(洪啓薰)은 광화문(光化門) 밖에서 살해당하고 궁내 대신(宮內 大臣) 이경직(李耕稙)은 전각(殿閣) 뜰에서 해를 당했다. 난동은 점점 더 심상치 않게 되어 드디어 명성황후가 거처하던 곳을 잃게 되었다. 이 날 이 때 일본군(日本軍)에 피살, 녹원(鹿苑)으로 옮겨서 석유를 붓고는 불태우는 소화(燒火),오운각(五雲閣) 서봉(西峯) 아래에 잠매(潛埋)된 사실을 후에야 비로소 알았기 때문에 즉시 반포하지 못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일본 총리의 명령을 받은 주한 일본 공사 미우라,육군 소장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20여 명의 일본군(日本軍)을 지휘하고 궁성문을 열어준 친일 훈련대 대대장의 협조를 받아 1895년 8월 20일 경복궁으로 침입하였으며 미야모토 다케타로가 지휘한 20여 명의 일본군(日本軍)은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건청궁(乾淸宮) 곤녕합(坤寧閤)으로 침입하였다.내부(內部)대신의 고문 이시즈카 에이조가 일본 정부의 법제국 장관인 스에마쓰 가네즈미에게 보낸 에이조 보고서에 따르면 20여 명의 일본군(日本軍)은 건청궁(乾淸宮) 곤녕합(坤寧閤)으로 깊이 들어가 (상궁(尙宮)에게 제보받은 신체적 비밀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검사하고 신원을 확인한) 명성황후를 밖으로 끌어내 전과(戰果) 보고용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1897년 책봉)의 (코인 비(鼻)와 두 귀인 양이(兩耳)를 베어내는 유해를 셋으로 베어내는) 인상(刃傷)하고 녹원(鹿苑)으로 옮겨서 기름을 붓고 불태워버리는 오욕(汚辱)하였다.(왜군(倭軍)은 전과(戰果) 보고용으로 코와 귀를 베어 가 바친다) 타고 남은 소여(燒餘)한 주검을 태우고 남은 뼈인 유해(遺骸)를 하체(下體)만 철취(掇取)하여 오운각(五雲閣) 서봉(西峯) 아래에 숨겨 묻는 잠매(潛埋)하였다.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살해사건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러시아공사관 이어를 결정하게 하였고 을미독립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1897년 10월 12일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가 대한국(大韓國)의 주권자(主權者)이며 천제(天帝)의 아들 천자(天子)인 황제(皇帝)의 자리에 등극(登極)하고 왕후 민씨를 대한국(大韓國)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책(追冊)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冊封)하고 심순택(沈舜澤)이 백관을 거느리고 두 손을 공수한 상태로 허리를 약 15도 정도 굽히고 고개를 숙인 국궁(鞠躬), 3무도(三舞蹈), 머리를 상하로 세 번 조아리는 3고두(三叩頭), 국가의례에서 대신들이 황제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여 두 손을 치켜들고 만세를 부르는 산호 만세(山呼 萬歲), 산호 만세(山呼 萬歲), 재산호만세(再山呼 萬歲)를 창하였다. 빈전(殯殿)에 나아가 황후(皇后)를 책봉한 것에 대한 고유 별전(告由 別奠)을 지냈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대한제국 건국과 함께 명성황후(明成皇后) 추책(追冊), 국장을 치르고 1897년 11월 21일 청량리에 장례되었다가 1919년 2월 16일 남양주 금곡 홍릉(洪陵)으로 천장(遷葬)되었다.











명성황후(明成皇后:1897년 10월 대한제국 건국 후 추책(追冊))를 알현(謁見)했던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1897년)’이라는 책에서 명성황후는 40세를 조금 넘긴 듯했고 퍽 우아한 자태의 늘씬한 여성이었으며 피부는 너무도 투명하여 꼭 진줏빛 가루를 뿌린 듯했으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고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나는 그녀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감명받았으며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명석하고 야심적이며 책략에도 능할 뿐 아니라 매우 매혹적이고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사랑스러운 여인이라고 묘사하였다.언더우드부인과 번커부인의 평균 키보다 더 큰 명성황후 묘사도 비슷하였다.1883년 산수인물화가이며 최초의 사진사 지운영(池雲英)은 종로 마동(麻洞)에서 사진관을 개설하고 일반인의 사진을 촬영했으며 1884년 지운영(池雲英)은 미국인 퍼시벌 로웰과 함께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 명성황후 사진을 촬영하였다.









대한제국시대(1897- )에는 1901년 사진도감(寫眞都監)을 설치하여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와 황태자(皇太子:이척)를 사진 촬영하였다.명성황후(明成皇后)의 사진을 보고 그린 초상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6세손 이승만(李承晩)이 옥중에서 집필하여 1910년 미국에서 간행된 '독립정신'과 1927년 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장도빈(張道斌)의 '대원군과 명성황후',1940년 일본군국주의(日本軍國主義 Japanese militarism) 신문사가 발간한 반도이면사에 실렸으며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알현(謁見)한 비숍,언더우드 부인, 번커 부인의 명성황후(明成皇后) 묘사와 일치하므로 경운궁 대한제국황실역사박물관은 유일하게 명헌태후가 착용한 심청색(深靑色) 이화문(李花紋) 12등(十二等) 황후(皇后) 적의(翟衣)를 착용한 명성황후(明成皇后) 초상을 추사하여 전시홍보하여야 한다.
2014-10-27 20:5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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