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2009)까지만해도 일자리 찾기가 힘들다고 하소연했는데 올들어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져 직원 찾기가 더 힘들어졌다.
심지어 주강삼각주(珠江三角洲)에는 약 200만 명 가량의 공인이 부족하다고 전했다. 구정연휴 후 청도시 각 인재시장이 오픈하면서 구인구직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올해 인재시장을 살펴보면 예전과 달리 구인측에서 더 적극적으로 구직자에게 다가가야 했다. 모 샤브샤브 가게는 당장 오픈해야 되는데 직원이 없어 오픈날짜를 계속 미루고 있다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구인난의 주요 원인을 살펴보면 농촌에서도 도시와 비슷한 수준의 소득 창출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고향이 르자오(日照)인 모 청년은 아래와 같이 계산했다. 청도에서 근무할 때, 급여가 1200원, 집세와 생활비 700원을 지출하고 나면 500원 정도의 저금이 가능했지만 고향에서 가게라도 하게 되면 월 수익 2,000원으로 생활비 300원을 지출하고도 1700원이 남아 집도 마련할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농촌 창업환경이 좋아지고 있는 반면, 도시 급여는 큰 변화가 없고 소비 물가는 점점 높아져 가고만 있어 많은 구직자들이 도시를 포기하고 농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울러 80후 젊은 세대들이 구직하면서 월급보다 취직 환경을 더욱 중히 여겨 돈만 많이 주면 직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업은 한결 더 힘들어 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도 딱한 사정이다. 경제위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전보다 20% 인상된 급여를 지불해도 사람을 구하기가 힘들다.
중국의 최대 제조업 단지인 저장(浙江)성 이우(義烏)시의 업체에도 인력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성탄절 용품을 생산하는 많은 업체들은 수주량은 많으나 이윤은 낮아지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업계에서는 주요한 원인은 인건비 상승속도가 지나치게 빠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인력을 채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 단순 일자리일수록 구인난 심화
“일반 근로자(普工) 구하기가 가장 어렵다.” 저장성 이우시의 성탄용품 업체 연합회의 천진린(陳金林) 회장은 최근의 구인난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특히 주문량이 많은 시기에 숙련된 근로자를 채용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성탄절 용품은 수작업을 거쳐야 하는 제품이 많아, 특히나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다. 한 업체 사장은 “1,000여 명의 근로자를 확보했다면 납품에 문제가 없지만, 최근 2~3년 동안의 근로자 수는 계속 700명 수준이다. 임금을 계속 올려도 필요한 인력을 모두 채용하기가 어렵다.”고 호소했다. 주변의 다른 업체 역시 임금 수준도 작년보다 큰 폭으로 인상하고, 넉넉한 휴가를 보장해도 사람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일용직 근로자는 부족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 같은 구인난에는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업무의 내용 외에도 신세대 농민공의 취향, 일부 사회적 원인도 해당된다. 천진린 회장은 “성탄용품 생산은 단조롭다. 80~90년대에 태어난 신세대 농민공들은 이런 단순 반복적인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1세대 농민공 역시 오랫동안 이 같은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현재 노동시장의 주력은 80년대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인 점을 감안하면, 기업들은 앞으로도 인력을 구하기가 어려워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전 세대보다 학력과 직업에 대한 바람이 높아진 신세대를 만족시키려면, 임금뿐만 아니라, 보험 및 여가시간 확보 등 전반적인 복지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대기업이라면 감당할 수 있겠지만, 중소기업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 서부지역 개발로 동부지역 농민공 감소
대규모 산업 시설의 이전과 지방경제의 발전도 동부 연해지역 구인난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많은 노동집약형 산업이 서부 혹은 북서부로 이전을 하며, 대규모 근로자를 채용했다. 이로 인해 동남부 연해지역의 제조업체에 구인난이 발생한 것이다. 이 외에도 지방경제의 발전과 정부의 농촌 지원 강화도 동남부 지역의 구인난에 한 몫을 했다. 지방에서도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고, 외지에서 노동일을 하기보다는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도 증가했다.
한 공예품 생산업체 사장은 “이전에는 외지에서 온 근로자가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고향으로 돌아갔다.”면서, “월급을 3,000위안까지 올려도 큰 효과가 없었다. 농민공들의 입장에서 보면, 여기(이우)에서 3,000위안을 벌어도 방세와 식비 등을 충당하고 나면 얼마 남지 않는다고 한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을 하면, 가정도 돌볼 수 있기 때문에, 1,500위안의 월급이라도 만족한다는 것이다. 이우는 외지에서 장사를 하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구인난이 더욱 가중될 것이다.”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중국의 실질 임금 상승세는 대체로 과거와 비슷한 흐름을 유지하고 있으
나 최근 들어 다소 가속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2000년~2009년 물가 요인을
제거한 실질 임금 상승률이 연평균 14.6%를 기록했던
것에 비해 최근 3년 동안의 증가세는 연 16%를 넘어섰
다(그림 1 참조).
임금 추세를 좌우하는 근본적인 요인인 노동력 수
급관계도 점차 빠듯해질 것으로 보인다. 먼저 ‘1자
녀’ 정책 탓에 중국의 Baby boom 세대들이 2010년
부터 본격적으로 은퇴하면서 경제활동인구가 2015
년 전후에 최고치에 달한 후 그 비중이 점차 줄어들
고, 전체 인구에서 15~29세의 젊은 층 비중도 역시
서서히 감소될 전망이다. 2010년 24분기의 도시
인력 수급 현황을 보면 25~34세 연령대의 공급부
족이 가장 심각하다. 세계은행도 2010년 중국 인구
의 평균 나이가 34.2세, 2030년에는 40세로 높아
질 것으로 추정했다(그림 6 참조).
더군다나 최근 농민공 부족 현상이 연해지역뿐
만 아니라 내륙까지 확산되면서 중국은 이미 ‘루이
스 전환점3’에 도달했다는 견해까지 제기되고 있다
(그림 7 참조).
3 루이스 전환점 (Lewisian turning point)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더 루이스의 이름을 딴 개도국 경제발전 단계이론. 농촌의 값싼
잉여 인력이 도시의 산업분야로 진출하면서 제조업이 저임금 인력으로 발전을 지속하다 값싼 인력공급이 고갈되면서 전체적으
로 임금도 오르고 고성장도 둔화하는 현상을 말함.
임금 상승률만을 가지고 실제로 경제와 기업의 부담이 얼마나 늘어났는지를 판단
할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중국 노동자들의 노동생산성도 더불어 상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임금이 연평균 15%씩 급증해왔지만 같
은 기간 소비자물가의 평균상승률은 1.8%에 그쳤고 제조업의 이윤증가율도 높은
성장세를 유지해왔다. 그 이유는 바로 같은 기간 노동생산성의 평균증가율이
16.9%로 임금 상승률을 웃돌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을 찾는 중국 관광객들의 소득 수준이 중산층까지 확대되는 가운데 중국 관광객 사이에서 한국에서 ‘반드시 사야할 품목(Must have item)’으로 떠오른 것이 있다. 바로 대형마트에서 파는 한국산 고무장갑이다.
이마트의 한 관계자는 26일 “한국을 찾은 중국인들이 고무장갑을 ‘선물용’으로 많이 구입하고 있다“며 “한 사람이 고무장갑 10개 이상을 구입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고 전했다.
특히 하루 평균 200명이 넘는 중국 관광객이 찾는 동인천점에서는 이미 고무장갑이 쇼핑 필수 항목이 되고 있다. 이 곳의 한 바이어는 “중국 중산층에서 가정부의 임금이 높아지자 직접 주방 살림을 하기 위해 고품질의 국산 고무장갑을 찾는다”고 고무장갑 제조업체의 말을 인용해 전했다.
또 한류 열풍으로 중국 내 한국 드라마나 조선족을 통해 국산 고무장갑 품질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중국인들의 입소문도 한 몫하고 있다.
이같은 중국인들의 ‘고무장갑 쇼핑’은 인천공항을 비롯해 제주ㆍ김포공항, 인천항 등 중국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지역의 대형마트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이처럼 중국 관광객에게 인기를 끄는 한국산 쇼핑 품목은 과거 해외 명품에서 생활필수품으로 확대되며 다양해졌다.
수천만원을 호가하던 명품을 사기 위해 한국을 찾았던 중국 부호들이 아니라 평범한 월급쟁이로 사는 중산층 관광객들이 한국을 찾으면서 저렴한 생필품을 사기 위해 마트로 발길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 ..... 노조는 공산당의 통제하에 있는 ‘공회’이며, 회사의 관리자들이 노조의 자리를 차지 ........ ]
노동자 연쇄자살’ 폭스콘
중국 첫 자주적 노조 실험
등록 :2013-02-04
무기명 투표로 첫 노조대표 선거
당 통제 ‘공회’가 중심인 중국서
노동조직에 변화 가져올지 촉각
애플 하청 중국 최대 민간기업
열악한 노동환경 뭇매뒤 대수술
중국에서 120만명이 넘는 노동자를 고용해 애플의 아이폰 등을 생산하고 있는 거대 전자기업 폭스콘이 노동자들의 직접 선거를 통해 자주적 노조를 구성한다. 노동자 연쇄 자살과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비판받아온 폭스콘이 노동 관행을 대수술하겠다는 것으로, 당국이 통제하는 노조만 존재하는 ‘세계의 공장’ 중국의 노사 관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폭스콘은 노동자들의 선거로 노조 대표와 주요 위원들을 선출해 ‘진정으로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노조’를 설립하는 작업에 착수한다고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가 4일 보도했다. 폭스콘 관계자는 “폭스콘노동위원회연합의장(노조대표)과 소속 20개 위원회 위원들을 5년에 한번씩 무기명 투표를 통해 선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선거에서는 생산직 노동자를 더 많이 선출하고 관리자들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폭스콘 쪽은 밝혔다. 중국 내 대형 사업장 가운데 자주적 노조를 결성하는 것은 처음이다.
폭스콘은 춘절(설) 연휴 이후 미국 노동감시단체인 공정노동협회(FLA)의 지원을 받아 노동자들에게 노조 선거에 대한 교육을 시작할 예정이다. 우선 올해와 내년 임기가 끝나는 약 1만8000명 노조 위원들의 후임을 노동자들의 직선으로 뽑는다.
중국 대부분의 공장에서 노조는 공산당의 통제하에 있는 ‘공회’이며, 회사의 관리자들이 노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폭스콘의 현재 공회 대표인 천펑은 폭스콘의 설립자이자 회장인 궈타이밍의 비서실장 출신이다. 소식통은 “지금까지 폭스콘 노조 대표들은 공개적이고 투명한 입후보 절차 없이 비민주적으로 선출됐으며, 절반 이상이 관리자들로 채워져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인도의 노조 상급단체(노총)들은 굳이 한국 회사에 노조를 세우려 애쓰지 않는다. 정당에 소속된 인도노조 입장에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면 대형 외국 사업장 만큼 좋은 텃밭이 없다. 유사시엔 볼모로 잡기에 딱 좋고, 따라서 이들 사업장에 노조를 설립하기 위해 기를 쓰고 덤벼들 법하다. 더욱이 인도에선 6명만 의기투합하면 노조 설립이 가능할 정도로 자유롭게 노조를 만들 수 있다. 물론 회사 내에 여러 개의 노조가 활동하는 것도 허용된다.
인도노총(INTUC)의 P J 라주 사무국장은 “근로자 스스로가 노조 설립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지 총연맹 차원에서 노조를 만들도록 개입하는 경우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외국투자기업들은 강력한 노무관리로 근로자의 만족도가 높고, 생산성도 높다”고 외투기업을 칭찬했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등은 노조 없이도 잘 하고 있지 않느냐”고 되묻기까지 했다. 근로자의 권익을 회사가 알아서 챙겨주는데 굳이 노조가 ‘감 놔라 배 놔라’ 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또 노조설립은 해당 사업장 근로자의 문제이지 노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업에서 노조가 설립된 뒤 상급단체로 가입해도 “내셔널센터(노총)에서 각 기업노조의 일에 개입하는 경우는 없다”고 인도 고용노동부 관계자가 전했다. 말 그대로 기업 단위의 노사관계는 해당 기업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중앙차원에서 조직적으로 개입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기업에서 벌어지는 노사분규에 노총이 심심찮게 간섭하는 우리의 경우와 대비된다.
노조 설립과 관련해서도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삼성과 같은 무노조 기업에 노조를 세우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다. 9월 3일 민주노총 이석행 위원장이 이른바 현장대장정을 끝내고 기자들에게 배포한 자료에는 전략적인 첫 번째 사업과제로 ‘삼성 등 무노조 사업장에 대한 대책수립’이 들어있다.
한국노총도 마찬가지다. 양노총의 무노조 업체에 대한 노조 설립의지는 그 회사에 근무하는 근로자의 뜻과는 상관없이 ‘무조건적’이다. 회사가 세계 시장의 흐름에 따라 적절하면서도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을 지도 따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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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노조의 또다른 특징은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외국계 기업에 대해서는 그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도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에서는 쟁의행위가 거의 없다. 인도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하는 것은 대부분 임금체불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투자기업에선 임금이 밀리는 경우가 없어 파업이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연 8%대의 고도성장을 하며 한국경제의 잠재적인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는 인도와 베트남. 이 두 나라 노조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한다.
종업원이 512명인 삼성전자 베트남 공장에는 노조가 없다. 베트남 노동법은 10인 이상 사업장에는 반드시 노조가 있어야 한다. 삼성전자가 이처럼 법을 어긴 채 '무노조 원칙'을 고수하며 공장을 운영할 수 있는 것은 정부나 노총의 협조 때문이다. 베트남 노동부 다오 꾸앙 빈 국제협력관은 기업은 성장을 거듭하고 있고, 노동자의 복지수준도 높은데 법을 그대로 적용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 추낫빈 베트남노동총연맹 대외협력본부장은 외국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라면 현실에 맞지 않는 법을 과감히 바꿔야 한다며 투자 유치를 장려하는 법이나 제도라면 만들면 만들수록 좋고, 행정절차도 간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정의 이런 노력은 외국인 투자기업의 근로손실 일수 '0'일이라는 기록을 낳았다. 지난해 베트남 외투기업에서는 272건의 노사분쟁이 일어났지만 그때마다 노총이나 정부가 중재에 나서 하루(8시간)를 넘기지 않고 모두 해결했기 때문이다. 호찌민 주재 장근섭 노무관은 이곳에선 노조가 있는 게 더 낫다고 할 만큼 노조의 경제마인드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인도의 노조도 변하고 있다. 인도의 노조는 과거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회사 안에서 관리자에게 폭행도 서슴지 않아 외국 기업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노조가 나서서 기업을 괴롭히는 규제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라주 인도노총 사무총장은 파업이 발생하면 기업주도 공장을 폐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엔 그것도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돼 있는 등 기업을 지나치게 제약한다며 노동법을 개정토록 의회를 설득 중이라고 말했다.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창업주와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창업주는 노조에 관해서도 대조적이었다. 이 회장은 IBM·월마트·HP 등 세계적 기업에 노조가 없는 걸 보고 ‘무(無)노조 경영’을 원칙으로 삼았다. 1977년 제일제당 김포공장 여공들을 중심으로 노조 설립 움직임이 불거지자 이 회장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를 못 세운다”고 선언했다. 대신 “종업원이 노조의 필요성을 못 느낄 정도로 좋은 근로조건을 만들어라”라고 지시했다. 그 전통은 철칙처럼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노동계에선 ‘삼성은 노조에 대한 알레르기가 병적 수준’이라고 비난하지만 국민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회사가 좋은 경영 실적을 내고 직원들은 만족하는데 왜 노조가 없다고 시비를 거느냐는 얘기다.
글로벌 IT시장에서 애플의 아이폰에 맞서 안드로이드 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구글이 이번에는 라이벌이 됐다. 대학생들이 가장 취업하고 싶은 기업 1, 2위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14일 매일경제 LUXMEN과 모바일 여론조사 전문업체인 아이디인큐(대표 김동호),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공동으로 전국 대학생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취업 희망 기업’ 순위에서다. 삼성전자는 대학생들이 가장 취업하고 싶은 기업 1위를 차지했고, 구글은 오차범위 내에서 2위를 기록했다.
[.... (1964년)의 방직공장 女工(여공)들의 평균 월급은 3천4백40원이었다(..쌀 20ℓ 6백37원). ...절약하고 또 절약해서 부모님께 송금을 했다. 그리고 약간의 저축도 ......
.... 1970년이 되면서 ...한달 급료가 총 1만3백25원, ... 쌀 3백ℓ에 ....... ]
수출 전략의 입안자가 쓴 20世紀 한국의 위대한 世代-女工 찬가
『女工 여러분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나라를 구했습니다』
吳源哲
보릿고개
우리나라에는 古來(고래)로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한 말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다」는 말과는 차원이 다르다. 「보릿고개」는 農土(농토)가 적어서 자기 가족이 먹을 양식도 생산하지 못하는 農家(농가)에서 일어난다. 따로 소득도 없다. 그러니 「보릿고개」의 절박함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가난한 農家는 봄이 되면 식량이 떨어진다. 당장 저녁거리가 없다. 어린 자식들은 밥 달라고 보채고, 産母(산모)는 젖이 안 나와 젖먹이는 울부짖는다. 모두가 비슷한 처지라 양식을 꾸어올 데도, 꾸어줄 사람도 없다. 할 수 없이 채 여물지도 않은 보리이삭을 태워서 가루로 만든 다음 草根木皮(초근목피)를 넣고 죽을 쑤어 허기를 달랬다.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보리추수 때라야 끼니라도 때울 수 있는데, 그때까지 못 견디면 굶어 죽는다. 보리추수가 됐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 다음해에도 또 다음해에도 이런 상태는 계속된다. 「보릿고개」의 심각성은 가족 전체의 문제라는 데서 오는 좌절감과 영구히 해결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릿고개」를 당하는 농가는 食口(식구) 중 한 입이라도 줄이려고, 열 살도 못 된 어린 자식을 양자로 보낸다. 이들은 주로 딸들인데, 말이 양자이지 대개 식모살이를 했다.
「보릿고개」를 참다못해 도시에 나와도 일감이 없었다. 먹을거리를 구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매일 매일이 「보릿고개」였다. 이런 「보릿고개」는 1977년에 가서야 해결된다.
1960년에는 우리나라 인구 중 65%가 농촌에 살았다. 조그만 農家에 자식은 보통 5∼6명이나 되고 그 중의 반은 딸이었다. 그 당시 어느 농촌 소녀의 경우를 들어보자. 이 소녀는 초등학교 졸업 후 家事(가사)를 돕다가 15세가 됐다. 동생들은 늘어나고 식량사정은 더욱 어려워져, 마침내 공장으로 일하러 가기로 결심했다. 돈을 벌어 집을 돕겠다는 생각보다는, 우선 자기가 먹을 양식만이라도 절약해야 하는 절박한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소녀는 동네 또래 몇 명과 함께 공장으로 떠났다. 당시 공장에는 기숙사도 없었다. 이들은 조그마한 사글세방 하나를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이니 달리 기술이 있을 리 없었다. 생전 처음 재봉틀이란 것을 보았다. 전기 모터로 돌아가는 재봉틀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늘이 움직이는데, 그 속도가 하도 빨라서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까딱 잘못하면 바늘이 손가락에 박힌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을 배웠다. 당시는 일주일에 꼬박 6일을 일해야 할 때이니 월 25일을 일했다. 야간작업도 서슴지 않았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물론이요, 점심 저녁을 회사給食(급식)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때(1964년)의 방직공장 女工(여공)들의 평균 월급은 3천4백40원이었다(필자 注그 당시 서울 소비자물가를 보면 쇠고기 6백g이 1백29원, 연탄 10장 76원, 쌀 20ℓ 6백37원). 이 소녀가 받는 월급은 취업 초기에는 이보다는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약하고 또 절약해서 부모님께 송금을 했다. 그리고 약간의 저축도 해 추석 때는 선물을 사들고 그리운 고향으로 갔다.
열심히 일해, 차차 기술을 익혀 1970년이 되면서 일류 기능공이 됐다. 급료도 올라가서 日給(일급) 4백13원이 됐다. 한달 급료가 총 1만3백25원, 당시 쌀값이 20ℓ에 6백92원이었으니 쌀 3백ℓ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농촌 사정으로서는 아주 큰 수입이었다. 동생들의 학비도 마련해 주었으니 효녀라는 칭찬도 받았다. 부모는 대견해 했고 『딸자식이 아들 녀석보다 낫다』고 자랑을 했다.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농촌공동체의 붕괴, 離農(이농) 현상, 도시로 흘러든 농촌 출신 노동자들이 겪은 低임금 등에 대한 비판적 서술도 보인다. 이에 대해 權赫喆 박사는 이렇게 지적했다.
『농촌 공동체 속에서 평화로운 삶을 누리던 젊은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와 低임금 노동자로 전락한 것처럼 기술하는 것은 사실의 왜곡이다. 1960년대 농촌의 생산력은 제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을 찾아서 도시로 온 것이다.
1960, 70년대 女工들이 농촌을 떠나 공장에서 일했기에 가족들을 부양하고, 동생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농촌에 남아 있었다면,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다』
60년대 초 중반까지 식모가 엄청나게 많았다.
식모란 농촌에서 입을 줄이려고 부모들이 14~16세 정도되면 도시의 가정에 보내 일을 하게하여 밥을해결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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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공업화가 이루어지고 이렇게 식모살이하던 소녀들이 공장으로 몰려갔다.
이런 공장에 서로 들어가겠다고 난리였다. 그곳에가면 돈도벌고 야간학교도 갈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김지은양은 ' 보릿고개 '란 개념에 대해 아시나요 ? 30대 초반인 저도 보릿고개를 체험해보지는 않은 세대인데. 김지은양 정도 연배면 더 생소한 개념이겠죠. 쉽게 말해 가을에 추수한 쌀은 다 떨어져가고. 보리를 수확하려면 아직 먼 때. 그래서 먹을게 다 떨어진 때가 보릿고개입니다. 보리가 날 때까진 어떻게 해서든 버텨서 살아나야 하는 거죠. 못 버티면 굶어죽는거고요. 우리 부모님,조부모님 세대들. 정말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사신 분들인겁니다.
김일성이 말한 ' 이밥에 고깃국 '에서 고깃국 개념도 제 짐작엔 아마. 우리가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먹는 그런 갈비탕같은 의미의 고깃국은 아닐거란 생각이 드네요. 아마 쇠뼈라도 한조각 집어놓고 몇시간동안 우려낸 그런 국물이라도 먹게 하겠다. 그게 김일성의 공약(公約) 아니었을까요 ?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 절망과 기아선상의 나라를 구하겠다 '는 공약을 어느정도는 지킨 셈이지만. 김일성은 이밥에 고깃국은커녕 옥수수국물도 제대로 못먹는 나라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북한의 나이든 어르신들은 ' 차라리 일제시대때가 더 낳았다 '고 하겠습니까 ?
드라마 ' 야인시대 '를 지켜본 국내에 정착한 탈북자들은. 감옥에 갇힌 김두한이 애인인 나미꼬나 박인애등과 면회하는 모습을 보며. ' 일제시대 감옥이 북한보다 더 났다 ! '고 입을 모으시더군요. ...................
지금 황장엽씨 같은 분들의 아들,딸이 평양시내를 활보하고 다니는게 가능할거라고 생각하시나요 ?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할말 없습니다만.
' 해방후 식민통치로 낙후한 조선땅에서의 과제 '가 ' 빈곤으로부터의 탈출 '과 ' 근대적 민주주의 체제 수립 '이었다고 말씀하셨죠 ? 이 두가지가 과연 그럼 남한과 북한중 어느 사회에서 이루어졌느냐고 한번 다시 되묻고 싶어졌습니다.
“농활은 봉사하러 가는 게 아니라 배우러 가는거야. 안 가면 네 인생을 망칠 거야.” 그 선배를 무척이나 존경했던 ‘촌놈’인 나도 농활을 갔다.
노동경험이 적던 우리는 힘겨운 노동으로 고단한 밤에 엄격한 평가회를 했다. 소외된 농촌,가난한 농촌, 더 힘든 어머니들 등에 다들 쉽게 동의했지만, 촌놈인 나는 우리 농촌도 많이 발전했다는 내 경험적 확신을 주장했다. 실제 70년대 농촌은 상대적으로 가난하지만 크게 발전했다.거의 몇일을 날밤을 새다시피 논쟁했다. 그 논쟁은 (내가 부촌의,부잣집 아들의,개인적 경험을 지나치게 주장한다)로,내 동의없이, 마무리 되었다.
74년도에 부평공단에 위치한 D전자에 입사하여 하루일당
400원에 첫월급 12000원에 잔업수당,특근수당 플러스 알파를
받았다.
한달에 2번쉬는 일요일도 전날 토요일 저녁은 철야근무를
하였으니 제대로 쉬는날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거의 매주 콘테이너로 전자제품을 수출하면서
뿌듯한 마음에 힘든것도 즐겁게 승화시키며 보람있었다.
다들 어려웠던 시기에 박봉 이나마 곗돈도 붓고 적금도 붓고
하면서 내 부모 형제들과 행복하게 살았다.
군생활 끝내고 다시 시작한 전자회사 공돌이 신세가
결국엔 94년도에 해외공장 생산관리 과장을 끝으로 거의 20여년
만에 끝났다.
우리 선배들이 목숨바쳐 피로 지킨 나라를,
우리같은 사람들이 힘들게 일하고 땀흘려서 경제대국 대한민국을
이룩했는데.
지금 정권잡고 이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저 사람들 그때 당시
이나라가 어려울때 무엇하던 사람들인가.
맨날 반정부 데모하고,나라 어지럽히고,선동하던 사람들 아닌가.
나는 100번을 양보해도 저 사람들에게 이나라의 운명을 맡길순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서울시청 광장에서 큰소리로 대한민국을 소리높여
외칠것이다.
‘좌파의 늪’은 한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오기 힘들다. 좌파 정책은 중산층을 몰락시켜 빈곤층으로 내몬다. 그렇게 생겨난 빈곤층은 ‘평등한 세상’이라는 좌파 구호에 솔깃해 한다. 좌파정책은 빈부격차를 확대하고, 확대된 빈부격차는 다시 좌파 정권의 자양분이 된다. 그래서 좌파는 계속 정권을 재창출하지만 나라는 골병이 든다. 남미(南美) 여러 나라에서 되풀이 돼 온 악순환 구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