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광장
경운궁(慶運宮) 환원하고 연지(蓮池),인화문(仁化門),상림원(上林苑) 원형 복원해야
 김민수
 2016-06-02 13:28:56  |   조회: 3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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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慶運宮) 환원하고 연지(蓮池),인화문(仁化門),상림원(上林苑) 원형 복원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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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국주의 총독부(日本軍國主義 總督府:1910-1945)가 1911년 궁내부,사고의 실록 등 전적,고문서를 불법 이관하여 1935년 완료한 사관(史官)이 기록한 사초(史草) 등 사료(史料)의 수집(蒐集) 및 취사선택, 편수(編修), 수정, 첨삭하는 감수(監修)한 일본군국주의 통감부, 총독부 일지(日誌) 성격의 일본군국주의 이왕가실록 편찬위원(編纂委員)은 위원장은 시노다 지사쿠이며 감수위원(監修委員)은 오다 쇼고, 나리타 세키나이이며 사료수집위원(史料 蒐集委員)은 기쿠치 겐조이며 서무위원(庶務委員)은 스에마쓰 구마히코, 시가 노부미쓰이며 회계위원(會計委員)은 사토 아키미치이며 감수 보조위원(監修 補助委員)은 총독부 이사관 에하라 젠쓰이이며 편찬 보조위원(編纂 補助委員)은 총독부 도경시 하마노 쇼타로, 총독부 군서기 미즈바시 후쿠히코이며 사료 수집 보조위원(史料 蒐集 補助委員)은 기타지마 고조이다. 일본군국주의 총독부가 사관(史官)이 기록한 사초(史草) 등 사료(史料)의 수집(蒐集) 및 취사선택, 편수(編修),수정, 첨삭하는 감수(監修)한 이왕가실록은 일본군국주의 총독부(日本軍國主義 總督府:1910-1945)가 대한국(1897- )을 불법 통치한 대한시대 대한광복운동기(1906-1945)에 대한국(1897- ) 역사를 왜곡하고 통감부, 총독부, 일본 왕실, 일본군 기사를 중심으로 편수(編修),감수(監修)하여 편찬한 일본군국주의 통감부, 총독부 일지(日誌)이므로 통감부, 총독부, 일본 왕실, 일본군 기사를 삭제하고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 Gojo Gwangmooje:1897-1919)실록을 수정, 편집하였다.












1592년 왜국(倭國)이 명국(明國)의 요동(遼東)을 정벌하려 하니 그 길을 빌려 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청했고 조선국(朝鮮國:1393-1897) 14대 국왕 선조가 대의(大義)로 매우 준엄하게 정명가도를 거절하자 왜국(倭國)이 왜군을 총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조선국(朝鮮國)을 침입(侵入)해왔다. 1592년 4월 13일 왜국(倭國)이 조선국(朝鮮國)을 침입(侵入)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평안도 의주로 나라에 난리(亂離)가 있어 임금이 궁궐 밖으로 피하는 몽진(蒙塵)하였던 조선국 14대 국왕 선조가 조선국 도읍 한성(漢城:1395년 이후 조선국,대한국 도읍 명칭)으로 환도(還都)한 후 추존 왕 덕종(德宗:의경세자)의 맏아들이며 9대 국왕 성종(자산군)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를 국왕의 시어소(時御所)로 쓰면서 정릉동(貞陵洞) 행궁(行宮)이 되었고 1608년 선조가 승하한 후 조선국(朝鮮國) 15대 국왕 광종(光宗:광해군 묘호 추상)이 이 궁(宮)에서 즉위하면서 궁호(宮號)를 경운궁(慶運宮 Gyeongwoongoong)으로 명명(命名)하였다. 1767년 12월 12일 춘추관의 당상과 낭관에게 1407(태종 7)년인 정해년 실록(實錄)을 찾아 오라고 명하였는데 기사관(記事官) 류강(柳焵)이 실록을 읽어 아뢰었는데 상왕이 승하 시까지 한시적으로 임어한 상왕전(上王殿)의 전호(殿號)인 덕수궁(德壽宮)의 대목에 이르자 영조가 말하기를 “상왕전(上王殿)인 덕수궁이 어느 곳에 있는가?”하니 류강이 말하기를 “상고해 볼 만한 문헌이 없습니다.”하였다. 1768년 5월 22일 영조가 하교하기를 “상왕이 승하시까지 한시적으로 임어한 상왕전(上王殿)의 전호(殿號)인 덕수궁(德壽宮)은 지금의 시민당(時敏堂)이고 연희방(燕喜坊)은 지금의 흥덕동(興德洞)이다.”하였다.덕수궁은 조선국(朝鮮國:1393-1897)이 상왕(上王) 승하(昇遐)시까지 한시(限時) 사용한 상왕전(上王殿)의 이름이며 대한국(大韓國:1897- )과 관계없다.








1897년 경운궁(慶運宮: 터 경계에서 10미터 떨어진 지점 지표면에서 바라본 앙각 27도 아래로 2층 6미터 제한)으로 이어(移御)한 대한국(大韓國:1897- )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 1897-1919)는 10월 12일에 백악(白嶽:북악산)의 남쪽 황단(皇壇)에서 천제(天帝)에 고유하는 천제(天祭)를 봉행하고 대한국(大韓國)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에 등극하며 천하에 국호(國號)를 정하여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을 삼는다고 천명하여 조선시대(1393-1897)에 이어 대한시대(大韓時代:1897년- )가 시작되었다. 1895년 이토 일본 총리의 명령을 받고 친일 훈련대와 친일 상궁의 협조를 받은 일본 군경에 오욕,살해된 조선국 왕후 민씨(閔氏)를 대한국(大韓國) 명성황후(明成皇后:언더우드,번커,비숍은 40세가 조금 넘은 평균 키보다 더 큰 마른 체형과 검은 머리에 희고 갸름한 얼굴이라고 묘사)로 추책(追冊)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冊封)하였으며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황태자(1919년 1월 고조 광무제 붕어(崩御) 후 2대 황제(1919.1-4) 등극한 @종 @@제) 이척이 황제에게 축하 인사를 올리는 진치사의(進致詞儀),문무백관들이 황제에게 축하를 올리는 하표의(賀表儀)를 비로소 거행하였고 역대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특별히 대사령(大赦令)을 행하였다. 일본군국주의 총독부가 대한국을 불법 통치한 대한시대(1897- ) 대한광복운동기(1906-1945)에 대한국 고조 광무제, @종 @@제의 묘호(廟號),제호(帝號)를 황제 추존 시 묘호,제호 올리는 예로 잘못 올렸으므로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종 @@제의 묘호(廟號),제호(帝號)를 올려야 한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대한국(大韓國)을 건국한 1897년 원단(圓壇)을 황단(皇壇)으로, 종묘를 태묘(太廟)로,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국사와 국직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격상하여 개칭하였으나 일본 군국주의 통감이 1907년 정미늑약 불법 늑결,대한국군을 강제 해산시킨 후 헤이그 특사(特使) 파견을 이유로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를 부정하며 황태자에게 조선국 왕궁 창덕궁에서 대리청정을 명령하고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의 고조 광무제가 임어한 양전(洋殿)의 전호(殿號)를 상왕이 승하(昇遐)시까지 한시(限時)적으로 사용한 전호인 덕수궁이라 하였으며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 대한국 광복 이후에 그 이름을 사용할 이유가 없으므로 경운궁(慶運宮) 궁호(宮號)를 환원하여야 한다.







1905년 11월 18일 일본군국주의가 대한국의 외교권을 침탈하는 을사늑약의 불법 늑결로 1906년 일본군국주의의 통감통치가 시작된 후 4월부터 대리청정을 강요하였고 1907년 일본군국주의 통감부에 의해 대한국 1대 황제 고조 광무제가 황태자(2대 황제 @종 @@제)에게 조선국 왕궁 창덕궁에서 대리청정을 명령하였고 일본군국주의 통감부(統監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7월 19일 황태자의 대리청정 명령을 대한국 황제 고조 광무제가 불참하는 권정례(權停例)로 행하였으며 경운궁(慶運宮)의 서양식 근대건축물인 대한황실역사박물관 건물은 대한국 황실 궁내부가 1900년 착공하였다. 대한국황실역사박물관 1층은 전시실, 2층은 알현실·귀빈실, 3층은 침실·욕실 등 황제의 공간이다. 경운궁(慶運宮) 안의 양관(洋館) 대한황실역사박물관 건물은 대한국 정부의 재정고문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영국인 기사인 하딩이 설계하고 건축 기사 심의석(沈宜錫)이 전체적인 공사를 감독했으며 1904년 이후 영국인 데이비슨이 대한황실역사박물관 건물 공사 감독을 맡았다. 완벽한 좌우 대칭의 대한황실역사박물관 건물은 고전주의 양식을 채택하였으며 이오니아식 기둥이 상부를 떠받치고 있다. 1907년 7월 황태자 이척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은 일본군국주의 통감의 강박에 의한 것이며 대한국 황제 고조 광무제는 대한국 황궁 경운궁(慶運宮)에 1919년 붕어(崩御) 시까지 임어(臨御)하였고 황태자(이척)와 국고금(국유재산)을 매국 기여도에 따라 나눠가진 친일 고관들이 조선국 왕궁 창덕궁으로 옮겨 간 것이며 일본 군국주의에 국권을 강탈당한 나라도 대한국이고 1945년 일본(日本)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한 나라도 대한국(大韓國)이므로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 궁호(宮號)의 환원은 완전한 대한국의 광복을 위한 역사적 당위이다.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는 일본군국주의의 대한국 침략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다. 일본 군국주의는 1904년 2월 8일 한반도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대한국 한성(漢城)을 점령하여 황궁 경운궁을 무력을 동원하여 공격한 후 1904년 2월 23일 대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전략 요충지인 대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갑진늑약(甲辰勒約)을 불법 늑결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1905년 2월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의 독도(獨島)를 비롯한 대한국(大韓國)의 군사 요충지를 불법 점령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국을 강제 병탄(倂呑)하기 위하여 11월 9일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파견하여 일본군을 앞세워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불법 늑결을 대한국 정부에 강요했으며 11월 18일 불법 늑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에 대한국의 실질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통치자가 일본군국주의 통감이라고 규정했다.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의한 여러 사무를 관장한 일본 통감은 일왕에 직속하고 외교는 일본 외무대신을 거쳐 총리대신을, 기타 사무는 총리대신을 거쳐 상주하고 재가를 받게 되었고 일본 통감은 대한국의 일본 관리 및 관청이 시행하는 업무를 감독하고 한국 수비군 사령관에 대하여 일본군(日本軍) 병력 사용을 명령할 수 있었다.1906년(광무 10) 2월 1일 일본군국주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하여 한국 수비군을 통수하는 원수의 자격을 겸임, 1개 사단 규모 이상의 전시 편제 일본군(日本軍)을 주둔시키고 경찰기구도 강화시켜 나갔다. 일본인 경찰고문이 5명에서 678명으로 급격하게 늘었으며, 경찰 수도 1,851명에 이르게 되었고 헌병대도 강화시켜 경술늑약(庚戌勒約) 불법 늑결, 대한국 불법 병탄(倂呑) 이후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통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기반을 이루었다. 을사늑약(乙巳勒約) 불법 늑결, 통감부(총독부의 전신) 설치 이후 대한국 국권 회복을 위한 한민족의 저항이 대한독립운동·계몽운동과 같이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전개되었으며 대한국 고조 광무제의 헤이그 특사 파견, 반일 상소, 자결이 계속되었다.







1905년 일본군국주의가 러일전쟁을 승리한 후 11월 18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불법 늑결하고 1906년 2월 설치된 일본군국주의 통감부가 1907년 헤이그 특사(特使) 파견을 이유로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를 부정하며 일본군국주의 통감이 대한국 황태자 이척에게 조선국 왕궁 창덕궁에서 대리청정을 명령하고 경운궁(慶運宮)의 한 서양식 전각 양관(洋館)의 전호(殿號)를 조선시대에 상왕이 승하 시까지 한시적으로 사용한 상왕전의 전호인 덕수궁으로 명명(命名)하였다. 1907년 11월 14일 창덕궁 황태자(皇太子) 전하가 이르기를 “광무제 폐하가 임어(臨御)할 전호(殿號)인 덕수궁(德壽宮)을 안국동(安國洞)에 영건(營建)하라.”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일본 국왕, 총독이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를 덕수궁(경운궁 연지(蓮池) 북쪽의 서양식 양전(洋殿)의 명칭), 황태자궁인 창덕궁에 황태자(皇太子)를 임어하게 하였다.1913년 3월 4일 창덕궁 황태자가 영국인(英國人) 데이비슨에게 주대정식 은제 향로(周大鼎式 銀製 香爐) 1개(箇)와 금(金) 500원(圓)을 증여하였는데 이는 경운궁 연지(蓮池) 북쪽의 서양식 대한황실역사박물관 건물 건축의 감독으로 다년간 경영했으므로 기념품을 내린 것이다.1922년 4월 26일 이은이 동경에서 돌아와 경운궁 연지(蓮池) 북쪽의 서양식 대한황실역사박물관 건물에 입차(入次)하였다. 5월 11일 고조 광무제 3년상중 혼인(우리나라는 부모의 3년상(Samnyeonsang) 중에는 시험에 응시하는 부시, 혼인하는 혼취를 하지 않는 동방예의지국이다)한 이은과 일본 왕족 마사코(Masako)의 아들 이진이 경운궁 연지(蓮池) 북쪽의 서양식 대한황실역사박물관 건물에서 죽었다.엄씨 묘 서쪽에 마사코의 아들을 4촌의 벽(椑)에 넣어 묻었다.(숭인원은 고조 광무제의 아들 이육의 묘,관은 6촌- 8촌)







​대한국 상해정부의 조직적인 대한국 광복운동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군국주의 총독부가 마사코에게 착용시킨 후 동영상을 촬영한 적의는 정치선전용으로 일본 교토 가와시마 직물에서 직조(織組)한 것이다. 대한국령(大韓國領) 독도(獨島:Dokdo) 불법 강점,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의 일본해 불법 표기, 갑진늑약, 을사늑약, 정미늑약 불법 늑결, 통감통치, 총독통치 등 일본군국주의 불법 침략을 합리화, 정당화하고 있고 정치선전용으로 일본 교토 가와시마 직물에서 직조(織組)한 마사코에게 착용시킨 후 동영상을 촬영한 적의는 대한국 조약 체결 비준권자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조선국 국왕(1863-1897),대한국 황제(1897-1919))가 비준하지 않아 원천적으로 불법,무효한 대한국(大韓國)을 불법 병탄(倂呑:illegal annexation)한 경술늑약(庚戌勒約) 불법 늑결을 고조 광무제의 국상(3년상중에는 혼인하는 혼취하거나 과거에 응시하는 부시하지 않는다) 중인 1920년 이은과 혼인한 일본 왕족 마사코를 내세워 일본군국주의의 대한국(大韓國) 불법 병탄(倂呑:illegal annexation)이 아닌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합병조약으로 왜곡(歪曲) 날조(捏造), 정당화하기 위해 준 것이다. 일본 스스로 합법적인 합방을 주장하면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을 수 없으므로 우리나라에서 전시홍보하라고 보내준 것이다.








덕수궁은 조선국(朝鮮國:1393-1897)이 상왕(上王) 승하(昇遐)시까지 한시(限時) 사용한 상왕전(上王殿)의 이름이며 대한국과 관계없다.1945년 8월 15일 대한국 광복 이후에도 1910년 8월 29일 일본 국왕, 총독의 불법 병탄, 덕수궁(경운궁 연지(蓮池) 북쪽의 서양식 전각의 명칭) 기술한 총독부가 편수한 일본군국주의 이왕가실록을 보고 이를 대한국 황궁의 궁호 경운궁이 조선국이 상왕 승하 시까지 한시적으로 사용한 상왕전의 이름인 덕수궁을 그대로 두고 경운궁(慶運宮) 궁호를 환원하지 않았으므로 문화재청은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 궁호(宮號)를 환원, 재지정해야 하며 문화재 터 경계부터 10미터 떨어진 지점 지표면에서 앙각 27도 아래로 제한 법제화해야 원형 복원 가능하므로 문화재보호구역 500m 안 지역에서 문화재 경계로부터 10m 떨어진 지점에서 올려다보는 각도인 앙각 27도에 해당하는 높이 아래로 건축물 증축,신축 시 높이를 제한하여야 한다.1907년 이토 일본군국주의 통감이 대한국 황태자에게 조선국 왕궁 창덕궁에서 대리청정을 명령한 후 반일 정미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자 일본군국주의 통감은 대한국(大韓國)을 불법 병탄(倂呑)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대한국 순행권자인 황제가 아닌 황태자에게 지방을 순행(巡幸: 통감부의 선전 쇼,황족 책봉,황제 추존,조약 체결 비준은 대한국 황제의 고유 권한)하게 하며 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 대리청정기간은 고조 광무제의 치세(治世), 통감부의 강박에 의한 것)이 아닌 황태자의 2대 황제(1919.1-) 등극(고조 광무제가 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한 것을 이토 히로부미 일본 통감이 황제 선위로 조작,1911-1935년 편찬 시 대리청정 뒤에 선위를 삽입)로 왜곡,선전하였다. 1623년 16대 국왕 인조가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였으며 1897년 2월 20일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하면서 대한국 황궁(皇宮)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은 1900년 궁장(宮墻) 공사가 완성되었고 1901년 경운궁과 경희궁,경운궁과 의정부(議政府)를 연결하는 운교(雲橋)가 가설·개통,1902년 중층의 중화전(中和殿)이 창건되었으나 1904년 일본군국주의가 러일전쟁을 도발하여 2월 8일에 일본 해군은 인천에서 러시아 군함을 격파하고 중국 여순항의 러시아 기지를 기습공격했다.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日本軍)은 한성(漢城)으로 진주하여 대한국 내 군사 전략요충지의 수용을 인정하는 갑진늑약 조인을 강요했다. 한성(漢城)의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을 공격, 방화(放火)한 후 간도로 북진하였고 4월 14일 일본군의 방화(放火)에 의한 대화재로 대부분의 전각(殿閣)이 소실(燒失)되어 1905년 이후 태극전(太極殿)·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함녕전(咸寧殿)·대한문(통감부 설치 직후인 1906년 음력 4월 대안문 수리공사 시작) 등 전각, 문이 중건되고 양관(洋館) 대한황실역사박물관 건물이 신축되었다. 1906년 4월 25일 중건도감(重建都監) 의궤 당상(儀軌 堂上) 이재극(李載克)이 아뢰기를 “경운궁(慶運宮) 대안문(大安門)의 수리를 음력 4월 12일로 길일(吉日)을 택하여 공사를 시작할 것을 상주(上奏)합니다.”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치되 아뢴 대로 거행하라.”하였다. 1906년 5월 1일 병오년(丙午年) 음력 4월 8일 중건도감(重建都監)에서 대한문 상량문 제술관(大漢門 上樑文 製述官)은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이근명(李根命), 서사관(書寫官)은 종1품 윤용구(尹用求), 편액 서사관은 특진관(特進官) 남정철(南廷哲)을 주차(奏差)하였다. 경운궁 대안문(大安門)은 경운궁의 동쪽 문이자 정문이며 ‘크게 편안하다’는 뜻이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다른 조선국 궁궐처럼 남쪽 문인 인화문이었으나 천제(天帝)에 천제(天祭)를 봉행하는 황단(皇壇)을 바라보는 대안문(大安門)이 정문 기능을 하게 되었다. 1904년 4월 14일 일본군의 방화(放火)에 의한 경운궁 대화재 소실(燒失),1905년 11월 을사늑약 불법 늑결 후인 1906년 통감부 설치 후에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개칭하게 되었는데 편액은 남정철이 썼으며 대한문 개칭 사유는 알 수 없다. 대한문 상량문(大漢門 上樑文)에 “황하가 맑아지는 천재일우의 시운을 맞았으므로 국운이 길이 창대할 것이고, 한성(漢城)이 억만 년 이어갈 터전에 자리하였으니 문 이름으로 특별히 건다고 나와 있다. 한성을 수도로 정하며 새로 태어난 대한국이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은 말이다. ‘한(漢)’은 ‘하늘’, ‘한수(漢水)’는 ‘은하수(銀河水)’를 뜻한다. 대한문 상량문(大漢門 上樑文)에는 대한(大漢)이란 정문을 세우니 고문(皐門: 궁의 바깥문)과 응문(應門: 궁의 정문)의 규모를 다 갖추었도다. 단청을 정성스레 칠하고 소한(霄漢)·운한(雲漢)의 뜻을 취하였으니 덕이 하늘에 합치하도다" 하였다.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은 조선국 서궐 경희궁 사이에 어원(御苑) 상림원(上林苑)과 궁장(宮墻), 북쪽에 평장문(平章門)과 포덕문(布德門), 영국 공사관 쪽에 생양문(生陽門), 서북쪽에 영성문(永成門),회극문(會極門), 서쪽에 평성문(平成門),서남쪽에 용강문(用康門), 동쪽에 대안문(大安門), 남쪽에 인화문(仁化門)의 대문이 있으며 조하(朝賀)를 받는 중층의 정전 태극전(太極殿), 편전 덕홍전(德弘殿), 고조(高祖) 광무제의 침전 함녕전(咸寧殿),접현실·연회장 정관헌(靜觀軒),명헌태후(明憲太后)가 붕서(崩逝)한 수인당(壽仁堂),어진을 봉안하는 선원전(璿源殿), 외국 공사를 접현한 황실 도서관 수옥헌(漱玉軒), 고조 광무제의 접현실 구성헌(九成軒), 환벽정(環壁亭), 이토 일본군국주의 통감이 창덕궁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한 돈덕전(惇德殿), 고조 광무제가 임어한 양전(洋殿)인 대한황실역사박물관 연지(蓮池),명성황후의 혼전(魂殿) 경효전(景孝殿),고조 광무제가 축문(祝文)에 친압(親押)하는 청목재(淸穆齋), 태조 고황제의 어진을 봉안한 흥덕전(興德殿),순명황후(純明皇后)의 혼전(魂殿) 의효전(懿孝殿), 명헌태후의 혼전 주다례(晝茶禮)를 행한 효혜전(孝惠殿),황태자비 민씨가 훙서한 석어당(昔御堂), 고조 광무제가 외국 사절을 접견한 준명당(浚明堂),어진(御眞)·예진(睿眞)을 봉안한 흠문각(欽文閣), 황족(皇族)과 귀족의 교육을 관장한 수학원(修學院),대한국 황실 사무와 근대적 광무유신을 추진한 궁내부(宮內府),대한국 최고 군통수기관 원수부(元帥府),황단 남쪽에 고조 광무제가 독일의 헨리 친왕(親王)을 회현(會見)한 대관정(大觀亭)이 있다.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의 궁전 지붕을 황와(黃瓦)로 번와(飜瓦)하고 1938년 일본군국주의 총독부가 양전 대한황실역사박물관 건물 앞에 신축한 일본 미술관(일본군국주의 총독부가 사직단에 설치하려다 실패하여 경운궁에 설치한 물을 하늘로 내뿜는 역천인 분수)을 철거하여야 하며 1904년 4월 간도로 북진하기 위해 한성(漢城)에 주둔한 일본군의 방화(放火)에 의한 태극전(太極殿) 소실(燒失) 이전을 기준으로 원형 복원,창덕궁 서원(西苑)으로 이건한 선원전(璿源殿),대안문(大安門) 원 위치 복원 및 금천교 권역 확장, 정문 인화문(仁化門),상림원(上林苑),운교(雲橋)를 원형 복원하고 대한황실역사박물관은 1904년 이후 러일전쟁, 갑진늑약(甲辰勒約), 울릉도 독도 강점, 을사늑약(乙巳勒約) 늑결, 일본군국주의 통감부(統監府) 불법 통치,1907년 7월 이후 황태자(皇太子) 이척의 대리청정(代理聽政),정미늑약(丁未勒約) 늑결,이토 일본군국주의 통감의 대한국 순행에 따라간 황태자 이척 등 일본군국주의의 대한국 침략을 올바로 전시설명하여야 한다.
2016-06-02 13:2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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