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광장
마사코,진,구 이장, 영휘원을 엄씨 묘로 개칭,숭인원을 이육(李堉)의 묘로 바로잡아야
 김민수
 2016-09-05 13:51:38  |   조회: 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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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코,진,구 이장, 영휘원을 엄씨 묘로 개칭,숭인원을 이육(李堉)의 묘로 바로잡아야



숭인원을 이육(李堉)의 묘로 바로잡고 마사코,진,구 이장, 영휘원 엄씨 묘로 개칭해야



​황태제 의친왕(義親王)을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고 의친왕릉의 능제를 격상해야



의친왕(義親王)을 황제 추존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고 의친왕릉 능제를 격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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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0월 12일 대한국(大韓國1897- )을 건국한 고조(高祖Gojo) 광무제(光武帝:1897-1919)는 1900년 황제의 아들인 황자(皇子)인 의친왕(義親王), 영친왕에게 친왕(親王) 책봉(冊封)하였다.1901년 9월 14일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윤용선(尹容善)이 고조 광무제에게 황제국의 비빈(妃嬪)은 후궁의 벼슬인 후궁지관(後宮之官)이라고 하였다. 비(妃)는 번국 국왕의 아내와 황제국 황태자,황태제,친왕의 아내,후궁(後宮)이다. 대한국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명성황후 민씨와 후궁인 비빈(妃嬪) 귀인 장씨(황태제 의친왕의 어머니), 귀비 엄씨, 귀인 이씨, 소의 이씨, 귀인 정씨, 귀인 양씨 등 총 6명의 후궁(後宮)과의 사이에 많은 황자(皇子)들이 있었다.(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윤용선(尹容善)이 친왕(親王)의 어머니는 후궁(後宮) 귀비 진봉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나 엄씨만이 후궁(後宮) 귀비 진봉하여 미스테리이다.)





​고조 광무제와 궁인 양씨의 딸 덕혜는 대한국 황궁 경운궁에서 태어났다. 1925년 3월 24일 일본군국주의 총독부는 덕혜에게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도록 명하였다.1926년 4월 8일 덕혜는 @종 @@제의 환후(患候)가 극심하다는 것을 전달받고 이은과 함께 유럽여행을 중단하고 돌아와 문후(問候)를 아뢰었다. 군주제(君主制)의 대한국(大韓國)은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로 4월 공화제(共和制)의 대한국으로 전환되었으며 대한국 고조 광무제의 직계 후손은 황위 승계 1순위 의친왕의 후손이다. 의친왕은 1893년 12월 6일 의친왕비(義親王妃) 김수덕(金修德)과 혼인하였으며 1900년 8월 의친왕(義親王)에 책봉(冊封)되었으며 1906년 대한국 육군 부장(陸軍 副將)이 되었고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대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받았다.





 1905년 11월 18일 일본군국주의가 대한국(大韓國)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을 간섭하는 을사늑약을 불법 늑결한 후 1906년 총독부의 전신인 통감부를 설치하여 대한국 불법 병탄(倂呑)을 꾀하였다. 1907년 고조 광무제는 영친왕비의 간택(揀擇) 기일(期日)을 뒤로 미루어서 정하는 퇴정(退定)을 명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상설,이위종을 특사(特使) 파견하여 불법 무효한 을사늑약(乙巳勒約)의 파기를 회의 의제에 상정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군국주의 통감부는 대한국을 불법 병탄(倂呑)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헤이그 특사 처벌, 정미늑약 불법 늑결, 대한국군 강제 해산시킨 후 헤이그 특사(特使) 파견을 이유로 대한국 고조(高祖Gojo) 광무제(光武帝) 퇴위를 요구하며 황태자에게 조선국 왕궁 창덕궁에서 대리청정을 명령하고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을 조선시대에 상왕들의 궁에 승하 시까지 한시적으로 사용한 일반 궁호 덕수궁(상왕과 상왕전을 승하 시까지 한시적으로 사용하는 이름)으로 격하시켰고 정부가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 궁호를 환원하지 않고 있다.





대한국 황태제(추봉) 의친왕(義親王)은 2대 황제 @종 @@제(1919.1 - 4)의 다음 서열로 황위 승계 1순위이었으나 1895년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살해,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을사늑약을 불법 늑결하였고 1906년 설치된 일본군국주의 통감부의 방해로 황태제 책봉(冊封)이 되지 못하였고 1910년 8월 경술늑약 불법 늑결 이후에는 일본군국주의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여 대한광복운동가들과 끊임없이 접촉, 교신하며 대한광복운동을 지원하였다. 일본군국주의 총독부는 대한국 황실 궁내부를 폐지하고 황족에 왕,공의 작위를 주어 일본 왕실에 불법 편입하였다.1911년 11월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의친왕을 망명하게 하여 대한광복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 대동단(大同團)의 김가진(金嘉鎭),전협(全協)과 망명을 모의하였으나 대한국령 간도의 안동에서 일본군국주의 경찰에 발각되었지만 일본에 저항하여 배일 정신을 지켜내었다.





​황태제(추봉) 의친왕(義親王)은 1948년 8월 15일 서울에 대한국 정부 수립 후 사동궁에서 임어하다가 1955년 8월 서울시 종로구 안동궁에서 붕어(崩御)하였다. 고조 광무제의 친부인 흥선대원군을 조선국 국왕, 대한국 황제로 추존하고 대한국(大韓國1897- ) 황실 황위 승계 1순위 황태제(추봉) 의친왕을 대한국(大韓國) 황제로 추존하여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고 대한시대 대한광복운동기에 각 민족 집단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그 귀속과 정치 조직, 정치적 운명을 결정하고 타 민족이나 타 국가의 간섭을 인정하지 않는 민족자결(民族自決: self-determination)의 국제정세를 인식하고도 마사코(Masako)와 혼인,일본군 중장 역임하고 유럽여행을 다니며 일본군국주의에 저항하지 않은 이은,마사코 신주를 거주(去主)해야 한다.일본군국주의 총독통치 13년인 1922년 5월 17일 마사코의 생후 8개월인 아들을 4척(四尺)의 관 안에 넣는 벽(椑:6척 이하)에 넣어 궁인 엄씨 묘의 왼편에 묻어주었다. (황족,왕족의 관인 재궁은 7-8척이며 궁인 엄씨 묘의 남쪽에는 궁인 이씨의 아들 이육의 묘가 있다.)








대한국(大韓國) 고조(高祖Gojo) 광무제(光武帝)는 대한국 황족(皇族) 책봉권자로서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추책(追冊)하였으며 1907년 영친왕비(英親王妃)의 간택(揀擇) 기일(期日)을 뒤로 미루어서 정하는 퇴정(退定)을 명하였으며 1910년 8월 일본군국주의의 무력을 동원한 불법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은 무효이고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로 4월 중국 상해에 공화제의 대한국 정부가 수립됐다. 영친왕(英親王)은 대한국 1대 고조 광무제의 일곱째 황자이며, 어머니는 1895년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살해 후 득세한 명성황후를 모시는 시위상궁(侍衛尙宮)이었던 귀비(황제국 후궁 중 으뜸 벼슬) 엄씨이고 1900년(광무 4) 8월 영친왕(英親王)에 책봉되었으며 1901년 9월 14일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윤용선(尹容善)이 고조 광무제에게 황제국의 비빈(妃嬪)은 후궁지관(後宮之官)이며 친왕(親王)의 어머니들을 귀비(貴妃)로 승봉하라고 아뢰었다.1907년 이토 일본군국주의 통감이 영친왕을 대한국 강제 병합의 볼모로 일본에 데려갔고 영친왕은 대한시대 대한광복운동기에 민족자결의 국제정세를 인식하고도 일본군국주의에 저항하지 않고 마사코와 혼인하여 유럽여행을 다녔다.





1910년 8월 일본군국주의의 불법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庚戌勒約) 불법 늑결 이후 1912년 동제사(同濟社) 조직, 1914년 대한광복군 정부 수립,1915년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결성,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조직, 1918년 신한청년당 결성 등 대한국광복운동이 조직화되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한국의 독립(獨立)을 청원하자 일본군국주의 총독부가 고조(高祖Gojo) 광무제(光武帝)를 독살(毒殺)했다. 군주제(君主制)의 대한국(大韓國)은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로 4월 공화제(共和制)로 전환되었으며 대한국 황족의 책봉권자인 고조(高祖) 광무제는 1907년 1910년 8월 일본군국주의의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庚戌勒約) 불법 늑결은 불법 무효이고 1919년 4월 대한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공화국으로 전환되어 대한국 황제는 영친왕비(英親王妃)를 책봉(冊封)하는 3간택,책비례를 거행,책보 제작한 사실이 없고 대한국 황제의 치세(治世:@@제의 대리청정 기간은 고조 광무제의 치세)는 1919년 4월에 끝났다.1921년 3월 31일 고조(高祖Gojo) 광무제(光武帝:1897-1919),명성황후(明成皇后)를 태묘(太廟)의 18실에 부묘(祔廟)하며 부묘대제(祔廟大祭)를 행하였다.





심청색 이화문(李花紋) 적의(翟衣)는 명헌태후와 대한국 황족 책봉권자인 고조 광무제가 책봉(冊封)한 황후(皇后), 황태자비(순명황후)와 의친왕비(김수덕)가 착용한 대한국 황실 대례복이며 대한국 황실 의례를 폐지하고 궁궐, 황단, 궐외각사, 한성을 철거한 일본군국주의 총독부가 조직적인 대한국광복운동에 위기의식을 느껴 일본 왕족 마사코에게 착용시킨 후 정치선전용 영상을 촬영한 적의는 1919년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로 대한국이 국상(國喪:3년상)중인 1919년 경 일본 교토에서 제작한 것이다. 대한국 황제가 책봉(冊封)한 대한국 황족이 아닌 일본 왕족 마사코를 일본으로 송환해야 하며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대한국 황실 연표에 1대 고조(高祖Gojo:국왕(1863-1894),대군주(1895),건양 대군주(1896-1897), 광무제(1897-1919.1)),2대 @종 @@제(1919.1- ), 황태제(皇太弟) 의친왕(이강) 대한국 황제 추존으로 바로 기술하여야 하며 심청색(深靑色) 이화문(李花紋) 12등(十二等) 황후(皇后) 적의(翟衣)를 착용한 명성황후(明成皇后) 초상을 추사하여 전시하고 대한국 황제가 책비(冊妃)하지 않은 영친왕비 사진을 삭제하고 심청색 자두꽃(오얏꽃) 문양, 이화문(李花紋) 9등 적의(翟衣)를 대한국 황태자비 민씨와 의친왕비(김수덕)가 착용한 대례복으로 바로 전시 설명하여야 한다.






대한국(大韓國) 황제릉(皇帝陵) 홍릉(洪陵)은 1대 고조(高祖Gojo) 광무제(光武帝)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동원이실합봉릉(同原二室合封陵)이며 명성황후(明成皇后)는 1897년 11월 21일 청량리 천장산에 안장됐다가 1919년 1월 21일 대한국 1대 고조(高祖Gojo) 광무제(光武帝)가 붕어(崩御)하자 3월 4일 경기도 남양주 금곡으로 이장해 고조(高祖Gojo) 광무제(光武帝)와 함께 합장하였고 1,4,7,10월 상순의 4시(四時),정조절(正朝節:원일(元日)),상원절(上元節),중화절(中和節),중삼절(重三節:답청절),한식절(寒食節),단오절(端午節),유두절(流頭節),칠석절(七夕節),중원절(中元節:백중),중추절(中秋節:추석),9월 9일 중구절(重九節),10월 보름 하원절(下元節),동지절(冬至節),납향절(臘享節)의 영절(令節), 초하루와 보름의 삭망(朔望)에 친제(親祭)를 봉행했다. 대한국(大韓國) 초대 고조 광무제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능인 홍릉(洪陵)은 명국(明國)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아 능역(陵域)을 조성하였으며 신도(神道)를 중심으로 좌우에 중도(中道)가 설치되어 참도(參道)가 3개의 단으로 되어 있고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침전(寢殿)의 정면에 설치되어 있어 황살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석물이 참도와 침전 사이에 배치되어 있고 문석인, 무석인,기린,코끼리,사자,해치,낙타,말이 순서대로 참도(參道)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수복방(守僕房), 재실(齋室), 비각, 망료위(望燎位)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진입부에 원형의 연못인 영천(靈泉)에 원형의 섬이 있다.문화재 터 경계로부터 10m 떨어진 지점 지표면에서 올려다보는 각도인 앙각 27도에 해당하는 높이 아래로 건축물 증축,신축을 제한하여야 한다.


















대한국(大韓國) 2대 황제릉 유릉(裕陵)은 대한국 2대 황제 @종(순조 묘호,순명황후 시호 피휘해야) @@제와 순명황후 민씨(純明皇后 閔氏)의 능이며 1897년 10월 12일 대한국(大韓國)이 건국되고 고조 광무제가 황제로 등극함으로써 명국(明國)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아 능역(陵域)을 조성하였다. 一 자형의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으며 황살문까지 문석인·무석인,기린·코끼리·해치·사자·낙타·말의 순으로 석수(石獸)를 세웠다. 능침(陵寢) 주변에는 화문(花紋)을 새긴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이 둘러져 있고 중앙에 혼유석(魂遊石)과 사각 장명등(長明燈)이, 양 옆에는 망주석(望柱石)이 새워져 있으며 황살문과 침전의 바깥 공간에는 어정(御井)이 남아 있다. 서울시,경기도,강원도에 소재한 조선시대(1393년-1897년) 505년 동안 존속된 조선국 25대 국왕과 왕후 및 사후 추존된 국왕과 왕후의 릉 및 대한시대 제정기(1897년-1919년) 황제릉을 조선국 왕릉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하였다. 황제(황태제 의친왕(황제 추존)의 아들 또는 손자)는 조선국 10대 국왕 연종(연산군 묘호 추상),15대 국왕 광종(광해군 묘호 추상), 흥선헌의대원왕의 묘호(廟號) 추상 및 왕릉 능제 격상, 성비(誠妃) 원씨,제헌왕후,공성왕후 왕후릉 능제 격상, 의친왕릉,완친왕릉의 왕릉 능제 격상하여야 한다.



1914년 7월 3일 궁인(宮人) 이씨(李氏)가 아들을 낳으니 이씨에게 당호(堂號)를 내려 광화당(光華堂)이라 하였다. 7월 24일 고조 광무제가 새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명하여 이육(李堉)이라 하였다. 돈덕전(惇德殿)에서 다과회를 베풀었다. 종척(宗戚)이 배참(陪參)하여 새로 태어난 아들의 3·7일을 축하하였다.1916년 1월 22일 궁인 광화당(光華堂) 이씨(李氏)가 낳은 이육(李堉)이 훙하였다. 1월 25일 이육(李堉)을 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 청량리(淸凉里)에 장사지냈다.마사코의 생후 8개월인 아들은 1922년 4척의 관 안에 넣는 벽(椑:6척 이하,재궁은 7-8척)에 넣어 궁인 엄씨 묘의 서편에 묻어주었다.숭인원은 고조 광무제와 광화당(光華堂) 이씨(李氏)의 아들인 이육(李堉)의 묘로 바로잡고 대한국 황제가 책봉한 대한국 황족이 아닌 마사코,진,구를 이장, 영휘원을 후궁(後宮) 엄씨 묘(墓)로 개칭하고 대한국 의친왕을 황제 추존, 의친왕릉의 능제를 황제릉으로 격상하고 능호를 부여하여야 하며 조선국 왕릉 및 대한국 황제릉(홍릉,유릉)을 구분하여 재지정하고 문화재 터 경계로부터 10m 떨어진 지점 지표면에서 올려다보는 각도인 앙각 27도에 해당하는 높이 아래로 건축물 증축,신축을 제한하여야 한다.
2016-09-05 13:5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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