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소련기행
 대변 보는 데는 다만 구멍들이 둥글
 2020-12-27 19:18:55  |   조회: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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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모스크바




[ ..... 미국으로 가게 하여 달라 .......


...... 길가에서 기진하여서 쓰러져 죽은 사람을 보았는데 이렇게 굶어 죽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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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정치이념이 온축된 《일민주의》의 내용은 4월 20일 저녁에 ‘일민주의 정신과 민족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서울중앙방송국의 방송을 통하여 발표되었다. 다음과 같은 서두는 이승만의 일민주의가 절박한 공산주의 비판 이론으로 구상되었음을 말해 준다.



“세계 모든 나라의 대소강약을 물론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자는 현재 생존의 위기를 당하지 않은 나라나 민족이 없는 터이니, 이 이유는 즉 공산당 문제입니다. 공산주의는 본래 빈천한 사람들을 부귀한 사람들과 동등으로 살게 만들자는 주의라 할 것인데, 이 주의가 러시아에서 크게 발전된 이유는 러시아 제정(帝政)시대에 전제정치가 세계에서 가장 심하였던 것이므로 맑스주의를 흡수한 레닌(Vladimir I. Lenin)의 대혁명이 성공되어 러시아 황실을 다 전멸시켜 세계에 참혹한 공산혁명의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



이승만은 자신이 모스크바에서 경험했던 일을 보기로 들면서 소련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1933년에 국제연맹 회의가 열리는 제네바에 갔던 이승만이 시베리아의 한인지도자들을 만날 목적으로 모스크바까지 갔다가 입국을 거부당했던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月刊朝鮮》2006년 8월호, <레만湖에서 만난 프란체스카> 참조).


모스크바 방문경험 보기로 蘇聯의 실상 설명



“빈민들은 부민(富民)을 타도해야 산다, 무식자는 유식계급을 몰락시켜야 산다, 상놈은 양반을 없애야 산다, 노동자는 재벌가를 정복해야 산다, 농민은 지주를 박멸하여야 산다, 이러한 것으로 언론과 서류를 세계에 전파하고 세포조직을 아니 둔 곳이 없게 되었으니, 영미 등 부강한 나라나 폴란드와 헝가리 같은 빈약한 나라에까지 그 세력이 뿌리를 박게 되어, 사람마다 생각하기를 러시아공산혁명으로 나라도 부강하고 백성들은 풍족하게 자유로 살 수 있는 극락세계로 알 만큼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러시아의 민중 같이 빈곤하고 압박받는 인민은 더 없을 것이니, 내가 13년 전 모스크바에 있을 때에 여관 사무원인 독일인이 나의 방에 들어와서 비밀히 말하기를 매달 미화 8원씩 받아 가지고 일을 보라 하니 살 수 없는 것을 간신히 지낸다 하며 자기의 길을 열어서 미국으로 가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들었으며,


기차에서 미국인 몇 사람이 처음에는 아무 말도 없이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가 기차가 러시아 국경을 넘어온 뒤에는 이 사람들이 비로소 숨을 쉬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러시아 내지에 있던 곳을 몰래 들어갔다가 길가에서 기진하여서 쓰러져 죽은 사람을 보았는데 이렇게 굶어 죽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하니, 이것이 오늘 공산당 사람들이 자랑하는 러시아 극락지의 실정입니다. …


거짓 선전에 빠져서 남의 부속품인 노예가 되거나 공산당과 싸워서 민주국의 자유 복락을 누리게 되거나 이 두가지 중 한 가지를 택해야만 될 것이니, 이외에 다른 것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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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109.주한미군의 철수와 국회 프락치 사건









1938.12. 삼천리




[ ...... 「도망한 장교들은 잘했다」고 동료들이 부러워하면서 ........

...... 바람이 부러서 창이 덜걱거려도 께페우가 오지 않는가 ......... ]




[ ...... 농민은 .... 혁명이전 때가 살기 좋았다 해요. .........

...... 부담이 많어서 입는 것은 고사하고 빵문제 해결에도 곤란합니다. ........

...... 지금은 백퍼-센트가 다- 빈민 ....... 만족히다고 볼수 있는 것은 농촌에 있는 청년공산당원 뿐 ........ ]




[ ...... 독신이래도 8시간 勞働이면 겨우 살어갈 정도 ........

...... 물건이 니러졌으나 께페우는 재판에 부칠 수가 없으니깐 상점의 책임이 되여서 ........


...... 트로키스트 ..... 1937년 1월부터 38년 5월까지 그 명목 하에 검거당한 인수가 전부 2백60만 ........ ]



[ ...... 데파-트 한 집의 상품만 해도 하바롬스크全市에 있는 상품보다 아마 더 많고 ........ ]




삼천리 제10권 제12호

1938년 12월01일




蘇聯事情 듯는 座談會, 脫走하여 朝鮮에 온 赤露士官으로부터


出席者


脫走 赤軍士官 이반 야꼬레비치 나하로프

脫走 赤軍兵 표오톨 마까로비치 이봐노프

權忠一, 朴得鉉, 金漢卿, 朴英熙,

이박게 朝鮮軍 囑託 高井邦彦




지난번 高鼓峯事件 때 蘇聯 極東軍에서 탈출하여 蘇聯兵 2명이 새로운 살 길을 찾고저 OO에 와 있는 것을 기회로 그들을 中心삼어 이 좌담회를 열었다. 질문한 사람들은 元共産黨 幹部로서 入露의 경험조차 가젔든 몃 분들이다. 우리가 이 좌담회를 개최한 까닭은 蘇聯知識의 一資料를 어드려고 하는 것뿐 아니라 그들 탈주병이 祖國蘇聯을 어떻게 보는가를 알고저 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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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井. 그러면 나부터 먼저 張鼓峰事件에 현지에서 탈주해 온 蘇聯兵<92> 2명을 소개하겠읍니다. 이분은 나하로푸군 24세올시다. 저쪽 분은 이와노푸군 22才올시다. 양군이 다 歐羅巴 로시아 출신으로 나하로푸군은 8년제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서는 하사관양성소를 중도에서 퇴소했읍니다. 이와노푸군은 극히 짧게 밖에 학교에 가지모했음으로 무학이라해도 과언이 아입니다.


나하로푸. 사건이 勃發하기 얼 전에 일인대요. 蘇聯의 장교 6명이 ****?近에 갓는데 수비병들이 확실히 삼림 속에 들어간 것을 보았다고 하지만 장교 6명이 죄다 행방불명이 되었든 것입니다. 내 생각엔 그이들도 滿領내에 탈주한 것 같슴니다. 그때 내가 있든 군대가 1개 연대 출동해서 장교 6명이 들어간 국경 부근의 산을 죄다 찾어 봤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말었읍니다. 그때 도라오면서 「도망한 장교들은 잘했다」고 동료들이 부러워하면서 외국의 이야기들을 했는데 그것이 내게 있어서 마음의 파동을 이르게 했읍니다.


記者. 이와노푸군은 어떳습니까.

이와노푸. 나는 個人農임으로 늘 꼬르포-즈에게 압박을 받어 심히 괴로운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든 관계로 생각할수록 로서아가 싫어졌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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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노푸. 우리 가족의 일상생활이란 그야말로 恐怖의 연속이라고 해도 좃습니다. 바람이 부러서 창이 덜걱거려도 께페우가 오지 않는가 하고 신경이 산란해 집니다. 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도 군복을 입은 자가 오는 것을 먼데서 보면 우리들 잡으러 오나부다고 벌벌 떨고 있읍니다. 이것이 우리들 농민의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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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漢卿. 소聯學校에서는 東洋事情이라고 할는지 특히 日本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키고 있읍니까?


나하로푸. 4년제의 의무교육학교에서는 日本에 대해서 또는 그 他 다른 외국에 대해서 교육하지 않습니다. 지리는 배워 주나 극히 개략적입니다. 4년제 이상의 학교가 되면 일반정치학을 배워 줌으로 각국의 정치상태, 국내상태 등을 배워 주고 특히 日本에 대해서는 로시아가 본 日本의 나쁜 점에 주력해서 배워 줍니다. 그래서 나는 일본의 농민은 매우 가난하다든가 상품이 없다든가 하는 것을 밤낮 들었든 까닭에 오늘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슴니다. 그랬으나 현재는<95> 그것이 틀린 것으로 알고 로시아의 교육은 진실하지 못하고 역선전하는 것이라고 알었읍니다. 학교는 상급이 됨에 따라서 정치교육이 진보되고 로시아대외정책이라는데 대해서 가르치고 있으나 제1상급의 대학교 혹은 사범학교에서는 그 경향이 만습니다. 또 그 교재로서는 주로 신문에서 산 재료를 취해서 배워 주긴 하지만 그 신문도 결국은 로시아 신문이 아니면 않되는 것이니까요.

高井. 외국신문은 전혀 볼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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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최근엔 蘇聯政府의 종교에 대한 정책도 엣날과 같이 심하지 않다고 들었는데 어떠읍니까?

나하로푸. 정부는 법률로선 종교의 자유를 인증하면서도 무신론자, 무종교단체라는 것을 맨들어서 그것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박멸책을 강구하고 있읍니다.


權. 현재 소련민중은 종교에 대해서 어떤 感을 가지고 있읍니까? 우리도 들었지만 無神運動者들이 선전하기 위하여 농촌에 가면 농민들이 뫃여들어 때러서 골통을 깨고 도라 온다는데 사실입니까?


나하로푸. 혁명전에 교육을 바든 사람들은 전부 신을 믿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산주의자들 중에도 맑씨즘에 대해서 의심을 갖게 되는 땐 신앙을 가지는데요. 더구나 부모들의 영향이 있음으로 이런 사람들은 몰내 긔도를 하는 일이 있읍니다.



農民은 極度로 絶望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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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농민은 정말 행복합니까.


나하로푸. 개인경영으로선 재산을 빼앗깁니다. 꼴포-즈조직은 월급이지요만 이전은 勤農들에게 매우 환영을 받어답니다. 그러나 현재에 있어선 먼저도 말한 바와 같이 前途의 희망이 보이지 않음으로 蘇聯의 농업자들은 매우 실망하고 있읍니다. 혁명이전 때가 살기 좋았다 해요.



朴得鉉. 그렇게 되면 현재의 농민생활과 혁명이전의 농민생활과의 차는 어떻읍니까?


나하로푸. 帝政時代엔 아주 큰 지주가 있었고 그밖게 농민이 그것과 비교된 때문에 어쩐지 재미없는 일이 많은 것 같았지만 그때도 현재의 농민과는 비교할 배가 아니지요.<98>

이와노프. 문제도 않된다고 하는데요.


나와로푸. 현재 농민과 帝政時代의 농민과를 비교할 만한 정확한 數字는 내가 여기서 말슴하지 못하지만 내 부모든지 또 형제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帝政時代 世界大戰 당시 이전은 그 지주들이 농민에게 그 토지를 난하줄 운동이 있어서 그래서 농민은 대지주로부터 토지를 가지고 자기의 토지와 재산을 가질 遇境가 있도록 되었다고 합니다. 최근은 꼴푸즈가 되면선 자기의 재산, 자기의 토지라는 걸 가질 수 없고 또 정규수납의 규정이 있기 때문에 부담이 많어서 입는 것은 고사하고 빵문제 해결에도 곤란합니다.


高井. 거기에 내가 한 마디 말슴 더 하겠읍니다. 쏘베-트당국은 농민으로부터 것보리를 1키로 5카페-클을 수납해서 이것을 찟튼지 혹음 제분하든지 해서 1루-부르 카페클 내지 2루-부르 즉 30배 내지 40배의 값으로 팔어 버립니다. 찟는 데라든가 제분하는 비용을 합한다 치드래도 약 20배의 값이 되지요. 우유에 있어서도 1릿토르 15카페-크르를 수납하고 이것을 그대로 1루-부르 50카페클 즉 10배의 값으로 국영상점을 통해서 국민에게 판매하고 있읍니다. 그 差額이 전연방에 쌓이고 쌓여 蘇聯國家 豫算의 반액을 형성하고 있읍니다. 이것을 보드래도 꼴포-즈란 것이 조직적으로 농민을 착취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즉 농민은 정부에게 자기의 소득을 10배 많으면 30배 40배식 착취하고 있으니 쏘베-트 농민이 곤궁에 빠질 것은 뻔한 일이 아니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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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당신네들이 일상 먹는 음식을 거즛없이 말슴해 주시요. 그것으로 대체를 알 수 있으니까요.


이와노프. 아츰은 우유와 껌정팡... 우유를 먹을 만하면 상당한 셈죠. 점심은 감자얘요. 고기를 살 수 있으면 먹게 되지만 지금은 닭과 소를 먹이게 못하는 까닭에 소고기 같은 건 도모지 먹질 못해요. 지금은 그런 고기도 없이<99> 대체로 감자와 파를 한데 짓*서 가지고 가*쯔데쯔를 맨드러 먹지요. 거기에 쓰-프 이것도 감자와 카*쯔. 저녁은 차와 껌정빵, 연어같은 *을 먹을 때도 있지만.


權. 나는 1931년. 1932년에 우라지오 太平洋 勞働書記局에 있을 때의 일이지만 그때 *껌정빵이 없어졌단 이얘길 들었는데 아직 있읍니까.

이와노푸. 우리들의 상식 인데요.

나하로푸. 도회엔 한때 없어진 때가 있었을지 모르나 현재 극동에 있어서 蘇聯 농민의 긴요한 양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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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농민은 얼마나 세납을 부담합니까.


高井. 농민이 바치는 세금 중에서 제일 많은 것은 소득세입니다. 이것을 소득률에 따라 지불*니까 여기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하로프. 그다음에 문화세 같은 것이 십수종이나 됨니다.

高井. 그 밖에 보험료가 있읍니다.

나하로프. 세금 외에도 여러가지 돈을 많이 냄니다. 먼저 의무적으로 채권을 사야 됨니다. 그밖에 스페인 전쟁 때문에 자기들이 동지를 구조할 자금이라든가 사변 때문에 곤란을 받고 있는 支那의 자제들을 구조할 자금이라든가 혹은 각국 혁명 때문에 타국에 있는 사람들을 구조할 자금이라든가 여간 많은 것이 아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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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 농민들은 현정부의 정책에 대하야 만족*하는 모양이지요.


나하로프. 만족이란 蘇聯에는 없읍니다. 농민들은 결코 만족하여 있지 안슴니다. 혁명이전에는 농촌에 *는 빈민 라고 돈이 없기 때문에 해도 약 15퍼-센트밖에 안되고 그 외의 85퍼-센트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하고 있었읍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백퍼-센트가 다- 빈민이 되였읍니다. 물론 한사람도 신정부의 정책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읍니다. 다만 만족히다고 볼수 있는 것은 농촌에 있는 청년공산당원 뿐으로 그 사람들은 꼴포-즈의 근육노동에 참가할 필요가 없고 다만 선전이라든가 세금 독촉에<100> 한목 끼여서 일할 뿐인 고로 筋肉勞働을 안 하게되니깐 만족해 하지요.



都市의 勞働者 生活



金. 도시 勞働者들은 어떳슴니가.

高井. 도시 勞働者들의 생활이라고 말하면 勞働法에 따라서 勞働時間은 8시간이라고 제한되여 있기는 하지만 8시간의 勞働으로선 가족을 부양해 나갈 수가 없읍니다. 제한되여 있어도 가족들 때문에 3시간 내지 4시간을 연장하야 11시간 12시간의 勞働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記者. 월급이 아니고 일한 분량대로 주는군요.

이봐노프. 독신이래도 8시간 勞働이면 겨우 살어갈 정도입니다.



金. 그래도 勞働者가 농민보다 생활이 행복함니까.


이봐노프. 물론 勞働者는 농민보다 생활이 양호함니다. 그러나 혁명전에 勞働과는 비교도 될 수가 없읍니다. 싸베트에서 비교적 행복되게 뵈는 것은 勤務員입니다. 그 중에서도 학문이 있고 또 특수한 기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스탈린은 기술은 모든 것을 해결한다.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표어를 늘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거기 해당하는 기술자, 학문이 있는 사람들이 비교적 유복하게 생활하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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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로프. 물론 다 그러타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공산주의는 공산주의자에게만 조치요. 왜 그러냐하면 그들은 공산주의를 표방함으로써 좋은 지위도 어들 수 있고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할 수가 있으니깐요. 그러니깐 그런 사람들은 공산주의는 아주 좋은 것인 줄 알지요. 그러고 일반 청년은 반동적으로 여기 대하야<101> 공산주의라는 것은 공허한 것이다. 그것은 공산주의자의 것이지 우리의 것은 아니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읍니다.



肅淸工作의 一例들 들음



記者. 여기서 문제을 박궈서 스탈린의 숙청공작에 대하야 즘 이야기합시다. 싸베트 건설공로자를 투옥한다거나 살해한다거나 하는 스탈린의 숙청공작에 대한 蘇聯내의 일반사회의 공기 같은 것은 어떳습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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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井. 당신도 3년 징역 살었다지요.(笑聲)

나하로프군이 처형 바덧다는데는 금일의 싸베트를 잘 나타내고 있는 무슨 사정이 이슬 듯하니 좀 들어봅시다.


나하로프. 생각해 내는 것만 해도 실증이 남니다만 나는 3년간의 强制勞働에 복역하였읍니다. 감옥에 드러 가기까지는 나는 어떤 상점 발송계에서 일을 보고 있었읍니다. 그 상점이라는 것은 지배인과 야체-카와 께페우의 3세력이 주장이 되여 있어서 내가 발송계니깐 물건을 어디로 보내라구 명령을 바더서 그대로 보낼야구 하면 금방 또 께페우에서 그 물건은 어디로 보내라구하는 주문이 드러옴니다. 나는 명령이니깐 께페우의 주문대로 했드니 처음 보낼 작정이든 그 곳에서는 물건이 안 오니깐 그것이 분실되였다구 말이 되는 것임니다.


高井. 께페우가 중간에서 주문을 했다는 것은 비밀이니깐 결국 죄는 발송계에 씨여지지요


나하로프. 물건이 니러졌으나 께페우는 재판에 부칠 수가 없으니깐 상점의 책임이 되여서 보내야 할 걸 보내지 않은 발송계의 책임이 되는 것임니다. 그 때문에 국가에 손해를 끼첫다는 의미로 재판에 걸닌 것입니다. 나는 국가의 유해자라구 하야 그때 처벌당한 것입니다.


記者. 재판 현황을 하나


나하로프. 내가 처형당한 재판소는 인민재판소였읍니다. 그 재판은<102> 재판장과 판사장 앞에 내가 서고 또 검사가 있읍니다. 거기다 또 배심원이라고 해서 농민출신이 한 사람, 勞働者출신이 한 사람, 이 밖에 여자 서기가 1명 이것으로 구성된 데서 재판을 바덧는데 별로 조사도 없어 그냥 인정서를 가지고 약간 물어 본 후 그냥 그 조서를 認定식히고 단 10분도 안돼서 징역 3년 强制勞働이 회부한다는 판결을 바든 것입니다. 그리고 3년의 强制勞働을 모스코바 마보루가에서 지냈읍니다.




犯罪, 乞食, 賣笑婦



記者. 그러면 이쯤에서 화제를 돌여서 이번에는 일반사회 사정을 들읍시다.



朴英熙. 싸베트에서 어떤 범죄가 제일 만습니까.


高井. 그것은 무엇무엇해도 지금 유행하고 있는 트로쯔키스트의 검거일 걸요.(笑聲)

나하로프. 범죄라고 하기엔 안됐지만 국가에 손해를 준다든가 혹은 국가가 원치 안는 자는 다- 싸베트의 범죄자로서 트로쯔키스트의 명목으로 검거당하는 것이 제일 만슴니다. 그 다음이 公金消費입니다. 그밖에는 뭐 다 그러치요. 살인은 도회에 많고 절도 같은 것은 농촌에 많은 것같이 보힘니다.


高井. 그것은 농촌이 얼마나 貧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暫間 소개함니다만 범죄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싸베트에서 제일 많은 범죄는 지금 유행하고 있는 트로키스트라고 생각함니다. 1937년 1월부터 38년 5월까지 그 명목 하에 검거당한 인수가 전부 2백60만9천인이나 됨니다. 그리고 本年度 內務人民委員部豫算의 강제노역소 경비를 정하는 기초로 되여였는 정부측의 자료에 의하면 강제노역소 재감자 수가 6백11만2천4백3십2인 약 1천만인입니다. 이중의 대부분을 정부측에서 소위 트로쯔키스트라고 보는 자들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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貧弱한 民衆娛樂



金. 蘇聯의 민중오락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이와노. 도시에는 여러 가지 있읍니다마늘 우리 농촌에는 手풍금에 맟어 딴스를 하는 것쯤 한 정도이고 혹 휴일에는 술도 먹습니다.

나하로. 다른 것은 없어도 술만은 잘 공급하여 줍니다. 따라서 농촌의 오락으로서는 딴스와 술의 정도입니다.

權. 우리들이 로시아에 있을 때의 영화는 5箇年計劃의 선전영화가 대부분이고 다음은 모다 아메리카의 희극 같은 것이였는데.

나하로. 공개영화는 이전에는 獨逸 것도 있는 모양이였으나 지금은 주로 아메리카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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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者. 일본에 물자가 많은데는 저 三等大將 류시코프도 놀난 모양인데 대체 로시아의 현상은 어떠하십니가.


나하로프. 蘇聯의 물자란 대체 빈약합니다. 있기는 있드래도 불필요한 것이 많고 필요한 것은 적습니다. 워드카 같은 것이 많지요. 그러나 팡 같은 것은 적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곳에 와서 데파-트를 구경하였는데 그 데파-트 한 집의 상품만 해도 하바롬스크全市에 있는 상품보다 아마 더 많고 민중이 즐겨할 것도 더 많으리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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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得鉉. 蘇聯의 兵役은 自由兵役입니까. 强制兵役입니가?


나하로프. 蘇聯의 兵役은 형식으로는 自由兵役이여서 징병한다 하드래도 徵兵檢場에 査가면 나도 그랬지만 징병관이 「당신은 兵役에 종사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자유다.」라고 하는데 그 徵兵官의 골 속에는 「兵役을 기피하는 者 國賊이다.」라고 하는 큰 글자가 씨어저 있읍니다. 그것을 보고는 모다들 자진하여 지원합니다.(笑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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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者. 日本에 와저 제일 감탄된 것이 무었입니가. 어데 간단히 대답하여 보시요.


이하노프. 제일 감탄한 것은 전쟁 중인데도 극히 평온한 것 그리고 日本은 전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물자가 없다는 것을 蘇聯에서 들었고 로시아는 물자가 아주 풍부하다고 하는 것이 전혀 그 반대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日本 사람들은 퍽 친절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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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8.24. 소련 경원선 차단

1945.8.25. 소련 경의선 차단

1945.9.6. 소련 통신 우편 차단


1945.9.6. 미군 진주





"경원선 철도 끊기며 분단 시작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나"


2009.06.29


신작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 낸 소설가 이호철



"남북 분단은 소련군이 1945년 8월 24일 서울~원산 간의 경원선(京元線) 철도를 차단하면서 시작됐다."


'분단시대'의 실향민 작가 이호철씨(78)는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이다. 1945년 광복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이씨는 "지난 60여년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남북 분단이 이렇게 '철도 차단'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은가"라고 회상했다.


"소련군은 이어 8월 25일 서울~의주 간의 경의선(京義線) 운행도 막았고,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9월 6일에는 전화·전보 등 통신과 우편물 교환을 완전 차단했다. 소련은 처음부터 동구권을 먹었듯이 북한을 자국의 패권주의 틀 속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후(戰後) 처리 합의에 따라 그저 먼 산 쳐다보듯 할 수밖에 없었다."


이호철씨는 얼마 전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은 스탈린"이라고 강조하면서 허구와 역사의 결합을 통해 남북 분단을 새롭게 조명한 신작 장편소설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을 펴냈다. 이씨는 "문학성보다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에게 6·25와 남북 관계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 현대사 참고서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을 썼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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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28/2009062800858.html





* 당연히 이런 사실은 전국민 공지의 사실이었읍니다.

또한 전국민이 수시로 얘기하고 성토하던 사실이었읍니다.












[ ...... 조선공산당의 청년동맹규약 .......


..... " 사회주의조국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 무한의 충성을 다하도록 교육한다. " .......... ]




1946.5.28.동아일보


사회주의조국에 충성하라

조공청년동맹의 지도강령




한때 조선을 소련의 일연방 되기를 희망한다고 외국기자단에서 말한 조공책임비서 박헌영에 대한 사실이 미국 뉴욕타임쓰지로부터 세간에 보도되자 세인의 공노를 사게 되엇슬대 변명이 구구하엿는데 요지음 조선공산당의 청년동맹규약을 들추어보면 막쓰 레닌의 리렴과 모순되는 다음과 같은 일절이 있다.


"사회주의조국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 무한의 충성을 다하도록 교육한다."


이것은 조선혼이 사라있고 조국재건에 피끓는 조선청년남녀에게는 이따위 얼빠진 지도가 감히 손을 대지 못할 것으로 밋으나 일방 상심할 일이 아닐수 없다.










1947.1.22. 소련



[ ..... 1946년 10월에 있은 남조선의 인민의 광범위의 □□은 ..... 붉은 군대가 완수한 민주주의의 중대성을 전세계에 자랑하는 성과있는 결과로 ....... ]



[ ...... 붉은 군대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하여 남조선 인민들은 남조선노동당의 계획 밑에서 광범위의 혁명을 일으킬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혁명은 반동 미군정의 입법기관을 반대하고 남조선의 군정을 파괴하는 투쟁과 연결하여야 할 것 ....... ]



북조선 주둔 소군사령부 교육관 쿠즈노프가 허헌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



동아일보 1947년 02월 18일


북조선 주둔 소군사령부 교육관 쿠즈노프가 허헌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

(略)

1947년 1월 22일

북조선주둔소련사령부

교육관

니콜라이 쿠즈노프少佐



남조선노동당위원장

許憲 貴下



1) 세계 최대강국인 쏘비에트연방의 외상 인민위원동지 몰로토프와 英·佛·美 등 세계 4대강국의 외상들은 장차 쏘비에트연방의 수도 莫斯科에서 전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회의하게 되었습니다.


1945년 12월에 莫斯科에서 개최되었던 삼상회의에서 채택된 조선의 민주수립을 보장하는 진보적 삼상결정을 남조선에 있어서 친일파 파씨스트 민족반역자의 두목 金九 李承晩의 반동 테러단들이 맹렬히 반대하고 또 이것을 남조선의 반동 미군정이 격려 조장하고 있는 때문에 마침내 소미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2) 입수된 신용할 수 있는 정보에 의하면 來 3월 10일부터 莫斯科에서 개최되는 4대강국 외상회의에서 조선을 해방하여 줄 붉은 군대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하여 남조선 인민들은 남조선노동당의 계획 밑에서 광범위의 혁명을 일으킬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혁명은 반동 미군정의 입법기관을 반대하고 남조선의 군정을 파괴하는 투쟁과 연결하여야 할 것입니다.


3) 1946년 10월에 있은 남조선의 인민의 광범위의 □□은 □□적 제국주의자 미군정의 반동성을 전세계 인민들에게 □□시키고 이와 반대로 북조선에 주둔한 붉은 군대가 완수한 민주주의의 중대성을 전세계에 자랑하는 성과있는 결과로 되었습니다.


다음에 기재된 종합적 계획안에 의하여 남조선에 있는 전부의 학교에서는 □□□의 조직적 맹렬한 투쟁을 시작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 혁명적 투쟁을 제1차로 國大案을 합법적으로 맹휴하여야 됩니다.











1947.1. 소련



[ ..... 대소변 사이에 간이 마켜 있지 않고 대변 보는 데는 다만 구멍들이 둥글둥글 뚤려 있을 뿐 .......


..... 명색만은 침대차이였으나 밑바닥은 '스프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나무 판자로 만드러젓고 또 열리지 않도록 안전장치도 해노치 않은 ......... ]



[ ..... 중국 공산군은 .... '물논 원조하고 있다. 내가 방금 만주에서 나오는 길인데...' .......... ]




1948.10.29. 동아일보



소련기행 박원민



중공군 뒤에 소군 2

서백리아 철도는 원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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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기다리는 23일동안 우리는 여관이 아닌 여관에서 즉 '크라스키노'에서 우리가 타고 온 ..철도침대차 속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쏘련에는 여관이 있기는 있어도 극히 수효가 적은 모양이었다. 이것은 '보로씨로브'역을 가보면 많은 소련 사람이 떼를 지어서 마치 서울역 앞에서 사람들이 자듯이 역안 땅바닥에서 자면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역안에 있는 공동변소에 들어가 보면 세계일등국이 이러한 변소를 사용하는가 하고 놀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남녀용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대소변 사이에 간이 마켜 있지 않고 대변 보는 데는 다만 구멍들이 둥글둥글 뚤려 있을 뿐이고 환기장치라고는 유리창 하나 없기 때문에 항상 가득 잠기어 있는 그 고약한 냄새에는 지금 생각하여도 골치가 또 아파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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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질문

'현재 중국 공산군은 대단히 불리한 전쟁을 하고 있으며 특히 연안이 함락(1947년 4월에 함락하였음)될 위험이 있는 데 어찌하여 쏘련은 원조하지 않고 있는가?'

답 우스면서 '물논 원조하고 있다. 내가 방금 만주에서 나오는 길인데...'

문 '그러면 소련군은 정복을 입고 원조해 주느냐?'

답 또 우스면서 ' 중국 사람같이 변장한다'


이로 보건대 지금도 역시 쏘련군인들은 중공군과 같이 변장하고 중국말을 사용하면서 중공군을 원조하고 있다는 것이 틀림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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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8일 밤 아홉시편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에 올났다. 기차는 명색만은 침대차이였으나 밑바닥은 '스프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나무 판자로 만드러젓고 또 열리지 않도록 안전장치도 해노치 않은 참으로 위험 천만한 것이였다. 하는 수 없이 중단과 상단에서 자게 되어 우리는 끈으로 자기 침대를 묶은 다음 그 끈의 한쪽을 모자 거는 못에다 매여 놓고서야 겨우 조끔 안심을 하고 잘 수가 있었다.(계속)







1948.10.31. 동아일보


소련기행 박원민



도처마다 걸인군 3


감시의 열차생활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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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때가 될 무렵에 어느 조끄마한 역에 기차가 정거를 하였다. 이때였다. 쏘련 사람들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우유, 마늘, 생선, 찐 감자 등을 들고 우- 하고 모여든다. 우리나라의 정거장 풍경을 상상하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때때로 거지들이 차속으로 들어와 애걸을 하는데 이 역시 우리나라 거지 이상이였다. 여기서 일행중 여교원 하나가 먹다 남은 빵 한개를 가지고 나갔더니 이것을 사려고 무려 백여명의 사람이 모여 들었다. 심지어 나종에는 기차안에 있던 손님들까지도 그것을 사려고 모여든다. 그리하여 빵 한개가 백50 루-부를에 팔렸다. 백오십 '루-부를'이라 하면 그 당시 이북돈으로 환산하여 육백원이다. 그때 육백원이면 이북서 대두 한말반의 쌀을 살 수 있었든 것인데 이로 미루어 보드레도 쏘련의 식량난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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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다도 우리는 수백명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역안 땅바닥에 누어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발사하는 코를 찌르는 썩는 냄새와 같은 체취에 더욱 얼굴을 찌프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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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랄산맥 이산맥의 서쪽 구주 쪽에 '쓰벨노블스크'라는 큰 공업도시가 있다. 이곳에는 북조선서 보낸 유학생이 약이십명 가량 공부하고 있다. 기차가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 일행이 이곳을 통과하는 것을 알고 유학생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들은 우리를 붓잡고 이구동성으로 '여기에는 쏘련 각처에서 모여 든 많은 유학생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우리 조선 유학생이 가장 성적이 우수합니다. 그러나 무어니무어니 하여도 제일 배고픈 데에는 못견디겟읍니다. 지금 우리들 중 약 이할이 병석에서 신음하고 있읍니다. 이 학생들은 멀지 안어 조선으로 호송당할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밖에도 곤난한 점이 많겠지만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였다. 우리 일행은 가지고 있던 우리 식량중에서 시큼하고도 씁쓸한 검은 빵을 나누어 주었더니 무엇보다도 좋은 선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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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4.



[ ..... 현재 우리의 최대의 과업은 이남의 반동분자를 철저히 숙청하고 남북통일을 ........

..... 그 다음의 최대과업은 .... 우리 조선을 쏘련방에 가입시키는 문제입니다. ......... ]



1948.11.4. 동아일보


소련기행 박원민



이북의 소련방화 6

일부 한인유학생이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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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의 나라 쏘련! 그리고 노동자들을 위한 오락실이니 도서관이니 침실이니 하는 것도 그야말로 선전에 불과한 형식뿐이었다.


기술노동자를 양성하는 직업학교에도 수개소나 가 보았으나 설비도 한심하고 사용하는 기계도 영국제나 독일제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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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공장 등의 규율은 순전히 군대식이었고 주력을 군수공장에 두고 있었다.

4월 21,2일 경의 일이다. ..... 그날 북조선에서 간 쏘련유학생 약삼백명의 대표자가 '까잔'에서 우리 일행을 만나 보러 차저왔엇다.

그는 '까잔'종합대학 법과학생이며 해방전까지 감옥생활을 8년동안이나 한 30세 청년이였다.쏘련유학을 가기전까지는 북조선민정 간부였었고 김일성이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중의 하나이었다. 이청년이 우리가 투숙하고 있는 북부 여관에 와서 현재 평양 제이 여자중학교 교장인 조여사와 이야기를 하던 중 다음과 같은 말을 강조하였다.


" 물론 현재 우리의 최대의 과업은 이남의 반동분자를 철저히 숙청하고 남북통일을 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 다음의 최대과업은 무엇인지 아시요. 동무들은 실익양성이니 문화향상이니 산업개발이니 하지만 .... 물논 이것도 큰 과업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 보다도 더 중하고도 큰 과업은 우리 조선을 쏘련방에 가입시키는 문제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모-든 것을 깨다를 수 있었다.

쏘련의 정책과 현재 북조선의 근본 정책은 이 한마듸로서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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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논 '모스크바'에는 공창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시내 각처에 있는 '바자루'(서울 야시장과 같으나 그 보다도 더 급이 낮은 시장)에는 사창이 무수히 있는 것이다.(계속)









1948.1.22.



유엔소련대표 그로미코, 조선위원단의 북한 입경 정식 거부



게재지명 조선일보, 서울신문

게재일자 1948년 01월 25일



22일 UN에서는 蘇聯이 UN朝鮮委員團의 蘇占領下의 북조선 入境要求를 거절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사실에 있어 남조선 美軍占領下에 있어서의 위원단의 노력을 제한하는 蘇聯의 태도는 蘇聯外相代理 그로미코로부터 UN事務處長 트리그브 리 補佐 안드류 코이어에 대하여 전달된 1월22일부의 書翰中에 표명한 것으로서 동 書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北朝鮮蘇聯軍司令官 訪問의 희망을 표명한 朝鮮委員團 임시의장으로부터 서한 원문을 전달한 1948년1월18일부의 서한에 관련하여서는 우리는 貴下에게 1947년의 제2차 UN定期總會 석상에서 UN朝鮮委員團 수립에 대하여 이미 소련정부에 의하여 표명된 부정적 태도를 想起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레이크썩세스14일발AP 合同]

(조선일보, 1948. 1. 25)









1961 소련



1961.10.21. 경향신문



소 인민들 전체주의에 회의

=시베리아 횡단한 코네리 씨의 여행소감



"소련인민들은 공산주의 체재에 회의를 느끼고 있으며 그 주의 자체가 문학과 예술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것임을 의식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지난 6월6일 미국의 세계적 잡지인 '타임' '라이프'지의 특파원으로 일개월간 서방측 기자로는 처음으로 소련의 뒷문 나호드카=우라디보스톡 인접항에서 시베리아를 횡단- 모스크바까지 5천8백리의 기차여행을 하고 돌아온 도날드 코네리 씨는 21일 상오 시내 명동에 있는 메트로 호텔에서 본사 기자에게 소련기행 소감을 이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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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9일간에 걸친 긴 기차여행을 하는동안 보고 느낀 소련의 소도시나 농촌 등 지방은 마치 백년전의 미국을 연상케 하였다.

철로는 모두 단선이며 도시주변을 제외하고는 하이웨이=고속도로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선전과는 달리 농업의 기술은 아주 후진적이라 도무지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소련이 모든 국가재정을 우주개발에 돌리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지며 그들은 공산주의가 집권한지 40년이 넘는 현재까지도 생활에 많은 지장을 받고 있는 것이다.


농가들은 대개 납작집들이고 미국이나 일본 등의 농촌에서와 같이 텔레비나 전기세탁기 냉장고 등은 찾아 볼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소련 정부의 허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는 단 4개 도시(나호드카.하바로우스크.이루크츠크.모스크바) 밖에는 방문하지 못하였지만 도시의 교통은 뻐스나 전차 같은 공공수송편이 대부분이고 심지어 길가에서는 자전거도 찾아 보기가 힘들었다.


모스크바 같은 대도시의 상점 등에는 생활필수품이 제법 진열되어 있으나 그 질은 아주 조잡해서 내가 만난 소련인들은 내가 갖고 있는 값싼 볼펜이나 라이타며 손가방까지도 신기하게 만져 보며 부러워 하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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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서 좀 떨어진 곳애서 만난 어떤 소련인 아주머니는 내가 미국 사람인줄 알자 대뜸 '왜 미국신문이나 잡지들은 소련의 욕만 하고 비난만 하느냐'고 입싸움을 붙여 왔다.


너는 귀찮기는 하지만 상대가 시골 아주머니라 흥미도 나서 '아주머니는 미국의 신문이나 잡지들을 어떻게 입수하셨나요?' 하고 가볍게 반문하였더니 그 부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번도 본 일은 없어요' 하고 실토하는 데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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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젊은 세대에서 내가 강력하게 느낀 것은 그들은 북한이나 중공이 떠들어대듯이 그들과 '형제적인 관계' 라기 보다는 서구 나라들과 더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젊은 층들 간에 팽창하고 있는 문화의 광범위한 부분이 미영불이 등 서구의 문명으로 지배되고 있는 것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분명히 그들의 지배자들이 달갑게 여기지 않을 째즈를 미친듯이 즐기고 있으며 헤밍웨이나 샌드버그 같은 미국 문학가들의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중년 이상의 소련인들이 맹목적으로 우주인을 찬양하고 날뛰고 있는 반면에 이것을 자랑으로 삼고는 있으면서도 젊은 사람들은 '당신도 우주인이 되려느냐?'고 물으면 '우주인 보다는 방이 셋 있는 아파트를 얻으려고 하지'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우주인 가가린 소좌가 우주비행을 마치고 온 후 갑자기 방이 셋 있는 집으로 옮겨가 호화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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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북한


[ ...... 야채 한가지 볼 수 없는 상태였어요.

이 세상에 정말 이런데도 있는가고 머리가 다 이상해질 지경입니다 .......... ]


[ ...... 일본서는 노동자가 텔리비전 라디오 기타 전기기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 거짓말이라고 대든다네 ........ ]




1962.4.15. 경향신문


꿈은 깨어지고 전조총련간부 오귀성 기 (완)


식당에도 자유로이 못가
일본에 둔 남편 그리워 울고만 ....
평양에서 온 편지


발신자 북한 (이하 불상)

수신자 우인
일자 불상



지난번 편지에서 거짓말을 해서 미안해.나쁘게 쓰면 가질 않아서 할 수 없이 거짓을 썻네. 용서해주게.거짓이란 일본에서 조선을 선전하는 것과는 정반대란 말이다. 노임은 싸지 물가는 비싸지 인민과는 언제나 충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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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일본에서 들은 얘기와는 전혀 딴판이네. 또 일상생활에서 조금치라도 일본이 좋다는 얘기를 하면 반동적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리고 교육으로는 자본주의 사회란 자본가가 채찍을 휘둘러 일을 시키고 임금을 싸게 준다고 가르쳐서 학생들도 일본의 생활수준이 아주 낮을 거라고 우리에게 말하는거야.


이런 형편이라 우리가 일본서는 노동자가 텔리비전 라디오 기타 전기기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믿으려 하기는커녕 거짓말이라고 대든다네. 정말 외국의 사정엔 깜깜해. 쌀값이 싸다고 했지만 쌀은 배급제이다. 식당에도 자유롭게 갈 수 없고, 일본서 온 이국자(북송자)들은 모두 울고 있네.




발신자 평안북도 이 모녀
수신자 지인 K 일자 1960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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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와서야 비로소 당신네들이 반대한 이유를 알게 되었읍니다. 북한에 와서 깜짝 놀란 일은 일본에서 들은 것과 현실이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과 일상생활품 특히 일상 먹는 야채 한가지 볼 수 없는 상태였어요. 이 세상에 정말 이런데도 있는가고 머리가 다 이상해질 지경입니다.

저는 인간으로서는 이와같은 생활을 이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단념하고 최후의 각오를 하고 있읍니다. 이런 마당에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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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유고슬라비아




[ ..... '코뮤니스트 노굿!' .......

..... 유고엔 공산주의자가 없읍니다. 있다 해도 몇 사람뿐이죠. ........ ]




1971.10.11. 동아일보



동구를 향한 코리아의 고동


유고기행 4




유고가 공산국가라는 선입감만 없었다면 기자는 공산국이라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유고를 떠났을지도 모른다.


첫째로 그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완전한 거주와 여행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전가족을 거느리고 서구 어느 나라든지 마음대로 갈 수 있고 정부는 오히려 이것을 장려하는 셈이다. 실업자가 많고 엄청난 적자며 (금년 상반기만 8억5천만 달러) 물가폭등에 허덕이는 유고는 실업자의 임시 국외취역으로 인한 송금을 크게 기대하고 있다.


외국인에게도 유고는 완전히 개방돼있다. 기자가 런던의 유고 대사관에서 일개월 체재 비자를 얻는데 든 시간은 이제까지 경험한 가운데 가장 짧아 3분 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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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에는 또한 기자의 체험으로 볼 때 공산국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울 알 수 있었다.


기자가 유고에서 방문했던 두개의 신문, 자그레브에서 발행되는 유고 최대전국지의 하나인 '비예스니크'지와 벨그라드에서 발행되는 유고 최대의 일간경제신문 '프리브례드니 프례글예드'지의 주필 편집국장 및 편집간부들은 거리낌 없이 유고의 당면 고민과 약점들을 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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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 도착 이틀째 저녁, 어느 일류 식당에 들러 분홍빛 포도주를 곁들여 유고 특유의 양고기 요리를 먹고 있을 때였다. 60쯤 돼 보이는 노신사 한분이 다가 오더니 유고 말로 뭐라고 하는 품이 앉아도 좋겠느냐고 묻는 듯하기에 그러시라고 영어로 대답했다. 앉자마자 떠듬떠듬 영어로 자꾸 말을 건네 왔다. 식당은 잘 차려 입은 신사숙녀로 만원이었고 테이블 하나 건너엔 정복장교 세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거의 두시간 남짓 여러 나라 이야기가 오고 갔다.


동구 여러나라중 어느 나라가 가장 좋으냐고 물었더니 서슴치 않고 루마니아라는 대답이었다. 체코 항가리 폴란드 다 좋은 사람들이라기에 '소련은?' 하고 물었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댔다. 불가리아에 대해 묻자 '노' 하고 큰 소리로 외친다.

화제를 서구로 돌렸더니 트리에스트 영유권 문제를 안고 있는 이탈리아에는 좋은 감정이 아니었고 일차 대전때 은혜를 입은 프랑스에 대해서는 '참 좋은 나라'라며 입이 쩍 벌어진다. 이 노신사의 평과 같은 말은 그후 다른 몇사람으로부터도 들을 수 있었다.


갑자기 생각난듯이 노신사는 '참 코리아에는 노스가 있지요?'라고 물어왔다. '네 그렇습니다.' '노스는 코뮤니스트라던가?' '그렇습니다' 했더니 천만 뜻밖의 반응이 왔다. '코뮤니스트 노굿!' 하고 큰 소리로 떠들어 댄다. 순간 큰일 났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몇 잔 포도주로 기분 좋던 술기가 싹 가셨다. 바로 한 테이블 건너 장교들을 살펴 보니 못들었는지 자기들끼리 대하에만 열중하고 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노신사는 또 큰 소리로 '유고엔 공산주의자가 없읍니다. 있다 해도 몇 사람뿐이죠. 아마 이 식당 손님중에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장담하지요' 하고 떠들어댄다.


다시 주변을 살펴 봐도 아무렇지도 않다. 기자는 비로소 유고의 언론자유가 어떤 수준인가를 깨닫고 흐뭇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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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렌즈까지 달린 카메라 두대를 메고 다니며 사진을 찍어대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9월 중순이라 날씨가 서늘한데도 초미니와 핫팬츠가 거리를 활보하고 히피족은 없지만 장발족은 얼마든지 있었고 큰 호텔마다 나이트클럽이 있고 스트립쇼도 있었다.일행이 투숙했던 유고 최대의 호텔 벨그라드엔 밤이 깊어지면 밤의 꽃들이 서성대고책방마다 누드사진이 범람하는 것까지 런던과 다를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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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1.16.


1월16일 「벤체슬라스」광장에서 「프라하」대학철학과학생 「얀·팔라치」군(22)이 焚身(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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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죽기 전에도 저항의 상징이었으며 다음과 같은 그의 마지막 편지는 모든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다.



"조국은 바야흐로 절망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항거를 행동으로 표시하고 국민들을 일깨우기 위해 단호한 결심을 했다.


우리의 요망은 첫째, 검열제도의 즉각적인 철폐, 둘째 소련 점령군이 발행하는 신문의 일종인 즈프레비 지의 배포금지다.


만일 우리의 요망사항이 닷새안에 이루어지지 않고 -- 또 국민들이 파업 등의 수단으로 충분한 협력을 표시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횃불이 타 오를 것이다.


횃불 제1호로부터"



그의 요구는 구체적이고 온건한 것들이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그는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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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자유)를 熱望(열망)한 抵抗(저항)의 횃불 체코反蘇運動(반소운동)의旗手기수) 얀 팔라치군 분신 5주년

1974.01.31. 동아일보 4면







팔라치愛人(애인)도 焚身(분신)

1969.01.25 경향신문


【프라하=UPI·동양】소련의「체코」침공에 항의하여 지난16일 분신자살한「체코슬로바키아」대학생「팔라치」군의 애인인「에바·베드나리코바」(18)양이 21일 분신자살...




七(칠)번째 燒身(소신) 두브체크 鎭靜(진정)호소

1969.01.25 동아일보





비상속 팔라치 장례

경향신문 1969.1.27.


비상속 팔라치 장례

프라하 전시 조종 -- 촛불행렬 수십만


[프라하=AP.동화] 소련군에 점령당한 조국의 가냘픈 자유의 불길이 꺼져 버리지 않도록 분신자살로써 21세의 청춘을 불살라 버린 철학도 얀 팔라치 군의 장례식은 25일 만일의 사태에 대비, 전군경에 비상대기령이 내린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비교적 질서정연하게 칼 대학에서 엄숙히 거행되었으며 비통에 잠긴 수십만의 체코인들은 부슬비 내리는 거리로 쏟아져 나와 팔라치 군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장례대열이 구시가광장을 지날 때 소련군의 체코 침공을 알렸던 프라하 교회의 종들은 일제히 조종을 구슬프게 울렸으며 연도에는 손에 촛불을 든 남녀노소의 수 많은 시민이 도열해 팔라치 군에게 말 없는 조의를 표했다.



팔라치 군의 어머니 팔라코바 여사가 관에 매달려 울면서 뒤따랐고 그녀의 남은 아들 이리 군과 팔라치 군의 약혼녀도 관을 붙들고 있었다.

거대한 체코기를 든 학생과 가운을 입은 칼 대학 철학과 교수들이 영구에 뒤따랐고 전외상 이리하예크, 체코 작가동맹 위원장 에두아르드 골드스투에커, 전 교육상 블라디미르 카드레치 등 세 개혁파 지도자도 장례 행진 속에 끼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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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팔라치 焚身(분신)


1969.08.26 경향신문


제2의 팔라치 焚身(분신) "무릎 꿇고 사느니 고개 들고 죽겠다"


【브르노(체코)=UPI동양】「체코슬로바키아」의 19세 청년 1명이 "무릎 꿇고 사느니 고개를 들고 죽기 위해" 분신자살했다고 이청년의 친구들이 25...














귀환어부 좌담회 음산한 북한


동아일보 1970.7.29.



귀환어부 좌담회

음산한 북한
평양거리 쓸쓸 .... 주민들 핏기 없고
국교생 도시락엔 쌀한톨 안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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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북한주민들의 식생활은 어떻습니까?


우재=그들은 쌀밥을 먹는다고 선전했지만 얼굴에 핏기가 없더군요. 주민들과의 접촉은 금지되어 식생활을 자세히 관찰할 수 없었지만 실제로는 쌀밥에 고기반찬을 못먹는 것 같아요. 우리들이 드나드는 식당과 일반식당 사이엔 베니어판으로 막아 놓았는 데 뚫린 구멍으로 들여다 봤더니 일반주민들의 밥은 우리에게 주는 것과 아주 딴판이에요. 그들은 고구마가 섞인 잡곡밥이더군요.


엄동=우리에게 주는 쌀밥도 말이 쌀밥이지 기름기가 없고 푸실푸실하며 새카만데다 맛도 없어요.


우재=우리가 평양여관에서 배구를 하고 있는데 어린 학생들이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었읍니다. 우리들중의 한명이 한 학생의 도시락을 슬쩍 열어보았지요. 저도 곁눈질로 들여다봤지요. 쌀은 한톨도 없고 옥수수로 지은 밥이었읍니다. 도시락을 몰래 열어본 동료는 즉시 끌려가 우리 일행이 석방될 때까지 다시 나타나지 않았읍니다.



사회=북한주민의 의복은 어떻습니까?


최성=제가 묵고 있던 여관의 안내원들은 옥양목이나 모시저고리를 입었더군요. 고무신은 도저히 볼 수 없고 모두 비닐신을 신고 있었읍니다. 비닐신은 딱딱해보였고 부러진 자국도 있었읍니다.


사회=평양시가와 건물들은 어떻습니까?


최해=평양시는 크기가 강릉시와 비슷했읍니다. 건물은 대개 4,5층으로 네모 반듯해 퍽 단조로왔읍니다. 가장 높은 건물은 아동궁전이라고 하는 건물로 11층이더군요. 거리의 풍경은 퍽 쓸쓸했고 행인들은 우리들이 납북어부들이란 것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고 몰라보는 사람도 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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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소에도 김일성 사진



사회=공장에 가 보신 소감을 좀 ....


최해=일만시키니 노동자들이 지쳐있어요. 공장에 시찰 온 김일성이가 앉기만해도 그 자리는 곧 성역이 되어 보전되어 있어요. 변소에까지도 김일성 사진이 붙어 있는데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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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재= ...... 돌아오기 전날밤 저는 쉐터와 구두를 잃어버렸읍니다. 북한에는 옷이 귀하니까 누가 훔쳐간 것 같아요.



우리 물건 굉장히 탐내



최해=그들은 남한의 물건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우리들이 입고 간 털옷을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더군요. 또 날짜가 나오는 시계를 보더니 욕심을 내더군요. 이런 시계를 남한에서 생산한다고 했더니 거짓말이라고 하더군요. 사상교육 교관들이 매시간 바뀌는데 차고 오는 시계는 항상 같은 모양이에요. 시계 어쨌든 교대로 차고 오는 것 같아요. 어쨌든 북한에는 시계가 귀한 모양입니다.



우재=동해안에 와 보니 우리배에 발동을 걸어 놓았더군요. 주위엔 환송객들이 많이 나와 우리들을 에워싸고 있었어요.60 정도의 노인들은 악수를 청하거나 붙들며 울더군요. 그런데 30대 미만의 젊은 사람들은 동정하는 눈빛으로 쳐다봐요. 아마 남한은 지옥과 같다고 이들에게 하도 허위선전해서 정말 그런줄 알고 있는 것 같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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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장 기억에 남는 광경은?


최해=여자들이 화장을 일체 않고 남자 이상으로 일하는 것 같아요. 부인네가 어린애 한명은 업고 한명은 손잡고 걸리며 한손엔 책을 들고 읽으면서 걸어가더군요. 측은한 마음까지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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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국민학교 학생들도 공기총사격연습을 하며 놀더군요. 어떻게 훈련을 시켰는지 아주 잘 맞혀요. 우리들한테 맞춰보라고 해서 한번 쏘아봤더니 잘 안 맞아요.



사회=북한의 실정은 어떻습니까?

최해=같이 납북됐던 노인들의 말을 빌면 왜정 말기와 별 차이가 없다고 하더군요. 제 생각에도 그 쪽엔 별로 발전한 것 같지 않아요.

최성=한마디로 남한과는 천지차이입니다. 발전상은 비교가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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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중국



[ ...... 일요일은 없고 휴일이라곤 1년에 3일뿐 .........

...... 저녁을 먹고 나면 .... 생산계획을 토의하고 모택동사상강좌를 .........


..... 벼농사도 지었으나 쌀밥은 한톨도 먹어보지 못했으며 주식은 옥수수, 수수, 좁쌀과 감자 .......

..... 봄철과 가을철에 남루한 의류 한벌씩 사고 나면 빈털터리 ........... ]




야만인생활 25년 - 중공서 돌아온 일인가족이 폭로


매일경제 1970.8.19



외계단절 잡곡으로 연명
쉰다는 명절도 모사상 고취로 들볶고
1년 혹사댓가가 누더기 한벌


중세농노를 방불케 하는 중공치하의 인민공사내의 생활실태가 최근 귀국한 전일본개척민에 의하여 밝혀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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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림노파일가가 있던 곳은 흑룡강성 방정현의 보흥공사라는 30가구를 수용한 소규모의 집단농장, 수소폭탄을 실험하고 동방홍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등 군사면에서의 발전과는 멀리 전기도 경운기도 없는 반원시적 농업집단이라고 했다.


이곳 남녀농군들에게 있어 시간관념은 태양. 날이 새면 농장에 나가 일하다가 해가 져 곡물과 잡초의 분간을 할 수 없을만큼 캄캄해진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을 먹고 나면 고단한 몸을 쉬지도 못하고 야회에 나가 내일의 생산계획을 토의하고 모택동사상강좌를 받아야 한다.


일요일은 없고 휴일이라곤 1년에 3일뿐 정초와 단오절 추석에 하루씩 쉬는 것뿐인데 쉬는 날은 모택동사상 고취와 생산책임량 증대를 위한 행사 등으로 가만히 버려두지 않으므로 실제로 쉬는 날이란 하루도 없는 것이다.


벼농사도 지었으나 쌀밥은 한톨도 먹어보지 못했으며 주식은 옥수수, 수수, 좁쌀과 감자. 1년의 농사가 끝나면 각기의 생산량에서 공출책임량과 배급용식량을 빼고 남은 것을 현금으로 환산하여 받게 되는데 봄철과 가을철에 남루한 의류 한벌씩 사고 나면 빈털터리.


병에 걸리면 죽는 날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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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 ...... 산모가 쌀밥은 구경도 못해 젖이 안나온다 .......

...... 두부 생선 등은 볼 수도 없으며 돈은 소용도 없으니 헌옷 가지를 보내 달라 ........ ]



후회에 찬 비참한 나날 북송일인처들 편지로 참상 폭로


매일경제 1974.5.6.



산모가 쌀밥 구경도 못해
43세에 이미 백발돼버려
돈도 소용없으니 헌옷 보내달라



한국인 남편을 따라 북송선을 타고 북괴에 간 일본 여인들의 참상이 드디어 일본사회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어 뒤늦게 충격을 던지고 있어 내외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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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통의 편지내용
2020-12-27 19:18:55
1.233.12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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