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험버트(첫 회)
나의 험버트(첫 회)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6.12.29 00:00
  • 호수 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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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남희  그림/정미라


그를 만난 것을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
타인이 그와 나에 대해 말해 보라면 나는 이 생각부터 떠올리고 고민에 잠기곤 한다.
왜 그를 사랑했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그 다음 떠오르는 생각은 이것이다.
처음에는 가늘고 연약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끌렸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미소. 그것을 무엇이라고 묘사하면 좋을까. 어휘력이 짧아 쉽게 묘사하기는 어렵다. 흰 젤라틴 페이퍼를 통해 비치는 희뿌옇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빛이라고 하면 알맞을까.

그래, 그는 나에게 그런 빛이었다.
“반가워. 오늘부터 팔팔한 열여덟 살 너희들을 가르칠 담임이다.”
그는 예의 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는 조금 나른한 듯한 얼굴로 서른여덟 명의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과목은 음악이고, 이번이 처음 맞는 담임이야.”
여학교가 아닌 남녀공학이었고, 게다가 남학생들이 잘났기로 소문난 학교라 그랬는지 여자애들 대부분은 젊은 남교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책상 아래로 몰래 손을 내려 연인에게 핸드폰 문자를 보내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는 보고 있는 듯했지만 애써 묵인하고 있었다.

“몇 살이신데요?”
내 뒤에 앉은 남자애가 물었다. 질문을 받은 그의 얼굴에서 나른함이 가셨다.
“서른다섯.”
그나마 고개를 들고 있던 여자애들마저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가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기는 했지만, 삼십대 중반부터는 흥미가 없다는 것이리라.

속물들.
혀를 차며 교단에 서 있는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나는 시계를 흘끔 보았다. 슬슬 담임 시간이 끝나고 1교시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구원해주자는 기분으로 물었다.

“선생님 성함은요?”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는 등을 돌리고 분필을 들었다. 흰 분필로 칠판에 커다랗게 이름을 쓰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정시후(鄭枲珝). 정시후다.”
그는 다시 우리들에게로 돌아섰다. 그는 나를 가만히 보더니 나른하게 웃었다. 가늘고 연약하게, 마치 흰 젤라틴 페이퍼를 통과하는 빛처럼.

“그리고 임시 반장은―.”
아이들의 시선이 전부 그에게로 쏠렸다. 임시 반장으로 뽑힌다는 것은 정식 반장을 뽑기 전 자신의 능력을 다른 아이들에게 어필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해, 검증받고 자신의 능력을 다른 아이들에게 보임으로써, 뽑힐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뜻했다.

속물, 저질들.
나는 다시 한 번 그네들을 비웃었다.
그의 손이 쳐들렸다. 나는 그제야 그의 손을 볼 수 있었다. 가늘고 긴, 마치 피아니스트 같은 하얀 손. 아니, 가늘다기보다는 말랐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을 듯했다. 마치 거미처럼 긴 손가락 하나를 들고, 천천히 세 번째 줄에 앉은 나를 가리켰다.

“……너. 음, 이름이?”
나는 교복 주머니에 넣었던 명찰을 드러냈다. 반희원(潘喜元). 아플 정도로의 형광등 빛을 반사하는 아크릴 코팅에 눈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가만히 입술을 떨며 나를 응시했다. 얇은 입술에 떠오른 일말의 경악.

“그래, 반희원 양이 좀 해 줘. 내일 음악시간이 들었으니 그 때 선거하자.”
그 말만을 남기고 그는 출석부를 챙겨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가 버리기 무섭게 아이들은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했다. 맨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여자아이들이 째지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진짜 뭐야, 쟤? 진짜 재수 없다. 이름 물어봤다고 반장 시키냐? 진짜 어이없지 않냐? 아, 진짜.”
한 번 말하는데 진짜라는 단어를 서너 번씩 넣어가며 지껄여대는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신경을 떼고, 가만히 그의 이름을 쳐다보았다. 한글로 정시후라고 쓰여 있고, 괄호 속에 한자가 들어 있다. 정시후(鄭枲珝). 가만히 그 말의 어감을 되씹으며 앉아 있었다.

나른하면서도 다정한 음색. 모시풀 시에 옥 이름 후.
나는 가만히 일어서서 칠판으로 다가갔다. 흰 분필 가루가 새하얗게 앉은 칠판지우개를 들고, 그것을 칠판에 대었다. 하얀 분필 가루가 칠판지우개에서 칠판으로 옮겨갔다. 나는 팔을 위아래로 크게 움직여 그의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지워냈다. 모시풀과 옥돌. 작게 중얼거리면서 그의 이름을 지워냈다.

가느다랗고 긴 글씨체. 그러나 흐리고 나른하고, 마치 그를 닮은 글씨였다. 늙은 남선생들처럼 위의 글자를 꺾어 쓰는 궁서체가 아닌, 그를 닮은, 그 어디에도 없을 글씨체.
……시후체, 라고 부를까?

그 생각을 하니 재미있어져서, 나도 모르게 작게 미소 지으며 칠판을 지웠다. 아니꼬워하는 시선이 내게로 와 붙었다.
“그래, 선생한테 잘 보여서 감투 하나 썼는데 그거라도 해야지.”
그리고 뒷목을 후려치는 조그만 지우개 조각.

보통 때라면 불쾌해하며 뒤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보통 때라면 그네들을 쏘아보고 묵묵히 지우개를 들고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모두 다 우습기만 했다. 나에게 지우개 조각을 던지는 그네들도, 그의 가늘고 긴 글씨체도. 나는 허리를 꺾고 웃기 시작했다.
“웃어? 야, 저 년 웃는다.”
“아, 씨발. 웃어? 씹…….”
“야, 야, 관둬. 선생한테 꼰지를라. 선생 또 지랄 댈 거 아냐. 저년 아양 떨어서.”
“씨발 …….”

째지는 듯한 여자아이들의 소리도 그냥 우습게 들려왔다. 나는 꺾었던 허리를 제대로 세우고 킥킥대며 웃었다. 속물들, 속물들, 하고 중얼거리면서. 웃기는 건 너희들이야. 미친년들. 그렇게 지껄이면서 정작 권력 앞에는 고개 숙이잖아. 속물적인 인간…….
속으로 낮게 읊조리다 고개를 들었다. 1교시가 시작하기 이 분 전이었다. 나는 칠판지우개들을 모아들고 밖으로 나가, 창문 밖으로 상체를 내놓고 그것들을 털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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