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험버트(2회)
나의 험버트(2회)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7.01.12 00:00
  • 호수 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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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종례 시간에 다시 들어왔다. 예의 그 시후체―이 생각을 하며 다시 웃었다―로 칠판에 글자 몇 개를 적었다. 내일은 자기소개 준비해올 것. 그렇게 쓰고 그는 뒤돌아서서 자신 있게 웃었다.

“내일은 자기소개를 할 거야. 준비해올 수 있지? 일번부터 번호순으로다.”
뒷자리의 여자아이들이 투덜대는 소리가 역력히 들려왔다. 그는 난처한 듯이 웃어 보였다.
“좀 귀찮더라도 열심히 해주길 바란다. 담임 시간에 할 거니까 아침에 와서 후닥닥 하지 말고.”

네, 하는 대답이 남학생들을 중심으로 술렁술렁 퍼져나간다. 맨 뒷자리의 여자아이들은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그녀들을 무시하고 활짝 웃어 보였다. 퉤, 하고 침 뱉는 소리가 들린다.

더러운 것들.
가볍게 비웃어 보였다. 그를 보고 안심하라는 듯이 미소 지어 주었다. 그도 살짝 웃어 보였다. 나는 그를 다독이듯 쳐다보았다.

괜찮아요, 저런 것들 상대할 필요 없어요.
그렇게 되뇌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옅은 미소를 쳐다보았다. 그의 가느다랗고 옅은 미소, 그의 손에 꼭 어울리는 미소였다.

나는 문득 그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교탁 아래의 왼손을 찾아 눈을 움직였다. 결혼은 했을까, 하고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반지를 낀 걸 보고 싶었다. 그의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마치 팀 버튼의 애니메이션에 나온 인형들처럼 긴 손가락, 거미처럼 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는 무엇이 좋을까. 나는 멍하니 공상에 잠겼다. 금반지? 아니야. 어울리지 않아. 그 흰 손에 어울리는―은색. 백금도 싫어. 은이 어울릴 것 같아. 보석은? 다이아몬드는 아니야. 그건 너무 완벽해. 에메랄드는 어떨까. 싫어. 그건 저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아. 사파이어나 루비도 마찬가지야. 저 사람에게는 무채색이 가장 어울려. 하지만 투명한 큐빅도 싫어. 그러면…….

“……장? 반장?”
멍한 공상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에…… 네?”
나는 얼굴이 새빨개져 그의 목소리에 답했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섯 번씩이나 불렀는데, 대답을 안 해서.”
“아…….”
얼굴이 더 뜨거워진다. 그는 재촉하듯 말했다.
“일어서서. 인사해야지.”

나는 어물어물 일어섰다. 그제야 그의 표정도 조금 풀어지고, 예의 그 나른한 미소가 입가에 걸쳐졌다. 나도 안심이 되어, 등을 펴고 차려 자세를 했다.
“차렷, 경례!”
“안녕히 계세요!”

아이들은 제각기 가방을 챙겨들고 일어선다. 나는 조금 얼떨떨해졌다. 오늘은 야간자율학습 안 한다고 했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공상을 하던 중 아련히 들려왔던 것 같기도 하다. 흘끗 칠판을 바라보니, 가느다랗고 긴 글씨로 쓰여 있다. 오늘은 야자 없음. 가늘고 긴 글씨는 그것을 쓴 손과 닮았는지 저도 가느다랗고 길다.

문득, 그의 손에 대한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내 머릿속에는 아련한 영상이 떠올랐다. 길고 하얀 손가락. 그 새하얀 약지에 끼워진 은반지―필시 결혼반지일-와, 그 손을 맞잡고 있는 여성의 손. 똑같은 반지를 끼고 있는…….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그 여성의 손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것은 내 상상이 만들어 낸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손의 주인을 최악의 고통으로 밀어 넣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의 손을 내가 대신 잡고 싶었다.

……보고 싶어, 그 손이!
그의 손을 향한 열망이 분노를 치고 올라왔다. 나는 교실을 마구 뛰쳐나갔다. 복도 저편에 그가 등을 돌리고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향해 마구 달렸다. 가느다란 그의 뒷모습이 어른거렸다.

“선생님!”
고함쳐 부르자 그가 멈춰 서서 뒤돌아보았다. 나는 미친 것처럼 달려 그의 왼손을 움켜쥐었다.
“희원아?”
당황한 그의 목소리를 들은 체 만 체 하고, 나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냈다. 엄지, 검지, 중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약지를 꽉 붙잡아 폈다.
반지는 없다.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안심과 함께 다리의 힘이 사라졌다. 주저앉을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울고 싶어졌다. 이런 추한 꼴이라니! 지나가던 아이들이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손을 놓고 머뭇머뭇 물러섰다. 당황한 얼굴의 그가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당황을 담은 흑회색의 홍채. 옅은 무채색의 그 빛이 나를 당황한 듯 응시하자,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말았다.

“시, 실례했습니다!”
꼴같잖게 말도 더듬었다. 그 말만을 외치고 뒤로 돌아 마구 달아났다. 할 수 있는 힘껏, 어리석은 자신에게 바보라고 속으로 소리치며.

바보, 바보, 바보!
축 처진 어깨로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거실에서 가죽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살짝 파마를 해 웨이브를 준 후 멋스럽게 틀어 올리고 몇 가닥 늘어뜨린 긴 머리가 잘 어울렸지만, 기분이 저조한 내 눈에는 그것조차 잘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 딸, 왔어?”
엄마는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떼고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 물어왔다.

“왜 그래? 어디 나쁜 일 있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별일 없었어. 그냥 좀 아파서 그래.”
엄마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물어왔다.
“어디가? 어디가 아파?”
“요새 좀 감기 기운 있더니 그건가 봐. ……좀 쉬면 나아지겠지, 뭐.”
“그럼 좀 쉬고, 약은 늘 있는 데 있으니까 정 못 견디겠거든 먹어. 약 자꾸 먹어 버릇하면 못쓰니까.”
“알아.”

약간 퉁명스레 대답하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문득 엄마가 나를 불러 세웠다.
“참, 그런데 담임은 누가 됐대?”
“모르던 사람. ……전에 이삼학년 음악만 가르쳤대. 우리 한번도 안 가르쳤어.”
그녀의 목소리에 호기심이 돌았다.
“응? 그럼 어떤 사람인데?”

아프다는 딸에게 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을까. 약간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그냥, 남선생이야.”
“이름이 뭔데?”
짜증이 더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을 가르쳐주고 싶지 않았다. 무채색의 그에게 어울리는 어감의 이름. 투명한 젤라틴 페이퍼가 생각나는…….
“몰라. 까먹었어.”
“뭐? 얘는, 자기 선생님 이름까지 까먹으면 어떡해?”
타박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쾅 닫았다. 교복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딱딱한 스프링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무거운 눈꺼풀이 잠을 가만히 불러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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