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 이야기
‘모시’ 이야기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7.04.20 00:00
  • 호수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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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웅순
중부대 교수

50~60년대만해도 한산은 모시를 생업으로 해서 살아가는 집이 많았다. 물론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낙네들은 낮에는 들일을 하고 밤에는 베를 짰다. 먹고 살기 위해 모시를 팔아야 했고 그 돈으로 자녀들의 학비도 대어야했다.

참으로 가난하게 살았던, 진절머리 나도록 가난하게 살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철없이 나는 움 밖의 기러기 울음소리가 좋았고 옆집의 베틀 소리가 좋았고 문지방으로 쏟아지는 달빛이 그렇게도 좋았다.  


그런 것들이 백제의 삼천 궁녀 한은 아니었을까. 금강물은 그래서 철석거리며 흐르는 것은 아닐까. 천승맞게도 어린 시절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시인이 되면 그것을 시로 써보려고 다짐해보기도 했다. 그리고는 몇 십 년의 세월을 까마득히 놓쳐버리고 말았다. 

잃어버린 백제 왕국, 굽이쳐 흐르는 백마강, 낙화암의 단소 소리, 이런 한을 모시에 재생시킬 수는 없을까. 20여 년 전에 썼던 시조 「한산초」‘모시’ 15수는 그런 고민 끝에 세상에 나온 작품이다. 빛바래기는 했어도 나에겐 참으로 소중한 작품이었다.

베틀 위에 실려오는
황산벌의 닭울음
결결이 맺힌 숨결
가슴 속에 분신되어
지금도 옷고름 풀면
날아가는 귀촉도
 -시집「한산초」‘모시 2’ 전문-

‘우주 밖 은색의 빛 베틀에 감겨지면 한 점 새벽바람 어둠을 걷어가고, 이승을 행궈 내어 풀밭에 너르면 다림질하는 햇살 그리움은 마르는데, 시침하는 손길마다 한 생애 끝나가고 바늘은 실을 따라 피안까지 누벼가네’ 이것이 당시 우리 어머니들의 모시 이야기였고 삶의 이야기였다.

어쩌면 우리 어머니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한을 갖고 태어났는지 모른다. 시부모 시집살이, 남편 시집살이, 자식 시집살이를 숙명적으로 갖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한을 달랠 모시라도 있었으니 그렇지 않다면 무엇으로 한을 풀며 살았을 것인가.

태모시를 쪼개고 또 쪼개어 한 올 한 올 숨을 뽑아 무릎에 감는 그 슬기를 한이 없는 여인은 터득할 수가 없다. 한이 없는 사람은 그런 숙명적인 작업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째고, 삼고, 날고, 매고, 감고, 짜고 그 수많은 온갖 정성이 서린 모시 공정이 우리 어머니들의 손끝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이 그런 인고의 세월들을 풀어내며 일생을 살아가셨을까. 한 겨울 한 필 한 필 삼경을 숨소리에 포개놓았을, 혼자서 기나긴 밤 잉아에 걸고 백마강물 짜아갔을, 다시는 그런 모습 볼 수 없을 돌아가신 내 어머니를 새삼 생각해본다.


"칼럼은 본지의 논조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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