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이유
존재의 이유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7.06.22 00:00
  • 호수 37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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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식
우송정보대학 교수

최근 어느 토론장에 초대되어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6명이 10분씩 1시간 계획이었다. 순서가 맨 처음이라 다소 긴장도 하였으나 가능한 지루하지 않도록 요약해서 마무리 하였다. 당연히 시간도 재어가면서 정확히 10분 안에 끝냈다.

그런데 세 번째 순서의 발표자가 나한테 시간이 초과되었다는 지적을 했다. 무언가 오해가 있었거나 아님 내용이 다른 사람들에게 지루했었나하는 생각이 들어 다른 사람들을 관심 있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지적자의 순서에서다. 그는 무려 배가 넘는 시간을 써가면서 우리들을 무척이나 지루하게 만들었다. 내용도 별로였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평가하는지 몰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건은 나에게 나름대로의 의미(존재이유)를 안겨주게 되었다.

그것은 그 토론회가 그 발표자의 비중이 컸고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도 그 사람에 의해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이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는 그러한 일이 없었는가도 반성해보았다. 아마도 이는 긴장감 때문일 것이라는 결론이다. 일반적으로 낯선 환경에선 두 가지의 반응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조심스럽게 상대방의 태도를 보아가면서 차분히 대응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갑자기 허세를 부리며 공격적인 자세로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모습일 것이다. 물론 이 같은 단언은 처한 상황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하겠지만 특히, 남모르는 사람들 앞에 나서면 대부분이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실제로 남이 연설하는 것을 잘 듣고 있노라면 차분하게 상대방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줄곧 자기주장만이 옳다고 남의 견해는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함께 같은 생각을 해야 하는데 왠지 서로가 오해만 깊어가는 경우도 많이 본다.

객관 타당한 입장에서 자기주장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위치나 권력, 우위적인 이해관계에 힘입어 일방적으로 전달하려는 자세, 그것도 책임지지도 못하는 입담(lip service)으로만 진행된다면 이는 매우 무의미한 대화이자 표현이 될 것이다. 특히, 한 말씀한다거나 술 취한 주정에 가까운 상태는 더욱 더 그러하다.

가뜩이나 듣기 싫어하는 분위기속에서 말하기만을 좋아한다면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공공장소가 점점 시끄러워져 가는지도 모르겠다.

아님 시샘에 가득한 남 이야기만을 마치 비밀인양 생산하고 다니며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지도 모르겠다. 어찌 한 우물에서 단물과 짠물이 그리 잘도 샘솟고 있는지?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이름값이나 해야겠다. 그리고 보다 더 솔직해져야 하겠다. 모름지기 모든 만물에 있어서는 그 나름대로의 가치와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거기에 합당한 대우와 이름으로 널리 불리고 있을 것이다. 마치 그릇이름과 마찬가지로…

어릴 적에는 그저 큰 그릇만을 생각했었는데 이젠 온전한 그릇으로서의 자리 잡음과 담고 있는 내용물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고 있다. 그래서였던가? 갑자기 지난 번 은사님으로부터 들었던 명심보감에 나오는 글귀가 눈에 크게 들어온다.
그릇이 차면 넘친다는 기만칙일(器滿則溢)을!


"칼럼은 본지의 논조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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