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포대첩’ 진실 밝힌다
‘진포대첩’ 진실 밝힌다
  • 허정균 기자
  • 승인 2007.11.16 00:00
  • 호수 39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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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문화원, 학술대회 개최
22일(목) 오후 2시 서천문화원 강당
   
▲ 마서면 옥산리 남산 기슭에 있는 나세 장군의 가묘.
  장항읍 원수리는 진포대첩을 총지휘하여 승리로 이끈 상원수 나세 장군에게서 비롯된 지명이다.
  마서면 일대는 나세 장군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1350년(고려 충정왕 2년)부터 1399년(조선 정종 원년)까지 우리나라 해안에 왜구가 출몰하며 노략질을 한 것은 그 횟수가 369회이며 606개 지역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1380년(우왕 6년) 8월 추수철에 500여척의 대선단을 이루어 진포로 쳐들어온 것은 거의 전란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이들 왜구는 진포에 닻을 내려 배가 흩어지지 않게 밧줄로 결박하여 놓고 상륙하여 노략질을 시작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나세를 상원수로 최무선, 심덕부를 부원수로 임명하여 80여 척의 병선에 최무선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화약 병기인 화통, 화포를 갖추고 출전시켰다.

나세 장군이 두 명의 부원수와 함께 진포에 이르러 왜적의 선단에 근접하여 일시에 화포를 쏘아대자 적선은 서로 엮어져 있어 일시에 불타 가라앉고 연기는 하늘을 덮었으며 왜구들은 거의가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고 <고려사>의 기록은 전한다. 이를 우리 역사에서는 ‘진포대첩’이라 부르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 현장인 진포를 전북 웅포리에서 군산시 일대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일제시대 이전까지 군산 지역은 수심이 얕고 상류에서 흘러내리는 토사가 쌓이는 지형이고, 반면에 서천 지역은 강물의 유속이 빠르고 깎이는 지형이어서 수심이 깊으며 일제시대 군산항이 준설되어 항구로서의 주도권을 빼앗기기 전까지 서천지역이 항구로서 주요 기능을 담당하였음으로 미루어보아도 진포대첩의 현장은 서천지역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다만 왜구가 선박은 오늘의 장항에 정박하고 서천, 군산 등 주변에 흩어져 상륙했을 수는 있다.

서천문화원이 “잊혀진 전쟁, 진포구 대첩 역사적 사건을 밝힌다”는 주제를 내걸고 진포대첩에 대한 학술대회를 연다.

오는 22일(목) 오후 2시에 서천군 후원으로 서천문화원 2층 강당에서 열리는 이번 학술대회에는 군내 인사와 저명한 학자 등이 다수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학술대회는 1부와 2부로 나눠 진행한다. 먼저 1부 순서로 이 영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과 교수와 김기섭 부산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진포구 대첩에 대하여 각각 주제별로 발표할 예정이며, 패널 토론자로는 이해준 공주대 사학과 교수와 오석민 충남역사문화원 박물관 운영팀장이 참가한다. 2부 순서에서는 고려 말 진포구로 추정되는 서천군 장항읍 일대를 직접 돌아보며 현장 답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한편 2007년 4월에 ‘잊혀진 전쟁 왜구’라는 저서를 집필한 이 영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과 교수는 서천군과 군산시가 1380년(우왕 6년) 벌어진 진포구 대첩에 대한 영유권을 놓고 오랜 시간동안 논쟁을 벌인 것에 대하여 고려말 저명한 학자인 목은 이색선생이 집필한 ‘목은집’ 등 여러 증거를 제시하며 서천군 장항읍 일대가 진포구 대첩이 일어난 장소라고 저서에서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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