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포구대첩 학술대회 지상중계 ■
■ 진포구대첩 학술대회 지상중계 ■
  • 허정균 기자
  • 승인 2007.12.07 00:00
  • 호수 3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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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2일 서천문화원 강당에서는 서천문화원의 주관으로 ‘진포구대첩 학술대회’가 열렸다. 발제에 나선 이영(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과)교수는 진포대첩의 현장을 장항읍 일대라고 하였으며 김기섭(부산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고려말 왜구의 동향과 최무선의 활약에 대해 조망하였다. 이 학술대회에 많은 주민들이 참여하여 높은 관심을 보였으며 진포구대첩의 현장인 장암진성을 현장답사하기도 하였다. 이 날의 발제 내용을 요약 정리하여 소개한다.<편집자>
‘왜구=고려, 조선인 주체’설의 연장설에 입각하여 진포구 전투 자체를 믿지 않는 것이 현재 일본의 왜구 연구자들의 견해이다.

목은 이색이 남긴 시 세 편에서 진포구 전투는 역사적 사실이며 왜구 선단이 화포 공격으로 소실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진포구 전투의 역사지리학적 고찰
이영(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진포구 전투의 현장은 장항읍 일대”

왜구의 주체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일본의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나온 <이와나미 일본사 사전>에 의하면 왜구의 실체에 대해 “구성원은 대마도, 일기도, 북규슈의 일본인을 중심으로 하여 화척(禾尺), 재인(才人)이라 불리는 한반도의 천민 등도 포함하고 있다. 근년에는 제주도민들도 주목받게 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왜구=고려, 조선인 주체’설의 연장설에 입각하여 진포구 전투 자체를 믿지 않는 것이 현재 일본의 왜구 연구자들의 견해임을 생각하면 진포구 전투의 현장을 정확하게 규명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서천군 한산면 출신으로 왜구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대(1350~1392)에 조정의 고관으로 살았던 목은 이색(1328~1396)이 남긴 시 세 편에서 진포구 전투는 역사적 사실이며 왜구 선단이 화포 공격으로 소실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진포구가 어디냐에 관해 서천설과 군산설이 있다.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서천군 조에 진포에 대해 “진포(鎭浦)는 서천군의 남쪽 26리에 있으며 임천의 고다진에서 서천포에 이르는 포구들을 통틀어 진포라 하고 그 사이의 여러 진과 포는 모두 진포의 도섭처(渡涉處)이다”라고 하고 있다. 또한 군산시에 있었던 군산진은 진포구 전투가 있었던 경신년(1380)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성종실록>의 “서천진은 바다 어귀에 있고 그 포의 상류에 군산진이 있는데 만약 수적이 변경을 침범하면 반드시 서천을 경유해야만 군산에 도달하니 청컨대 군산의 군사를 서천에 더하고 군산을 혁파함이 어떠하겠습니까?”라는 기사를 보아도 군산진 일대가 진포구 전투의 현장이라고 볼 수 없다.

<고려사> 우왕6년(1380) 7월조에 “왜구들이 서주(西州)에 침구하였다. 또 부여, 정산, 운제, 고산, 유성 등의 현에 침구한 뒤 마침내 계룡산에 들어갔다.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이 왜구들을 피하여 산으로 올라갔는데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붙잡혔다.”라는 기사가 있다. <고려사절요>에 “왜가 서주의 비인현에 침구하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비인현이 곧 서천군 비인면이므로 서주는 곧 서천이 된다.

당시 왜구는 500여척의 선단을 이끌고 쳐들어와 선박을 밧줄로 묶어 정박하고 있었다. 여기에 고려 수군 100여척이 공격을 가해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 진포구이다. 왜구 선단은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 아니라 대양항해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첨저형이다. 이러한 선박들이 정박하려면 충분한 수심이 확보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곳은 군산쪽에는 없다. 그러나 서천에는 아포와 용당진, 서천포영이 있다.

조선총독부가 1911년에 제작한 지도에서 오늘의 장항읍 일대를 보면 전망산과 후망산 사이의 만입된 지형과 장암리와 용당진 사이의 크게 만입된 지형이 잘 나타나 있다. 1937년에 출간한 <성장하는 장항>이라는 책에는 장항항의 모습을 “항만은 수심이 6~10m로 3천톤에서 4천톤급 선박이 정박하기에 충분하고 특히 매년 강바닥을 씻어내려 깊어져가는 경향이 있다.

이 점은 군산항은 토사가 퇴적되어 얕아지는 경향이라고 일컬어지는 데 비하여 장항항은 항구로서 매우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로 보면 왜구의 500여척 선단이 정박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망산과 후망산은 서해안을 따라 오르내리는 선박과 금강을 왕래하는 모든 선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으며 이곳이 바로 660년 당나라 군사가 상륙한 기벌포이며 고려 때 쌓은 장암진성이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진포대첩을 이끈 고려 토벌부대의 총사령관인 나세 장군의 제단과 그 후손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 바로 서천군 마서면에 있다는 점이다. 이상으로 보아 진포구 전투의 현장은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일대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경인왜구의 특징은 내륙 깊숙이 침입하여 일정지역에 장기 체류하며 그들의 거점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우왕 3년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이 설치되었으며 그는 고려 조정의 지원 속에서 화약과 함께 다양한 화포를 생산하였다.

 

■ 고려 우왕대 왜구의 동향과
   최무선의 활약

김기섭(부산대학교 사학과 교수)



“왜구, 일본 통제권 벗어난 독자 세력”

왜구가 고려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종 10년(1223)의 일이었다. 1265년까지 경상남도 해안을 침범, 약탈하다가 이후 공백기를 보인다. 이후 충정왕 2년(1350) 경인년을 기점으로 그 빈도수가 높아지고 규모도 커졌으며 공민왕대에 이르러 왜구 창궐의 최성기를 이루었다.

이를 경인왜구라 부른다. 특히 갑인년(1374) 이래 왜구는 대대적으로 수백척의 선단을 지어 칩입하여 전국 각지에서 창궐하면서 고려 사회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경인왜구의 특징은 예전의 조운선이나 조창지를 겨냥한 것과는 달리 내륙 깊숙이 침입하여 일정지역에 장기 체류하며 그들의 거점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왜구 집단의 일부가 고려에 항복해 오는 사례도 주목된다. <고려사절요>에 보면 고려 우왕 원년 5월에 “왜인 등경광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다. 순천, 연기 등지에 두고 관아에서 양식을 공급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를 보면 이들의 본래의 목적은 장기 체류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공민왕 23년 고려 조정은 나홍유를 일본에 파견하여 해적들의 준동을 막아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일본은 “지금 우리나라의 서해도 일대와 규슈에는 난신들이 할거하고 있으면서 벌써 20년이나 공납을 바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쪽 바다에 있는 섬의 우매한 백성들이 틈을 엿보아 귀국을 침공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장수를 보내 토벌하고 있으며 이제 규슈만 평정되면 해적들을 금할 수 있음을 하늘에 맹서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일본 조정에서도 서해 일대와 규슈지방에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난 정치세력이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 이로 보아 규슈 중심의 남조에 협조하는 왜구 세력이 상당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왕 6년(1380, 경신년)에 일어난 진포구 전투는 왜구세력의 주력부대로 여겨지는 집단이 진포구에 배를 정박시키고 내륙으로 침입하자 고려의 군선이 이들을 공격하여 퇴각로를 차단한 전투로 최무선의 화포 공격이 주효한 해전사의 한 사건이다.

왜구들은 병선 500여척을 이끌고 진포구를 정박지로 선정하고 금강하류로 침입하였다. 이후 그들의 이동 경로를 보아 삼남지방을 약탈한 후 이곳을 내륙 약탈의 전진기지로 삼아 약탈한 곡식을 배로 운반하려 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포구 전투에서 고려군이 승리함으로써 고려는 이후 왜구와의 전투에서 자신감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해전에서 부원수로 출정한 최무선은 왜구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화약이 필수적임을 인식하고 오래 전부터 화약제조에 뜻을 두었다. 고려 공민왕은 명에 사신을 보내 왜구 체포와 근절을 위해 선박에 장착할 화약을 입수하고자 명에 요청하였다. 조선조 <세종실록>의 기사에 명의 고황제가 화약을 전해주었음을 시인하는 기사가 있다. 명 황제는 조정 대신들의 부정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요청을 수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화약은 완제품이 아니라 원료를 보낸 것으로 보이며 고려의 장인들은 염초를 고아 만드는 방법을 몰라 제대로 된 화약을 만들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무선은 이미 명에서 화약을 제공하기 이전에 원에 들어가 화약제조법을 배웠다. 우왕 3년(1377) 그의 건의로 화통도감이 설치되었으며 최무선은 고려 조정의 지원 속에서 화약과 함께 대장군포, 이장군포, 삼장군포, 질려포 등 다양한 화포를 생산하였다.

최무선의 이러한 적극적인 노력은 3년 후 우왕 6년 진포구 전투에서 그 효과를 발휘하기에 이르렀다.

 

■ 여말선초 왜구의 정체

“왜구는 명의 해민탄압으로 쫓겨온 환국교민”
재야사학자 김성호  “최영-요동정벌·이성계-사전개혁은 왜구 해결책”


    고려조 충정왕 2년(1350년 경인년)부터 조선초 1399년의 50년간 왜구는 우리나라의 전 해안에 출몰하였다. 해안 뿐만 아니라 내륙 깊숙히 쳐들어와 약탈을 하기도 했다. 100척 이상의 대선단을 이룬 것만도 11회에 걸쳐 모두 1,613척이었으며 기마병을 동원하기도 했다. 이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작은 섬나라의 해적 집단들이 50여년간 지속적으로 우리 해안을 대규모 선단을 이루어 침략할 수가 있었던 것인가.
농업관료 출신의 재야 사학자 김성호는 그의 저서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1996 맑은소리사)에서 이들의 정체를 중국에 진출해 있던 백제 교민들의 환국사태로 보았다. 그의 주장을 정리했다.<편집자>


한반도의 서남해역으로 진출한 백제는 주요 포구에 담로를 건설하였으며 이미 1세기경에 일본 규수에서 한반도의 서남해안과, 탐라, 그리고 중국의 주산군도를 연결하는 고대 해상교역권을 형성하였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구체적인 증거가 왕망의 신나라(8~23) 때 주조되었고 후한 초기(AD40)까지 사용되었던 왕망전이 제주와 김해 패총을 비롯해 북규수의 나가사키, 후쿠오카, 교토 등지에서도 출토되고 있는 것이다.

백제가 660년에 멸망하자 중국의 주산군도 및 절강성 등지에 가있던 백제인들은 모국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마치 하와이에 이민간 우리 교민들이 나라를 잃어버린 것과도 같았다. 이러한 중국 진출 교민들의 지원과 경험을 바탕으로 신라의 장보고는 거대한 해상세력을 이룰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농본국가였다. 모든 부의 창출을 농업에서 찾았으며 백제 후손들이 수행하던 국가간의 교역을 탄압하였다. 특히 강력한 통일국가가 등장할 때 탄압은 더욱 심하였다. 왕조 초기의 기상이 쇠퇴해지며 말기에는 변방에서 일어난 세력이 위세를 떨치곤 했는데 주산군도를 중심으로 한 백제 후손들은 이 때마다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원나라 말기에 들어서자 중국진출 백제 교민사회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특히 1368년에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고 이갑제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농촌 위주의 정책을 폄과 함께 주산군도를 근거지로 해상무역에 종사하던 세력을 적극 탄압하기 시작하자 이들은 본국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주원장의 적수는 망해가던 원나라가 아니었다. 총력을 기울여 해상세력을 발본색원하려 들었다. 이에 백제 교민들은 보트피플이 되어 고려로 넘어오기 시작하였다.

명초 주산군도 해민은 11만호였는데 이로 미루어 절강성, 광동성, 복건성 등지에 존재했던 교민들까지 합치면 총 교포의 수는 40여만호 200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중국 동해안 각 곳에서 해난을 일으켰으며 10여만명이 고려로 넘어왔다. 명의 태조 주원장은 이들을 '왜구'라고 이름 붙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처음에 이들을 받아들여 농토를 주고 관작을 주는 등 정착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끝없이 밀려드는 이들을 다 수용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약탈자로 변한 이들을 적극 토벌하기 시작하였다. 거기에다 명나라의 요구는 거의 약탈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왕 5년(1379) 명은 고려사신을 유폐하고 황금300냥, 은 1천냥, 말 450필, 무명 4,500필 바치라고 요구하였다. 또 우왕 8년에는 황금1백근, 은 1만냥, 무명 1만필, 말 1천필 바치라고 요구하였으며, 우왕 9년에는 지난 5년간 바치지 못한 말 5천필, 황금 5백근, 은 5만냥, 무명 5만필을 바쳐야 성의로 인정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최영 장군은 묘수를 내놓았다. 환국교민들을 군대조직으로 흡수하고 중국에 잔존해 있는 교민세력과 합세하여 명나라를 치는 것이다. 이는 골치 아픈 환국교민 문제와 명의 압박을 물리치는 묘안이었다. 이에 환국 교민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시행하면서 왜구들의 준동이 거의 사라졌다. 1388년(창왕 원년) 마침내 5만의 요동정벌군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반란으로 이 웅대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다시 왜구의 약탈이 시작됐다. 그러면 이성계는 어떻게 이 왜구 문제를 수습했는가. 그것은 고려 권문세족들의 땅을 빼앗아 왜구들에게 나누어 주어 정착을 시킴으로써 해결하였다. 이것이 사전개혁이었다.

조선 건국 후 조선 조정은 대마도와 일본으로 들어간 왜구라 불리는 이 백제 후손들에게 '대마도 정벌' 등 강경책도 썼지만 대체적으로 교린책으로 다스렸고 삼포를 개항하여 이들이 무역에 종사하도록 허가해주었다.

<정리/허정균 기자>
<사진/이강선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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