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소설가 구경욱의 귀농일기
농민소설가 구경욱의 귀농일기
  • 최현옥
  • 승인 2002.03.14 00:00
  • 호수 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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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어리 살어리랏다. 농촌에 살어리랏다”
문산에서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몇 개의 고개를 넘으면 지원리 도로변에 6백여평의 연동식하우스와 판자집이 보인다. 이곳은 귀농한지 16년된 구경욱(41·사진)씨가 농사를 지으며 소설을 쓰는 곳. 판자집에 도착하자 구씨는 장화를 신고 오이 재배에 한창인 때라 부지런히 모종을 심는 중이었다. 구씨의 집필활동을 하는 방에 들어서자 386컴퓨터와 그의 스승인 책, 그리고 아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습작물들이 쌓여 있었다.
구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갔다. 그 곳에서 대학을 나오고 직장을 다니다 적성에 맞지 않아 85년도에 귀농을 결심, 고향 은곡리로 내려와 아버지와 농사를 지었다. 처음에는 논농사와 축산을 했는데 결혼을 하고 분가를 하면서 지원리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하우스 농사를 시작했다. 청운을 품은 귀향, 결론은 처절했고 시련 속에서 마음을 잡기 위해 낚시와 난을 기르는 일로 취미를 삼았다.
그는 어느 날 「산책시정」 시집 한 권을 당시 시문농협 출하담당 지도부장 정준성씨로 부터 선물을 받았다. 시집은 한동안 방 한 켠에 던져졌다가 문득 그의 손아귀에 잡혔고 시속에서 새로운 인생의 길을 찾았다.

“잊어야 할 노래는
오가는 바람인 것을
낡은 옷깃을 여미고
돌아설수 없는 길을
누가 떠난 것일까”
-’길’ 중 일부-
‘잊어야할 노래…’ 구씨의 머릿속에 시구가 맴돌면서 그 노래를 불러내야 한다는 함성이 자꾸 내면에 감돌았다.
‘자신의 현재 괴로움과 농민들의 어려움을 질곡의 세상 속에서 잊지 말고 표현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는 흙 묻은 손으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의 다독과 고등학교 때의 영화에 대한 편집광, 그리고 치열한 현실, 이것의 3박자는 그의 집필 활동을 뒷받침해 주었고 문학성은 빨리 성장해 갔다.
구씨는 습작을 시작한지 불과 2년만인 2000년 10월에 월간문학세계에서 근친상간의 혈육애를 그린 ‘푸서리의 끝’으로 등단하였고 2001년에 ‘파적’으로 웅진문학상을 받았다.
글쓰기는 천재성보다 철저한 자신과의 싸움과 부단한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기에 낮의 고된 농사일을 병행하며 새벽까지 독학으로 문학공부를 하는 구씨는 육체적 한계를 느낄 때가 많이 있다. 하지만 자신을 절제하기 위해 편리한 자동차보다 오토바이만을 고집하는 구씨의 모습에서 문학을 향한 강한 신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경험위주의 소설을 쓰는 그에게 고된 농사일은 오히려 더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구씨의 소설은 탐미주의적인 경향이 짙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구씨가 척박한 농업 현실 속에서 아직은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은 것.
“처음에는 주위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는 구씨. 이제는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고 그런 모습을 달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구씨는 현재 서천신문에 소설연재를 하고 있으며 한백문학에도 연재를 계획중이다. 또한 5월에 단편소설 묶음집을 낼 준비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농업인으로서 소설을 쓰지만 아직은 농민소설가라는 타이틀이 어색하다”며 농민으로 남고 싶은 구씨.
그는 오늘도 ‘잊어야 할 노래’를 부르기 위해 자신과의 치열한 투쟁을 벌이며 세상에 돌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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