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사는 평화를 향하여
잘사는 평화를 향하여
  • 김승국 칼럼위원
  • 승인 2011.07.04 14:34
  • 호수 57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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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Platon)의 저서<크리톤>의 대화 중에 소크라테스가 “…우리는 그저 사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길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어 “‘잘’이란 ‘아름답게’라든가 ‘올바르게’라든가와 같다”라는 말이 나온다. 즉 ‘잘 산다’의 ‘잘’을 ‘아름답게’ ‘올바르게’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잘’이란 결국 ‘올바르게’요 ‘잘 산다’는 것은 ‘올바르게 사는’ 것이라 요약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잘 산다’는 것은 돈이나 신체나 세상의 평판이나 지위에 머리를 쓰지 않고,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자기의 영혼 즉 정신을 가장 좋은 것, 가장 훌륭한 것이 되게 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Socrates)가 말하듯이 ‘잘 사는’ 것은 ‘올바르게 사는’ 것 즉 정의롭게 사는 것(義로운 삶)이요, 자신의 영혼(이성)을 가장 훌륭한 것이 되도록 정화하는 일이다. 정의롭게 살면서 이성을 정화하는 일은 평화로운 삶을 예약한다. ‘잘 사는 평화’를 예약한다. 개인만 ‘잘 사는 평화’를 누리지 않고 사회 공동체와 더불어 ‘잘 사는 것’이 될 때 사회의 평화가 이룩될 것이다.


‘사회 공동체와 더불어 잘사는 평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동소이하게 요청되어왔다. 그럼 동양의 ‘잘사는 평화’를 살펴본다.
동양에서 ‘잘 사는 평화’의 핵심은 천(天)-지(地)-인(人)의 조화에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동양 고대의 춘추전국 시대는 전쟁·군사 지향적인 사회, 군사지향적인 사회 구성체(군사 구성체)이어서 ‘잘 사는 평화’를 전혀 보장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군사 구성체를 ‘평화 구성체’로 전환하는 일이 춘추전국 시대의 가장 큰 ‘평화의 과제’이었다. 이 과제를 풀기 위하여 중국 고대의 성현들이 ‘평화 지향적인 사회 구성체(평화 구성체)의 대안’을 내놓음으로써 ‘잘 사는 평화’의 상(像)을 제시했다.


춘추전국 시대 5백년간은 제후들이 군웅할거하며 쟁패하는 전쟁의 시대였다. 춘추전국 시대는 전쟁, 지배계급의 착취, 민중의 굶주림으로 점철된 말세였다. 춘추전국 시대라는 난세에 민중들은 전쟁과 착취로 유랑민이 되어, 도둑이 되지 않으면 자식과 스스로를 노예로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비참한 처지였다.


민중이 소망하는 태평성세란 [전쟁의 주동자인] 임금이 누구인지 모르고 아무 간섭 없이 농사짓고 우물 파서 등 따습게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래서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풍년이 들면 태평성세를 기뻐하며 격양가(擊壤歌)를 부른다. ‘격양가’는 요 임금 시절의 태평성세에 민중이 부른 노래로 인류의 오랜 소망인 무치(無治)의 사회, 즉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열망한 것이다. 전쟁이 지긋지긋하여 ‘격양가’를 부르며 평화의 세상을 꿈꾸었던 민중들. 이들의 희망을 담아 ‘평화의 담론’을 제시한 성현들의 말씀을 중심으로, 춘추전국 시대 당시의 ‘잘 사는 평화 구성체’론에 접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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