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냐?
뭐,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냐?
  • 편집국 기자
  • 승인 2011.10.17 11:16
  • 호수 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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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寬容)과 방관(傍觀).
관용이라는 말은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는 것을 뜻한다.
방관은 어떤 일에 직접 나서서 관여하지 않고 곁에서 보기만 한다는 뜻이다. 서로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지만 요즘 우리지역에서 개념이 불분명하게 쓰이고 있다. 당연히 잘못을 꾸짖어야 하는 일에도 주민들은 너무나 너그럽다.
오히려 잘못된 행태를 지적하는 사람들을 독하다고 말하고 선을 그어 버린다.


최근 전·현직 공직자가 주민들의 숙원사업에 자신들의 부를 쌓기 위한 이권 따른 칼을 들이댔다고 야단들이다.
이들의 행위로 인해 소득 증대를 위해 장례식장을 매입하려 했던 주민들의 허탈감과 상실감이 전체 공직자들에 대한 분노로 확산 되고 있다. 물론 생각이 짧고 잘못된 자들의 행위도 문제지만 이 모두를 그들의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주민들의 책임도 크다.


끓는 물에 개구리를 넣으면 바로 튀어나오지만 찬물에 넣고 서서히 온도를 높이면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과학적으로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알려졌지만 뚜렷한 소신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무기력한 사람들에게 교훈적인 사례로 널리 쓰이고 있다.
부조리가 판치는 사회에서 현실에 안주하고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도덕적 해이가 몸에 배이게 마련이다.
선거운동을 하면서 오로지 당선만을 위한 사탕발림에 속은 것도 우리의 잘못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들의 사사로운 잘못을 눈감았던 것도 우리 주민들이기에 남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우리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는 자괴감을 감출 길이 없다.


실제로 이번 거사(?)에 앞장섰던 자들은 공직자 또는 이른바 사회 지도층이기 이전에 오래전부터 부동산 투기와 사채업 등으로 부를 축적했던 사람들이고 주민들 대부분도 이러한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나무라기 전에 주민들부터 반성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이제부터라도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
지나친 관용이 부조리를 키운다는 것을 되새겨야 한다.
다음 선거에서 심판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은 또 다른 부조리를 키울 수도 있다.


주민들은 그릇된 생각으로 공무를 수행하는 파렴치한 자들을 심판해 자신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
너그러움은 적어도 부조리한 공인들에게 베풀 도량은 아니다. 게다가 서민들이 아닌 토호 기득권층에게 주민들이 아량을 베풀 일은 더더욱 없다. 우리는 어느 덧 주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머슴이 되겠다던 자들에게 노예가 되어 가고 있다. 그들의 돈타령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흥을 돋우며 추임새까지 맞추고 있다.
자신들의 위치를 모르고 권리를 찾지 못한다면 주권재민은 그야말로 백년하청일 수 밖에 없다.
오늘의 부조리를 눈감아 버린다면 우리가 사랑하고 아끼는 후세들에게 부끄러운 어른들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주민들을 이제라도 주인을 무시하고 날뛰는 무뢰한들을 심판해야 한다.
관용은 만사가 아니며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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