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생각
그대 생각
  • 신웅순 칼럼위원
  • 승인 2011.12.19 13:47
  • 호수 5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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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께서는 ‘글을 쓰면 가난하게 사느니라.’ 라고 타이르듯 늘 내게 말씀하셨다. 선비들이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으면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싶다. 나는 시를 잘 쓰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천부적으로 타고 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서예였다. 내딴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한글 서예가가 되고자 했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모한 결심이었던 같다. 대학을 갓 졸업한 약관의 나이에 서예가 무엇인지 알고나 한 짓인지 참으로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1975년 12월 1일 월간 서예주최 제 2회 전국법첩 임서대회에서 한글 흘림으로 입선했다. 이것이 전국 휘호 대회에서의 나의 최초의 기록이었다. 그것이 평생 나의 발목을 잡을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1973년 7월 5일 월간서예사 발행 『월간서예』창간호 맨 뒷장에 나의 이런 결심이 써 있었다. 40년 묵은 조금은 빛 바랜 파란 볼펜 글씨였다.
‘1973년 11. 8일 愛
이 책을 사서 얼마나 기뻣는가는 앞으로 내 글씨의 수준으로 평가하리라.                                                     
웅순
까마득 잊은 문구였으나 내 가슴 속에는 그 동안 학문을 하면서도 그 생각만은 뜨겁게 간직하고 있었다. 어언 40년 세월이 가까워온다. 이제사 나는 한글 서예 초입에 들어섰다. 국전 초대 작가가 뭣이길래 이렇게 평생 큰 바위를 가슴에 안고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그것 하나 따기 위해 나는 그 많은 세월을 죽이면서 전통 궁체에만 붙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난 세월들에게 어떻게 하면 다시 돌려줄 수 있을까 미래에 치룰 혹독한 댓가를 생각해본다.
명함에다 내 시조의 일절 ‘소리도 적막도 없는 그리운 그대 생각’을 썼다. ‘소리도 적막도 없는 그리운’은 궁체 정자이고 ‘그대 생각’은 자유체이다. 내가 쓰고 싶은 서체를 개발해보려는 나의 작은 흔들림의 시작이었다. 조금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나의 무언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우리 한글을 아름답게 쓸 수 있을까. 그 아름다운 한글로 어떻게 하면 우리의 국격을 고양시킬 수 있을까. 이제는 그것이 내게 화두가 되었다.
본의 아니게 나는 학문과 예술을 함께 해왔다. 서예 40년이라면 그래도 적지 않은 세월이다. 나는 박사 취득을 위해 또 많은 시간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래서 십여년을 서예에 대한 아픈 가슴 앓이를 해왔었다. 이제 무거웠던 바위 덩이 하나는 내려놓은 셈이다. 얼마 후면 학문이라는 큰 바위 덩이도 내려놓아야겠다.
 나를 만나러 가야할 때가 온 것 같다. 만날 수야 있겠느냐만 그래도 하고 싶었던 예술이라 그 중 낫지 않은가 싶다.
잎새 한 장도 얼마 남지 않았다. 참으로 세월이 빠르다. 순간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잘 못 살면 사람들에게, 내게, 지난 세월에게 죄를 짓는 것이 아닌지 와락 겁이 난다. 기도하듯 낮게 낮게 살아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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