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여러 빛깔
우정의 여러 빛깔
  • 정해용 칼럼위원
  • 승인 2012.03.05 10:24
  • 호수 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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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포지교(管鮑之交)는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 대부인 포숙과 관중 사이의 교우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당시 중국 대륙에는 유명무실한 주(周)나라 황실 아래 200개 넘는 군소 국가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그중 ‘군주’라는 명칭이 어울릴 만큼 큰 제후국은 5~6개에 지나지 않았다. 제나라는 BC 600년 무렵 환공(齊 桓公)이 다스릴 때 국력이 강성하여 마침내 제후국 가운데서도 맹주가 되었다. 환공의 재상으로서 그러한 부국강병을 이끈 사람이 바로 관중이다.
그러나 관중은 본래 환공이 왕위 승계권을 두고 이복형제인 규(糾)와 경쟁할 때 규의 편에 들었던 사람이다. 유혈 경쟁을 통해 환공이 먼저 도성을 차지하자 왕자 규와 그의 측근들은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
그때 환공의 일등공신인 포숙이 간언하였다. "제나라를 차지한 것으로 만족하시겠다면 모두 죽이셔도 됩니다. 그러나 장차 천하를 손에 넣기를 원하신다면 반드시 관중을 얻으셔야 합니다."


환공이 그 말을 따라 관중을 중용하자 관중은 환공이 꿈꾸는 개혁정치를 완성시켜 제나라를 최강의 제후국으로 이끌었다.
포숙은 관중을 자신보다 높은 직위에 천거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비판이 일어날 때마다 스스로 방패가 되어 관중을 옹호했다.
사실 관중은 능력에 비해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성공하여 뭇 백성의 존경을 받게 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예전에 곤궁할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늘 이익을 더 많이 차지하곤 했으나 포숙은 비난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숙을 돕다가 잘못되어 그를 곤경에 빠뜨린 일도 있지만 포숙은 나를 책망하지 않았다.


내가 벼슬길에 나선 이래 세 번이나 자리에서 쫓겨났지만 포숙은 비웃지 않았다.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세 번이나 전투에 나가 세 번 다 도망을 쳤는데 그래도 포숙은 내게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나에게 노모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왕자 규가 패하여 죽을 때 나는 죽지 않고 포로가 되는 굴욕을 당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수치도 모르는 자라고 여기지 않고 감싸주었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바로 포숙이다.
친구의 숨은 능력까지 알아보고 무한히 믿어주는 포숙의 우정이 아니었으면 관중은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여 관포지교의 고사를 읽는 이들은 한결같이 관중보다는 포숙에게 존경을 보내는 것이다.
우정에는 여러 유형이 있고, 여러 색깔이 있다. 주는 만큼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이도 있고 무엇이든 주어도 아깝지 않은 친구가 있다.
하는 말을 절반쯤 경계하고 들어야 하는 사이도 있고 무슨 말이든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이도 있다.
현대인들은 이웃이나 친구를 은연중 경쟁상대로 여기고 사는 경우가 많다. 일상에서 느끼는 긴장과 피로의 원인이 여기 있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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