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전쟁 중?
대한민국은 전쟁 중?
  • 장호순/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승인 2012.03.16 22:42
  • 호수 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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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한민국 사람들은 한손에는 총을 들고 쏘아대고, 또 다른 손에는 호미를 들고 텃밭을 일구고 있다. 적어도 언론보도를 보면 그렇다. 4-11 총선을 앞두고 전국 각지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고, 그 와중에도 “텃밭” 가꾸느라 분주하다는 것이다. 일간신문, 인터넷신문, TV방송 등 매체의 종류를 불문하고, 그리고 보수-진보 이념을 불문하고 한결같이 그렇게 보도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2월 28일자에서 <독립선거구 된 세종시 최대 격전지 부상>이라는 제목으로 “양보할 수 없는 한판”이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필자는 세종시 인근 충남 아산에 살고 있지만, 전쟁을 피해 이주해오는 피난민들을 아직 발견하진 못했다. 오히려 부동산으로 한몫보려는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 세종시라고 한다. 언론보도만 본다면 전쟁 중에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KBS>에 따르면 부산이 총선 최대 격전지이며, <동아일보>는 “낙동강 전투”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도했다. 수도권에서도 여기저기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일보> 3월 11일자 기사에 따르면 서울의 도봉구와 서대문구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고, 서울 외곽 경기 군포에서도 “초접전”이 벌어지고 있다.


<경향신문>은 서울 중구-종로 지역구를 시작으로 <총선 격전지를 가다>라는 기획시리즈를 시작했다. 지난 주말 필자는 오랜만에 서울 종로거리를 걸어보았지만, 총알이 스쳐 지나가지도 않았고, 포화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기저기 긴 행렬이 형성되었지만 피난민들이 아니라, 한잔에 4000원짜리 카페커피를 사러 길밖에까지 늘어선 직장인들이었다.


심지어는 정확하고 공정하게 유권자 중심으로 보도하겠다는 신문의 약속에서도 전투용어가 사용된다. <대전일보> 3월 12일자 사고(社告)는 “총선의 향배를 결정하게 될 격전지를 선정해 인물과 정책, 이슈 등을 심층 취재 보도해 선거에 대한 유권자의 관심을 높이겠”다고 선언했다. 도대체 세계 어느 나라 언론사들이 국민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자기 나라를 전쟁터라고 보도할까?


언론보도에 따르면 한국사람들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농사는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런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농부들이 아니라 정치인들이다. <SBS>에 따르면 부산지역은 “새누리당의 전통적인 텃밭”이다. 박근혜 대표와 그의 측근들이 부산시내 어디엔가 숨겨둔 농장이 있다는 얘기인가? <MBC>에 따르면 민주통합당이 호남지역에서 현역의원 6명 탈락시킨 것은 "텃밭 물갈이"이다. 광활한 호남평야와 광주직할시가 한명숙 대표의 전원농장인가?


“격전지”와 “텃밭”이라는 용어가 선거보도에 무차별 사용되는 것은 언론이 선거와 지역에 대해 심히 왜곡된 관점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맞아, 지금 우리 지역에선 전쟁중이야! 우리는 텃밭의 채소야!”라고 맞장구치는 유권자들은 서울에도, 경상도에도, 전라도에도, 충청도에도 없을 것이다. 지금 유권자들은 그저 누가 와서 뽑아주기를 기다리는 무기력한 무 배추가 아니라, 무 배추만도 못한 정치인들을 솎아내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


총선은 잔혹한 전쟁도 아니고 소일거리 농사도 아니라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선거는 국가와 지역 그리고 개인의 운명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중요한 선택이다. 권력을 잡기위한 경쟁이지만, 총칼이나 미사일대신, 국민다수의 선택에 승복하는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경쟁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언론은 선거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폄하했던 군사독재정권시절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유권자들이 언론보도 보다는 인터넷이나 SNS 등을 통한 선거정보를 더 선호하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릇된 선거보도 관행을 솎아내지 못하는 언론사들은 머지않아 그들 스스로가 텃밭의 철지난 채소로 전락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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