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관계를 돈독히 하는 ‘대안화폐’
이웃 관계를 돈독히 하는 ‘대안화폐’
  • 박병상 칼럼위원
  • 승인 2012.10.29 12:55
  • 호수 6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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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의 기쁨을 누릴 농부들은 황금빛 들녘을 위해 봄부터 얼마나 많은 땀방울을 흘려왔을까. 그래서 그런가. 조상은 밥 한 톨에 농부의 땀 99방울이 들어 있다고 했다. 장마 끝나고 거듭 찾아온 태풍을 용케 견딘 황금 들녘에서 농부들의 마음은 얼마나 뿌듯할까. 하지만 농부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소쩍새가 그리 울고 천둥이 또 그렇게 울었건만, 손에 쥐어진 소득은 보잘 것 없기 때문이다.


출하를 앞둔 사과와 배 같은 과일이 태풍으로 떨어지면 농부의 가슴은 얼마나 미어질까. 봄부터 힘겹게 가꿔왔던 과일을 시장에 내놓기 전에 버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간 들어간 비용은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나. 그래도 유기농업으로 과일을 생산한 농부들은 손해를 다소 덜어낼 수 있었다.


낙과를 구입하겠다는 소비자들이 전국에서 나섰기 때문인데, 생산가 이하로 책정된 쌀 수매가에 절망한 농민들은 어디 하소연할 곳이 없는 모양이다. 과격한 분노는 고개 숙인 벼를 논에서 불태우거나 농기계로 갈아엎는다. 밥을 먹어야 하는 소비자들은 그 쌀을 구입하고 싶어도 구입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돈이 필요한 농부는 황금빛 들판을 일궈놓고도 노력에 상응할 대가를 받지 못해 상실감이 크다. 영농자금이 적지 않게 들어가는 농부도 각종 공과금과 세금, 자식의 학자금과 의식주에 들어가는 비용이 적지 않다. 돈이 당연히 필요한데 수확한 농작물을 정부의 수매에 기댈 수밖에 없으니, 농부들은 봄부터 빚으로 시작하기 일쑤다. 농부에게 물리는 농협의 이자가 아무리 적어도 해마다 빚이 누적되니 부담이 줄어들지 않는다. 기껏 수확해도 빚 갚으면 남는 게 없다. 그런 상황은 개설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정부의 수매가마저 생산비보다 나을 게 없다면, 농부의 과격한 분노는 고개 숙인 벼를 짓밟고 싶을지 모른다.


일본도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모양인데, 한 청년가 기지를 발휘했다. 농부도 살리고 도시의 소비자들을 돈독하게 하는 길을 찾아 실험한 것이다. 이른바 ‘쌀 본위 화폐’다. 쌀 본위?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면 ‘금 본위 화폐’를 생각하면 된다. 교환 수단으로 금을 가지고 다니기 위험하므로 세공사에 맡기고 그 보관증을 금 대신 가지고 다는 게 금 본위 화폐의 기원이라면 쌀 본위 화폐는 가을에 받을 쌀의 가치를 근거로 발행하는 돈이 된다.


많은 사람이 갖고 싶어하는 금이 종이에 기록된 돈의 가치를 정했듯, 우리가 주곡으로 먹는 쌀이 가치를 정하는 돈을 말한다. 금은 없어도 살아가는데 별 지장이 없지만 쌀은 아니다. 쌀은 있지만 돈이 없는 일본의 농부를 돕는 지역화폐를 일본의 한 청년이 창안한 것이다.


춘천에서 우리도 쌀 본위 화폐를 시작했다. 쌀은 가을에 수확하므로 그에 상응하는 화폐를 농부가 지역에서 대안으로 발행하면, 그 돈을 일상생활에서 요긴하게 사용하기로 회원을 모집한 것이다. 그 돈은 쌀을 받을 때까지 지역의 회원 사이에 유용하게 소통된다. 생활협동조합에서 생활재를 구입해 식구와 먹을 건강한 밥상을 차릴 수 있고 서점에 가서 대안화폐를 이야기하는 책을 구해 읽을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대안화폐를 같이 사용하는 회원들이 때때로 회원이 운영하는 식당에 모여 의기투합할 수 있고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다. 삶이 지역에 뿌리 내릴 때 회색도시에서 빈번한 사이코패스와 같은 범죄가 발생하지 않고 진정한 복지가 완성된다는 강연을 회원과 함께 듣고 쌀 본위 화폐를 강사료로 제공할 수 있다. 춘천의 쌀 본위 화폐는 ‘이삭통화’로 명칭을 정했다.


대안화폐 명칭은 그 의미에 비해 중요하지 않지만, ‘이삭’이라는 말은 그 쌀 본위 화폐의 이상을 잘 담았는데, 대안화폐는 지역에서 통용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쌀 본위 화폐도 마찬가지이고, 대부분의 대안화폐는 이웃을 돈독하게 한다. 쌀도 식당도 종업원도 있는데 단지 정부나 은행이 보증하는 통상의 돈이 없기에 소외될 수밖에 없는 일을 공동체 안에서 극복하게 만든다. 얼굴을 마주하는 회원들이 같은 마음으로 교환하는 따뜻한 돈이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 대안화폐는 지역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아야 의미를 제대로 살릴 수 있다. 얼굴이 있는 화폐를 교환하며 우정과 신뢰를 쌓아가는 만큼 희로애락을 공유한다.


확장된 대가족이 되어 따뜻한 복지를 만들어갈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돈은 사실상 빚을 근거로 한다. 대출로 구한 돈으로 물건을 만들어 팔아 종업원 월급도 주지만, 누군가 이자를 내야하는 빚이다. 한데 세상을 도는 돈은 이자를 갚을 정도로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남의 돈을 빼앗거나 다시 빌려야 하고 이자는 더 늘어난다. 일종의 의자 빼앗기 놀이와 같은 돈의 굴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면 우정과 신뢰로 교환하는 지역의 대안화폐가 제격이다. 빚으로 일구는 논밭이 아니라 우정으로 환대하는 황금벌판은 훈훈해질 수 있다. 땅도 내일도 건강해질 것이다.
(인천도시생태연수고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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