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동덕(共感同德)
공감동덕(共感同德)
  • 장인식 칼럼위원
  • 승인 2013.03.11 15:48
  • 호수 6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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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동감 넘치는 요즘이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변화도 그러하지만 풋풋한 신입생들이 입학(入學)을 했다. 과연 무엇을 위해,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부푼 꿈을 안고 배움을 시작하고 있다.
요즘의 개학 풍경이다. 게다가 초등, 중등, 고등교육으로 구분되는 학교교육만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 등을 포함하고 연령에 한정을 두지 않는 전 생애에 걸친 평생교육까지라면 그 범위는 매우 넓어지기도 한다.
살아가는 평생, 배워 나가야 하는 것이 오늘날의 추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배움이란 주위에 널리 깔려 있어 이삭 줍듯 먼저 허리 굽혀야 한다는 표현도 있는가 보다.


그렇다면 가르침은 어떠할까? 누가 누구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일정한 자격을 갖추고 학생을 지도하는 사람만이 가르칠 수 있는가? 평생학습시대라면 누구나 교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직·간접으로 강단에 서왔던 30여년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엉뚱한 스스로의 질문에 당황해진다. 진짜 내가 어떻게 무엇을 배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단 말인가? 단지 얄팍한 지식전달자로서의 직업인은 아닌가도 생각해 본다.


갑자기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면 모두 구렁텅이에 빠진다는 말이 떠오른다. 혹시 내가 장님을 쫓아다니다 익숙해진 또 다른 장님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를 믿고 뒤따라오는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잠시 봄기운에 휩쓸린 몽상이라 할지라도 왠지 오싹해진다. 솔직히 이러한 생각은 이번만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이맘때가 되면 줄곧 되풀이 하며 고민과 반성, 다짐을 해보는 내용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나만의 사자성어도 등장한다.


처음엔 전공(문화관광)에 맞는 관국지광(觀國之光)으로 결론지었다. 다른 국가(지역)에서 훌륭한 것(光)을 찾아본다는 관광의 어원이 바로 그것이다. 이어서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남들 다하는 것은 하되 나만의 독창성을 찾아보자는 취지였다.
연이어 같은 것은 추구하되 서로 다른 것은 존중하자는 구동존이(求同存異)로써 표준화와 차별화의 단점을 극복해 보기도 하였다. 이후엔 미감쾌청(美感快靑), 식신생재(食神生財)와 같은 세분화된 외식산업의 성공조건으로 가르치려 했던 것 같다.


어떤 일이든 끊임없이 노력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 널리 문호를 개방하여 사리에 밝고 예절을 잘 지키자는 박문약례(博文約禮), 구름 너머로 푸른 하늘이 있다는 희망의 운외창천(雲外蒼天)도 활용하였다.
나눔과 베품을 강조해 보았던 은광연세(恩光衍世), 아무리 급하다 해도 기본에 충실하자는 근고지영(根固枝榮)도 강조해 보았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온화한 성격과 부드러운 인성이 경쟁력 있겠다는 생각에서 온유돈후(溫柔敦厚)를 중심삼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올해엔 무엇으로 결정할까 고민 중에 마침 동감(同感)과 공감(共感)의 차이를 깨닫게 되었다. 동감이‘같게’느끼는 것이라면, 공감은‘함께’느끼는 것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인 둘’이 아니라 ‘둘인 둘’즉, 단일체(單一體)가 아닌 공동체(共同體)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알게 모르게 나 역시도 일종의 동일성을 중심으로 표준화된 일체감에 익숙해 져 왔던 건 사실이다. 집단문화에 묻혀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는 당위성 속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처럼 당당히 요구하고 있는 태도로써 말이다.


세태가 변하는 줄도 모르고 나만 따르라고 소리 지르고 있다. 나만이 옳은 길이요, 아니꼬우면 너도 해보라는 식으로 강요 아닌 강요까지 해본 적도 많다. 하지만 불리해지면 공동책임 속으로 살짝 숨기도 했다.
그랬기에 주위에 많은 피해도 주었을 것이고 당한 것 같기도 하다. 특히 가장 만남 빈도가 높았던 가족과 직장이 그러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믿음과 소망, 사랑은 조금씩 무너져가고‘내려놓음’이란 그럴싸한 명분 속으로 숨어버리려 한다.


이 모든 것들이 개인적인 견해일지라도 아무튼 원인을 알았으니 이젠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 만약 내가 장님이었다면 뒤따르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때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같은 존재다움’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송정보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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