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로, 교육자로 평생 바친 장만용 목사
목회자로, 교육자로 평생 바친 장만용 목사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3.03.25 15:07
  • 호수 6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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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 맡아

▲ ‘월남 이상재 선생 기념사업회’ 신임 이사장 장만용 목사
최근 ‘월남 이상재 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장만용 목사로 바뀌었다. 서천군문화원의 업무에 충실하기 위해 더 이상 연임을 하지 않겠다는 조순희 전 이사장의 의사에 따라 장 목사가 추대된 것이다.
<뉴스서천>이 지난 19일 장만용 목사를 한산면 지현리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지역에서 목회자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평생을 바쳤다. 84세(1930년생)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기억으로 그가 살아온 얘기를 들려주었다.


“뉴스서천이 씨를 뿌렸고 조순희 원장이 어려운 일을 맡아 잘 해냈어. 큰 인물을 배출했음에도 지역에 변변한 동상 하나 없었거든. 오거리에 세워진 동상을 보면 이제야 자괴감이 좀 수그러드는 것 같아.”
장항 출신으로서 장항초등학교-군산상고-한국신학대학교 신학과-고려대학교 대학원(교육학 석사)을 거친 그는 1960년대 초 월남 선생이 설립한 종지리 교회 당회장 목사로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지나고 보니 아쉬운 게 있어. 그 종지리 교회를 헐지 말았어야 했어. 그대로 두었더라면 교회사적으로 문화재가 되었을 거야.”


종지리 교회는 논산 등지에서 고가를 헐 때 나온 큰 대들보, 서까래 등 훌륭한 재목들이 들어갔는데 ㄱ자형으로 설계됐다 한다. 남녀가 유별한 유교 전통이 강한 시절인지라 한쪽엔 여성, 한쪽엔 남성들이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설계한 것이다. 목사는 중앙에 서서 한번은 여성 쪽을, 한번은 남성 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설교를 했다고 한다.


이 교회를 헐고 다시 짓자는 의견이 일어 1965년도에 청와대의 지원금 20만원을 받아 다시 지었다 한다. 청와대의 지원을 받아내는 데에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이었던 이갑성의 역할이 컸다고 전한다.


성실중학교 설립자인 그는 교육자로 더 오랜 기간 동안 정열을 바쳤다.
“1956년도에 한산교회에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을 모아 강의록을 통해 중학교 과정을 가르쳤지.”
‘신종독서회’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처음 5명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50여명으로 불어났다. 한창 짓궂은 장난이 심한 아이들이 예배당 이곳저곳을 뛰어다녀 신성한 교회가 난장판이 되곤 했다. 그는 밭 한뙈기를 사들여 학생들과 함께 학교를 지을 흙벽돌을 찍기 시작했다. 3만5천여장의 벽돌을 찍어두었는데 늦가을 비에 몽땅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가 믿던 하나님을 원망하며 통곡을 했다.


그는 장항제련소를 찾아가 제련 후 남은 슬러지를 얻어내기에 이르렀고 이를 이용해 교실 3칸을 마련해 ‘한산고등공민학교’의 문을 열었다. 1960년 1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4회 졸업생까지 배출하고 한산고등공민학교는 성실중학교로 바뀌었다.


성실중학교가 탄생한 이면에는 그의 표현대로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기적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그는 당시 대농으로 알려졌던 김영일씨를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논을 모두 자신의 명의로 돌려줄 것을 부탁했다. 이를 팔아 재원을 마련해야 학교법인을 설립할 수 있는 것이다. 평소 구두쇠로 이름이 높던 김영일씨가 “장 목사가 하는 일이니 돕겠다”며 선뜻 논 60마지기를 내놓았다. 그래도 규정 금액에는 미달돼 추가로 상가 건물과 밭 2천평까지 전 재산을 내놓았다. 그래도 모자라 금융조합직원이었던 이천구씨의 소개로 연봉리 사는 이문복씨가 정미소를 내놓았다. 그래도 모자라자 철공소 주인이 철공소를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1964년 1월 인가가 나 이 해 3월 개교를 하게 되었고 첫 입학생을 받았다.


장 목사는 어려움 속에서도 약속을 지켜 5년 후에 김영일씨의 재산을 전부 되찾아 주었으며 이후 나머지 정미소와 철공소도 되찾아주었다. 여기에는 한산에서 기예전문학교를 설립해 양재, 편물, 미용, 수예 등을 가르쳤던 부인 이종분 여사의 공이 컸다.
“계를 들고 계타서 논 빼주고 나중에 밭 2천평까지 다 빼주었어.”


그는 2004년도에 교육·문화 부분에서 새서천대상을 받았으며 현재 한산어린이집과 한산노인대학으로 이어졌다.
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는 큰 교회를 감당할 수 없어 부여 양화면에서 신도 몇몇과 함께 방안교회를 여는 등 목회 활동도 이어갔다.


1990년도 중반 들어 학생수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서천군내 학생 수 조사를 해보니 3년 후에는 5개 학급이 3개 학급으로 줄게 돼 있는 거야. 그렇게 되면 교사 수를 줄여야 해.”
군 학무과에 월급을 두 사람 줄인 만큼 덜 받을테니 교사 수는 유지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처럼 교사들을 감원해야 하는 상황에서 1999년 사학 관련 교육법 개정이 있었다. 인구가 줄어드는 농어촌 학교에서 사립학교가 폐교를 신청하면 교원들을 공립학교에서 전원 받아들이고 재산은 설립자에게 환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장만용 목사는 고심 끝에 폐교 신청을 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그가 피땀으로 일구어낸 성실중학교 40년 역사는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학교 교훈도 “한 알의 밀알이 되자”였다고 한다.


“민족의 영원한 스승인 월남 선생은 묘소가 본래 한산에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1957년 이장하도록 지시해 지금 서울 외곽 낯선 곳에 있습니다. 다시 한산으로 환장해야 합니다.”
그는 월남 선생을 다시 서천에서 모실 뜻을 조심스레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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