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친구인가
우리는 어떤 친구인가
  • 정해용 칼럼위원
  • 승인 2013.04.01 16:04
  • 호수 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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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관계를 나타내는 말 가운데 ‘상마지교(桑麻之交)’라는 말이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일본어 사전에만 나온다. 그 뜻을 풀이하면 ‘농촌에서 저물어가는 사람들끼리의 차분한 교제’ 정도로 해석되는 말이다.
‘상마’란 말은 뽕나무와 삼베를 일컫는 것으로, 누에치고 길쌈하며 사는 소박한 시골의 삶을 비유한 것이다. 소동파(蘇東坡)라 불리운 중국 송(宋)대의 시인 소식(蘇軾)의 시에 거칠고 황량한 시골풍경을 묘사하여 ‘상마지야’(桑麻之野)라 칭한 표현이 등장한다. ‘뽕나무와 삼베가 자라는 벌판’으로 해석하면 될 터이지만, 내용인즉 그것 외에는 별다른 산업이 없는 빈한한 시골이란 뜻이다.


한 시대의 손꼽히는 학자인 동파가 이렇게 거친 ‘상마지야’에 가게 된 건 정치적 이유 때문이다. 뛰어난 재능으로 20대부터 중앙에 진출해 벼슬을 했던 동파는 당시 왕안석(王安石) 등 개혁파가 주도하는 제도에 맞서 비판을 자주 하다가 여러 번 시골 오지로 좌천됐다.


시골일망정 수령으로 가는 것이니 형벌의 형태는 아니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산촌 오지로 좌천된다는 건 사실상 유배나 다름없었다. 길조차 제대로 나있지 않아 수일 동안 걷거나 말을 타고서야 닿을 수 있는 오지의 수령으로 가게 되면 다시는 대처로 나가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교통 통신이 발달되지 않은 그 옛날에는 이렇게 유배지로 떠난 뒤에 거기서 늙어죽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중앙무대에서도 알아주는 문인으로, 벼슬아치로 명성을 떨치던 동파가 그 거친 시골, 그것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객지로 가게 되었을 때 심사는 어떠했을까. 동파는 처음 부임했을 때의 막막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궁실의 아름다움을 버리고(중략) 뽕나무와 삼베가 자라는 시골을 거닐게 되었다. 처음 부임했을 때는 해마다 흉년이 들어 들에는 강도가 들끓고 송사는 끊이지 않으며 부엌은 쓸쓸하여 날마다 푸성귀만 먹고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즐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 마침내 이 생활에서도 즐거움을 찾아낸다. ‘그로부터 일 년이 되자 나는 오히려 살이 찌고 하얗던 머리도 갈수록 검게 되었다. 나는 이곳 풍속이 순박한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아전과 백성들 또한 졸렬한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밭 북쪽에 누각이 있는데, 조금 손질하여 꾸민 후에 사람들과 자주 올라와서 멀리 경치를 구경하며 회포를 푼다. 밭에서 야채 뽑고 못에서 고기를 낚고 차조로 술을 빚고 조밥을 지어 먹으니, 한가함이 정말 좋구나.’ (소동파 시 ‘超然臺記’)


아직 젊은 시절에는 이러한 한가함에서 즐거움을 느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욕망이든 야망이든, 차오르는 꿈을 좇아 산전수전을 다 겪어낸 뒤에라야 ‘상마지야’에 머물더라도 마음을 초연히 가다듬으며 ‘정말 좋구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모교인 서천초등학교가 개교 100년을 넘기면서 총동창회가 조직되고 졸업 회차별 동기회도 재정비되었다. 덕분에 잊고 지내던 동창들끼리 서로 소식을 알게 되었고, 경조사를 계기로 얼굴도 다시 보게 된다. 수십 년만의 재회지만 낯설음도 잠시, 아무개라는 이름만 들으면 그 아득한 코흘리개 시절의 기억들이 순식간에 돌아와 이내 편안한 친구 사이로 돌아오게 된다. 서로 때리고 맞으며 지내던 사이일지라도, 무엇인가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사이일지라도, 이제 와서는 그저 반가움과 서로를 위한 걱정의 마음뿐이다. 가난하던 옛날일지언정, 누추한 고향일지언정, 오직 서로를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반기며 품어주니, 이것이 바로 저물녘 차분한 마음으로 나누는 ‘상마지교’의 넉넉함이 아니고 무엇인가(물론 어린 시절의 우정을 빙자하여 죽마고우를 곤경에 빠뜨렸다는 사람들의 얘기도 얼마든지 있지만, 그런 것은 우정의 축에도 낄 수 없는 일이니 감히 논외로 하자).


우울한 편으로 살았던 헤르만 헤세의 한 귀절이다. “나의 천성적으로 우울한 습성을 고쳐 나의 청춘시절을 다치지 않고 신선하게, 새벽처럼 유지시켜준 것은 결국 우정뿐이었다. 지금도 나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의 성실하고 훌륭한 우정만큼 멋진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고독할 때에, 청춘에의 향수가 나를 엄습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학창시절의 우정 때문일 것이다.”
서로의 처지나 과거나 종교나 사상 같은 구차한 차별들을 다 넘어서서 서로에게 신뢰와 인정으로 다가가게 만드는 순수한 우정이란 얼마나 따뜻한 위안인가. 그렇다. 순수한 우정이란 일종의 구원이기도 한 것이다.  

 <시인/ poet@coolwis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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