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 빨간 거짓말 (5/18)
하얀 거짓말, 빨간 거짓말 (5/18)
  • 정해용 칼럼위원
  • 승인 2013.05.20 14:04
  • 호수 66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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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가로되 “내 연기(年紀)를 말할 양이면 육갑을 몇 번이나 지내었는지 모를 터이오. 소년 시절에 월궁에 가 계수나무 밑에서 약방아 찧다가 유궁후예의 부인이 불로초를 얻으러 왔기로 내가 얻어주었으니 이로 보면 삼천갑자 동방삭은 내게 시생이요, 팽조의 많은 나이 내게 대하면 구상유취요, 종과 상전이라. 이러한즉 내가 그대에게 몇십 갑절 할아비 치는 존장 아니신가.”


자라가 가로되 “그대의 말이 자칭천자라 하는 것과 다름이 없도다. 아모커나 나의 이왕 한 일을 대강 말할 것이니 좀 들어보아라. 반고씨 생신날에 산곽 진상 내가 하고, 천황씨 등극하실 때에 술안주 어물진상 내가 하고, 지황씨의 화덕왕과 인황씨의 구주를 마련하던 그 사적을 어제까지 기억하며, 복희씨의 그은 팔괘로 용마 하도수를 나와 함께 풀어냈고, (중략)그러나 저러나 재담은 그만두고 세상 재미나 서로 이야기하여 보세.”


옛 설화소설 ‘별주부전’은 토끼와 자라의 걸쭉한 입담과 허풍으로 시작된다. 무슨 토끼의 나이가 삼천갑자 동방삭을 시동으로 부리고 삼황오제 시절의 신선 팽조를 구상유취하달만큼 많겠는가.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이러한 진술이 참이냐 거짓이냐를 굳이 따지지 않는다. 여기서 참이냐 거짓이냐를 따지기 시작하면 이 이야기는 무의미해진다. 참이 아닌 허풍이야말로 ‘별주부전’이 재미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런 거짓말은 농담(Jocose lie)에 속한다. 애당초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이야기를 진실로 믿게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며, 오히려 꾸민 얘기인 것을 드러내놓고, 꾸밈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거짓말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언어심리 연구자들은 그 종류를 스무 가지 이상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허풍이나 농담에 사용되는 가벼운 거짓말은 세상을 유쾌하게 만들고, 토끼가 살아나오기 위해 용왕을 속이는 것처럼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꾸며내는 거짓말에는 아릿한 절박감이 있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선의의 거짓말(하얀 거짓말)도 있는데, 이를테면 정부 당국자나 어떤 조직의 책임자가 국민을 안심시키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진실을 유보하거나 비밀에 부치는 하는 식의 거짓말(Noble lie) 같은 것이다. 경제위기나 안보상의 위험에 대하여 정부가 발표하는 수치나 장담에는 거의 언제나 거품이 덧씌워져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항시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불가피한 선의의 거짓말을 빙자하여 간혹 그들의 무능이나 불법한 행위를 감추기 위한 악의적 거짓말이 행해질 여지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남을 속여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는 ‘시커먼 거짓말’이나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거나 사회를 기만하는 ‘새빨간 거짓말’(사기)은 나쁜 거짓말 중에서도 가장 질이 나쁜 사회악이다.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청와대 대변인이라는 사람이 술에 취해 지저분한 성추행 사건을 일으켰다. 우리 사회가 술로 인한 실수에는 아무리 관대하다 해도, 그가 자신을 변명하려고 자청해서 가진 기자회견의 내용은 오히려 그 자신을 더욱 용서받기 곤란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 내용이 거짓으로 일관됐을 뿐 아니라,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윗사람들까지 물고 늘어져 인간적 예의나 신뢰성마저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그는 윗사람들과의 ‘진실공방’이 자신을 구제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변명이 허구였음이 여러 가지 증거와 증언들에 의해 하나둘 밝혀지고 있는 상황에서 세상이 그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혼자 죽기 억울하니 같이 죽자’는 물귀신 노릇이나 하게 되는 셈이다.


거짓과 거짓이 마침내 서로 충돌을 일으켜 혼란스럽게 얽혀버리면, 이것을 풀기 위한 최선의 해법은 모든 치장이나 해석을 배제하고 최대한 진실한 실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이 사건을 둘러싸고 있었던 모든 행동과 말들 가운데서 어느 것이 악의적 거짓말이고 어느 것이 선의의 거짓말이었는지 명백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 다음 악의적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 사회는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자고로 거짓말쟁이에게 관대해서 보다 행복해진 사회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시인 peacepre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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