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가 내린 뒤에는 얼음이 언다
서리가 내린 뒤에는 얼음이 언다
  • 정해용 칼럼위원
  • 승인 2013.08.02 21:14
  • 호수 67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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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에 서리(霜) 내리는 얘길 하니 좀 이상하지만, 주역(周易)에서 비롯된 속담을 인용해서 요즘의 일본 얘길 좀 시작해볼까 한다. ‘서리가 내리면 곧 얼음도 언다(履霜堅氷至)’라고 하는 주역의 괘사는 땅을 의미하는 곤(坤)괘에서 나온다.


땅은 현실이다. 누구나 만져보고 느낄 수 있으며, 바로 그 위에서 살아간다. 현실은 또 냉정하다. 춥고 암담하기도 하다. 곤괘를 풀이하는 말에 서리와 얼음이 등장하는 건 썩 잘 어울린다. 그런데 이 속담의 의미는 무얼까. 서리는 초겨울에 주로 내린다. 그러니 오늘 서리가 내렸다면 내일은 얼음이 굳게 얼 것이고 조만간 폭설도 내릴 것이다. 서리 자체는 대수로운 게 아니지만, 본격적인 한파가 눈앞에 닥쳐왔음을 알리는 징조임을 잊지 말라는 경고다. 


요즘 일본이 그들의 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집권 자민당이 개헌의 필요성을 거듭 주장하는 가운데 그것이 실질적으로 가능할 수 있도록 개헌 절차부터 바꾸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본래 개헌 정족수가 의원 수의 3분의 2 이상인데, 이것을 일반 법률을 개정할 때와 같이 2분의 1만 찬성해도 되는 것으로 완화하겠다는 것이다.


집권당의 여론화 작업이 주효했던지, 일본 국내의 여론조사 결과에선 개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크게 늘어났다. 특히 헌법 개정의 권한을 가진 일본 참의원 의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개헌 찬성자의 수가 70%를 넘고 있다는 분석이다. 교토통신 조사에서 72%, 아사히신문 조사에서 75%가 찬성파로 분류됐다. 이는 2007년 57%, 2010년 61%보다 크게 더 늘어난 비율이다. 대세가 제대로 기울어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일도 아닌 이웃나라 일본의 개헌문제가 뭐 그리 중요한가. 그 이유는, 헌법을 고치려는 그들의 속셈에 있다. 개헌파 정치인들이 가장 먼저 고치고 싶어 하는 조항은 그들의 헌법 제9조다. 이 조항은 세계침략의 전과(前科)를 갖고 있는 일본으로 하여금 다시는 군대를 길러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못하도록 하는 안전장치에 해당한다. 1945년 8월, 일본은 미국의 원자폭탄에 맞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뒤 이듬해 연합국의 감시 아래서 새로운 헌법을 만들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쓰고 있는 헌법이다. 이 헌법 제9조는 ‘전쟁의 포기, 군대를 보유하지 않음, 다른 나라와 교전할 권리가 없음’을 명시하고 있다. 그래서 ‘평화헌법’이라고도 불린다. 전쟁 후 일본은 급속히 재기하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된지 오래다. 그래도 주변 나라들이 일본을 군사적으로 두려워하거나 경계하지 않은 것은,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도록 한 평화헌법을 운명처럼 지켜왔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군대의 조직과 재무장이 가능하도록 제9조를 뜯어고치려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군대 조직의 재건과 아울러 무기류 개발, 특히 북한의 핵실험을 구실삼은 핵 개발론까지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다. 개헌론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이 잇따르자 아소 다로 부총리는 남들에게 주목받지 않도록 ‘조용한 개헌’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해 또 한 번 질타를 받았다. 특히나 “독일 히틀러 때 그 유명한 바이마르 헌법이 언제 바뀌었는지도 모르게 바뀌어 있었다”는 예를 들었다는 소식에 세계는 쇼크를 받는다. 그의 말대로 히틀러의 나치당은 독일 국민들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헌법부터 슬쩍 바꾸어놓았다. 그리고는 바뀐 헌법을 근거로 여러 가지 법과 제도들을 바꾸어 세계전쟁의 도발을 준비했던 것이다.


어쩌면 일본의 평화헌법 조항 폐기 시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치스와 같이 해서라도 전쟁 가능한 군사국가로 변신하겠다는 의지 뒤에 숨은 속셈은 무얼까. 지난해 후쿠시마 원전 폭발 이후 일본은 국토의 70% 정도가 심각한 수준의 방사능에 오염되었다고도 한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을 믿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의 심리는 어떠할까. 지금 일본의 대중과 정치인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는 재무장론은 이러한 불안심리로부터도 영향을 받고 있는지 모른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와 대륙을 수차례나 침범한 전력을 갖고 있는 일본이 집권여당을 중심으로 재무장을 위한 헌법 개정에 팔 걷어 부치고 나선 것을 단지 범상한 일로 여길 수는 없다.


가벼운 서리가 내리는 걸 보고 겨울을 준비하려 한다면 과연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오늘의 한국, 한국인들에게 던져진 엄중한 질문이다.
정해용 / 시인, 칼럼니스트
peacepre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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