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와 이어진 비닐 없는 유기농업
생태계와 이어진 비닐 없는 유기농업
  • 박병상 칼럼위원
  • 승인 2013.08.31 12:28
  • 호수 67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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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음식은 제철 농작물로 만들어야 맛이 일품인데, 오이지는 장마철에 제격이다. 주룩주룩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오이지와 열무김치를 놓고 낮에 밥 비벼먹고 밤에 애호박 부침개에 막걸리 한 대접 들이키는 맛, 장마철을 두고두고 기억나게 하겠지만, 농부에게 장마철은 낭만의 계절이 아니다.

요즘 오이지를 담는 방법을 아는 젊은 아낙은 거의 없을 텐데, 오이가 장마철 가까울 때 눈 돌릴 틈도 없이 덩굴에 매달리는지 몰랐다. 돌아볼 때마다 열려 있는 텃밭의 오이야 즐거운 비명이지만 올해 비닐하우스 농부에게 한숨이고 차라리 고역이었다. 풍문을 믿고 오이를 심은 농부가 늘자 가격이 폭락한 게 아닌가. 허겁지겁 따놓은 오이는 차곡차곡 쌓였는데, 헐값을 요구하는 중간상인에 팔자니 약 오르고, 놔두자니 처치 곤란했다. 다른 농사를 위해 갈아엎는 게 낫지만, 울화가 치밀었다. 쉬지 않고 일한 보람은 둘 째, 영농비용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지 않았나.


농한기는 농부를 실업자로 만드는 게으른 계절이 아니다. 시즌을 마친 프로야구 선수들이 내년을 위해 훈련하듯, 농부도 땅도 쉬면서 다음해를 준비해야 한다. 농한기라고 해서 손을 놓는 건 아니다. 일찌감치 갈무리한 씨앗을 저장한 농부는 퇴비를 준비하고, 땅은 미생물을 불러모으며 지력을 회복한다. 휴식 없는 농부와 프로야구 선수는 해마다 같은 일을 성심껏 해날 수 없다. 비닐 농업은 농부에게도, 땅에게도 쉴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휴식을 잃으면 사람도 땅도 병에 쉽게 걸린다.


비닐은 바깥보다 따뜻하게 만드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곤충이나 두더지를 막아주고 날씨 변동을 어느 정도 차단한다. 한데 비닐하우스 안에 심는 씨앗은 억세지 않다. 비바람에 노출된 땅에 살아남는 씨앗과 다르다. 변화가 거의 없는 환경에 최적으로 적응된 씨앗은 다수확품종이고, 그런 품종의 씨앗은 농부가 갈무리할 수 없어 종묘상에서 적지 않은 돈으로 구입해야 한다. 문제는 그런 씨앗은 유전다양성의 폭이 무척 좁다는 데 있다. 환경 적응력이 약한 거다. 비닐이 찢어지거나 하우스의 출입문이 한동안 열리기라도 하면 소출은 휘청한다. 바이러스나 곰팡이가 들어오면 농작물이 한꺼번에 시들 수 있다.


유전다양성의 폭이 좁은 농작물은 한꺼번에 꽃 피고 열매는 순식간 열린다. 꽃 피었을 때 얼른 꿀벌을 넣어야 하고 화학비료를 듬뿍 뿌려야 한다. 땅이 척박하다. 질병에 약하니 들어가는 농약도 적지 않다. 비닐은 물론, 농약과 비료도 석유 제품이다. 난방을 위한 전기와 석유가 수시로 필요하다. 순식간에 쌓이는 비닐하우스의 오이는 차라리 석유다. 그런 농작물의 가격이 폭락한다면 농부는 의욕을 잃는다. 의욕 잃은 농부에게 하우스병은 쉬 발생한다.


농촌 생태계의 수많은 동식물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을 때 유기농업은 빛난다. 비닐하우스 농사는 사실상 유기농업과 절연돼 있다. 농약과 화학비료만 생태계를 차단하는 건 아니다. 비닐을 사용하는 농업은 생태계의 유기적 소통을 가로막는다. 비닐에 의존한 나머지 시간에 쫓기게 된 농부는 자신의 건강을 돌볼 여유가 없다. 비닐 덕분에 한순간 벌어들이는 돈은 지속적이지 못하다. 휘발성이 강할 뿐 아니라 투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올 장마는 지역 편차가 컸다. 제주도는 구름만 끼고 강우는 적었는데 중부지방은 호우가 연일 이어졌다. 채소밭이 많은 곳이다. 장마 뒤 채소 가격 급등 소식이 빗발쳤다. 오이 가격도 예외 없었는데, 헐값으로 상인에게 넘긴 농부의 가슴은 얼마나 탔을까. 보관 시설만 있어도 그런 손해는 피했을 것이다. 농협 빚으로 허리가 휘는 농부가 보관 시설을 준비하기 어려우니 조합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대출이자 독촉하는 농협은 농부들과 협동해야 할 게 무엇인지 헤아리지 않는다.


젊은이들이 한두 개 구입하는 오이지, 믿을만할까. 오이지를 좋아하는 젊은이에게 생활협동조합을 권하고 싶은데, 거기에서 오이지를 파는지 알지 못한다. 유기농업으로 생산한 오이를 믿을만한 천일염으로 재운 오이지가 게 있다면 조합원이 된 소비자는 흔쾌히 찾을 수 있다. 그런 오이지를 농부들이 직접 담아 생활협동조합에 넘기는 건 어떤가. 적어도, 정신없이 쏟아지는 장마철 이전의 오이들을 헐값에 처분하거나 갈아엎는 일은 피할 수 있다.


뉴질랜드의 키위산업은 농부들의 협동조합에서 세계로 공급한다. 우리 농부도 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생산자의 협동조합에서 소비자에게 오이지를 직접 제공할 수 있다. 그 길을 생활협동조합이 도울 수 있다. 협동조합에서 ‘소비자는 왕’이 아니다. 생산자가 살아야 소비자도 산다. 채소나 과일 뿐 아니라 곡물의 수확에서 가공과 유통까지, 생산자의 협동조합이 나설 분야는 의외로 많다.


장마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매미들이 울기 시작했다. 가을을 재촉하는데, 들판과 비닐하우스 안에 농약이 살포되기 시작했다. 생활협동조합의 채소는 안심할 수 있으니 다행인데, 생활협동조합은 화학비료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비닐하우스도 유기농업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구별할 필요는 있다. 비닐하우스를 피하는 농부를 배려하고, 생태계와 유기적으로 이어진 진정한 유기농산물을 우대하자는 거다. 농부와 땅과 생태계, 그리고 내일을 살리는 일이다.
<인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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