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절 특집/일제의 금 수탈과 장항 제련소
■ 광복절 특집/일제의 금 수탈과 장항 제련소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4.08.18 11:08
  • 호수 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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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금으로 전쟁놀음 벌인 일본지하자원 수탈액, 미곡 수탈의 23배1938년 이후에만 121톤…배상청구 한푼도 없어

2003년 3월 1일 서울에서 남북 공동으로 ‘평화와 통일을 위한 3·1 민족대회’가 열렸다. 이 때 ‘일본의 2차 범죄행위에 책임을 묻는다’는 주제로 남북공동학술토론회가 열렸는데 당시 한성대 총장 윤경로씨(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일제의 미곡 수탈액은 1849억 3292만엔이었으며 지하자원 수탈액은 4조 2739억 3758만 2000엔이었다. 1938년 이후 통계만 해도 일제의 금 수탈량은 121톤을 상회했다. 2013년 현재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금은 104톤이다.
지하자원 수탈액이 미곡 수탈액의 23배 이상이었지만 대일 배상요구에서는 한 한 푼도 청구하지 않았다. 일제가 수탈해간 지하자원은 대부분 금이었다. 당시 금은 국제 무역에서 결제 수단이었으며 일제는 조선에서 수탈해간 금으로 대포를 사들이고 군함을 사들여 전쟁놀음을 벌인 것이다. 일제는 1936년 장항제련소를 짓고 남한 지역의 금을 수탈해갔다. 장항제련소를 통한 일제의 금 수탈에 대해 알아본다.

 

 

◇일제의 조선 병참기지화 정책

대륙 진출을 위해 조선을 병참기지화 하려는 책략을 실행에 옮기던 일제는 1915년 10월 대동강 하구에 진남포제련소를 건립한 데 이어 같은 해 12월 14일 ‘조선광업령’을 공포해 조선의 광업을 통째로 손아귀에 넣었다.

이미 1906년 7월 통감부 치하에서 광업법을 공포함으로써 광산 특히 금광의 채굴을 ‘국유’(國有)라는 명목으로 약탈하는 한편, 일본인들에게 광업권을 허가해줌으로써 광산 약탈을 자행했던 일제는 1915년 ‘조선광업령’ 공포로 광산개발을 보다 철저히 통제하고, 당시 진행되고 있던 토지조사사업과 연계하여 광업수탈과 토지수탈을 동시에 이루려 했다. 또한 법을 어겼을 경우의 처분을 종래의 행정처분에서 사법처분으로 강화함으로써 한국인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조선에서 금광업은 1차 세계대전 기간(1914~1918년) 군수 광물의 특수로 생산이 활발했지만 대전 후 20년대 말까지는 세계 공황의 영향으로 저조했다. 조선은행에 의해 처음 집계된 1922년의 조선에서의 비철금속 생산 실적은 금은광 3009톤, 금 3008kg, 사금 317kg, 은 333kg, 조동 1748톤, 아연 1000톤이었으며, 1930년에는 금은광 1만 2858톤, 금 8546kg, 사금 484kg, 은 1만 1404kg, 조동 698톤, 연(납) 97톤이었다. 생산이 활발하지 못했다지만 조동의 경우만 제외하고 나머지 품목들은 꾸준히 증가했다.

 

 <표2>

◇중일전쟁과 금 수탈 정책

1930년 금 수출 해제조치로 금광업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또한 만주사변은 중일전쟁을 예고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한 국제적 긴장은 각국의 금 매입 경쟁을 유발하여 국제 금 시세의 폭등을 가져왔다.

1931년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우가키 가쯔시게(1868~1956)는 이해 12월 기자회견을 열고 “산금정책의 일환으로 조선 내에 4개의 정련소를 건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일본 재벌들이 조선에서 금광 개발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증산계획을 수립하여 1932년부터 시행했다. 그 내용은 10년 후인 1943년도에 1932년 금 생산액 1013만엔의 10배에 달하는 1억엔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산금장려정책의 일환으로 총독부는 탄광장려금을 방출하여 신규 광산개발을 촉진하는 동시에 채굴된 광석을 처리할 수 있는 제련 시설 확충을 추진했다.

총독부는 일본광업의 진남포제련소의 시설 근대화를 지원하여 금속 회수 80% 이하인 습식 제련에서 90% 이상으로 올릴 수 있는 건식으로 전환토록 했다. 또한 조선식산은행의 방계회사인 조선제련주식회사의 장항제련소를 신규 건립하게 되었다. 이는 남한 지방에 건식 제련소가 없어 이 지역에서 채굴된 광물이 일본의 제련소로 운송되고 있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1932년 11월 14일 총독부 식산국장은 “대규모의 금광제련소를 남한 지방에 신설할 것을 구상 중”이라고 발표했다.

◇장항제련소 건립

 조선식산은행은 1934년 11월 3일 ‘산금사업 조성으로 국부의 증진에 기여하여 시대의 요청에 적합한 규모의 설비를 갖춘 제련소와 채금업을 겸영하는 회사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또한 “설립된 금광제련회사는 자본금 1000만엔으로 연내에 창립총회를 개최할 예정이며 주식의 반 이상은 식산은행이 인수하고 나머지는 조선 내에서 공모하는 원칙을 총독부의 내의(內意)를 얻어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 일제는 제련 슬러지를 이용해 금강하구를 매립해 부지를 넓히고 강을 오염시켰다.


이 때 일제는 이미 장항에 제련소를 건립하기로 하고 이 해 10월부터 장항항 부근의 농지를 은밀하게 매입하기 시작했다.
회사 설립 발표 사흘 뒤 ‘조선금광제련주식회사 창립위원회’가 구성됐다. 창립위원회는 11월 10일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에 근대적인 산금정련소를 건설키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12월 6일에는 19명의 ‘조선제련회사’ 발기인 명단이 발표되었는데 이때 조선금광제련주식회사 ‘조선제련회사’가 처음 사명으로 사용되었다.

 

발기인들은 식산은행 임원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한국인, 일본인이 섞여 있었다. 지역적 안배를 고려했다 한다. 한국인으로는 당시 삼양사 사장 김연수를 비롯 광업계와 관련이 있는 한상룡, 원덕상, 박영철, 김태원 등 5명이었다.
일제가 장항을 제련소로 선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1929년 항만 개항으로 항만 이용에 장애가 없다.
- 1931년 장항선(당시 경남선) 철도 개통으로 육로 수송이 용이하다.
- 중심부에 있는 높이 95미터의 바위산(전망산)은 배연시설 설치에 적격이다.
- 중간의 간석지를 매립하여 1만평 이상의 광장을 조성하면 저정광으로 활용 가능하다.
- 연안 접지에 제련 스러그와 기타 잡물을 버릴 수 있고, 매립 효과도 거둘 수 있다.
- 지질 조사 결과 암반이 견고하여 철제 공장 및 구축물, 광석 적치에 용이하다.

식민 통치자에게는 천혜의 입지 조건인 셈이다. 조선제련은 전망산을 중심으로 8만평의 부지를 선정했으며 제련소 건설을 위한 토목 공사는 1935년 2월 14일 착공식을 갖고 시작됐다. 전망산 동남쪽에 있는 24호의 민가는 제련소 정문 앞 공지로 옮겼다.

공사를 강행한 끝에 이 해 12월 말에 제련소는 거의 완공을 보았다. 1936년 1월 8일 하루 광석처리 능력 30톤의 용광로에 불씨가 붙여졌고 해발 95미터의 전망산 정상에 세운 91미터 높이의 굴뚝에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제련소 준공식은 1936년 6월 3일에 있었다. 준공식이 이처럼 늦어진 이유는 당시 조선 총독의 ‘전조선 일주 시찰’ 일정에 맞추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조선 총독은 여간한 대행사에도 직접 참석하는 일이 없었는데 제련소 준공식 때 우가키 총독은 장항 나들이를 한 것이다. 그는 장항에 와서 천혜의 입지 조건에 감탄했다고 한다.
1936년 8월 전련 설비가 완공되고 1937년 4월 2기 건설사업이 마무리되어 장항제련소는 200톤 용광로에 월산 금 150kg, 은 1000kg을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어 용광로 증설이 있따랐다.


◇조선제련의 광산 운영

1935년 2월 조선제련주식회사 이사회는 조선 내에 마산, 무주, 모악, 만리 등 4개 지역에 광산사무소를 개설하고 사무소별로 소관 광산을 정하여 광석의 자산자급을 목표로 광산 확보에 나섰다. 광산 사무소별 소관 광산은 <표3>과 같다.

 

뉴스서천 취재팀은 지난 7월 조선제련 모악 사무소가 있었던 전북 김제시 금구면 일대의 일제의 금 수탈 현장을 가보았다.

김제(金堤)는 본래 금제였다. “금이 둑을 이뤘다”는 뜻이다. 금광은 모악산을 중심으로 한 산악권에서, 사금은 모악산 기슭부터 서해안 방향으로 원평천 유역에서 주로 채굴됐다.

금산면, 금구면, 봉남면, 황산면 일원은 金과 관련한 지명만 보아도 과거 엄청난 금의 고장임을 알 수 있다. 우선 금산사(金山寺)라는 명칭도 ‘황금산(黃金山)에 있는 절’이라는 뜻이다. 금산사는 김제시 금산면면 금산리에 위치했다. 금산(金山)이란 말도 알고 보면 ‘금광’과 같은 의미다. 금산사 입구 저수지는 금평(金坪)저수지다. 금산면에는 금성리도 있다. 금산면에서 전주로 오다보면 금구(金溝)면 금구(金溝)리가 있다. 금구는 ‘금으로 이뤄진 도랑(냇가)’이란 뜻이다. 금구면에는 금천(金川)저수지도 있다.

▲ 김제시 금구면에 있는 폐금광


일제는 모악산 광산에서 금광석을 채취해 트럭으로 전주로 옮겨 철도를 이용해 장항제련소로 이동시켜 금을 제련했다.

모악산 아래인 금산면, 금구면, 봉남면, 황산면 등 김제역을 중심으로 위쪽인 동쪽은 어느 곳을 파도 사금이 나왔다. 그들은 위 지역을 한 곳도 빼놓지 않고 뒤져서 사금을 채취해 갔다. 또한 석금을 채취하기 위해 금산면 청도리의 산 밑을 파고들었다. 그 흔적인 굴 입구가 현재 두 곳이나 남아있고, 금구면 오봉리 뒷산인 꼬깔봉도 파고 들어간 굴이 거미줄같이 얽혀 있다고 한다. 산이 봉우리만 남아 그 속은 비어있어 ‘꼬깔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꼬깔봉 밑에 있는 마을에는 대부분 노인들 중 70~80%가 여성 혼자 살고 있었다 한다. 이 마을의 남자들은 산 밑 굴 속에 들어가 석금을 채취하는 데 동원되었고 돌가루를 너무 많이 마셔서 대부분 일찍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받은 노임은 하루에 좁쌀 두 되였다고 한다.

김제에서 시민운동을 하는 박찬희씨의 안내로 금구면 오봉리에 있는 폐광 굴을 가보았다. 처음 박씨가 한 폐광 입구에 들어서자 사람 비명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와 앞서던 두 사람이 그 자리에서 끌어안고 주저앉았다는 얘기도 들려줬다. 그는 금을 캐다 죽은 조선인을 폐광 속에 던져 암매장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산금령’ 내리며 금 수탈에 광분

1937년 7월 북경 남서쪽 노구교에서 일본과 중국의 양국 군대가 충돌한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이해 12월 일왕 직속의 전시통수부를 설치하고 지구전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에서도 이에 호응 1937년 9월 조선산금령을 공포하여 금 증산을 위해 광분했다. 조선산금령의 중요 내용은 △금 취득자의 매각 의무 △조선은행의 금 수매 의무 △금광석 제련업의 규제 △사업계획 강제권 등이었다.

조선총독부 훈령 제16호로 공포된 다음 조선산금령 제1조를 보면 일제가 금 수탈에 혈안이 돼 있음을 알 수 있다. 1998년 아이엠에프 외환 위기 때 우리 국민은 자발적으로 애기 돌반지까지 내놓았지만 이들은 금을 매각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1)합금광물, 사금 또는 제련과정에 있는 함유물(이하 합금광산물이라 총칭)을 취득한 자는 조선총독(이하 총독이라 칭함)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를 금지금(金地金)으로 제련하여 조선은행에 매각, 또는 이를 총독이 지정하는 금제련업자, 또는 3조 1항의 규정에 의하여 합금광산물의 매입 면허를 받은 자에게 매각할 것. (2)전항의 규정에 의하여 금지금의 매각신청이 있을 때에는 조선은행은 그 매입을 거절할 수 없음. (3)조선은행이 아니고서는 제1항의 금지금을 양수할 수 없음.

산금령 실시 이후 1938년 1월 초 총독부는 ‘산금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금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계획에 비해 실적은 저조했다. 1939년 29.2톤을 절정으로 금 생산량은 하향세로 들어섰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으로 미국은 일본과 독일에 대한 달러화 자금 동결을 단행하고 양국의 군수물자 조달을 위한 국제통화의 입수 루트를 차단했으며 일본은 태환용 지금을 가지고도 구미산 물자를 살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일제의 조선에서의 굼 수탈에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 1941년 일제는 기업정비령을 공포하여 ‘시국 운영상 존재 불요의 업종’을 지정하여 강제 폐쇄하였으며, 조선총독부는 1932년 이래 줄기차게 추진하던 산금정책을 백지화 하면서 ‘금산정비령’을 공포했다.
이에 따라 총독부는 전국의 금 광산에 ‘전면적 가동 정지’를 지시, 대부분의 주요 금광산은 1943년 6월 이후 연말까지 폐광되었다. 또한 장항제련소는 특수광산 경영회사인 삼성광업(주)에 양도하라는 총독부의 명령에 따라 1943년 11월 30일 운영권, 시설, 설비, 자재 등 일체가 (삼성광업(주)로 넘겨졌다.
<참고문헌. 엘지금속 60년사. 1997년 엘지금속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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