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지역의 초기 천주교 역사와 유적 활용 방안
■서천지역의 초기 천주교 역사와 유적 활용 방안
  • 편집국 기자
  • 승인 2014.09.29 17:52
  • 호수 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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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역사와 연계한 관광 상품 개발 절실

지난 16일 오전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열린 제7회 충남향토사대회가 “프란치스코 교황 충청남도 발문기념 충남위 초기 천주교-역사, 유적 활용”이란 주제로 열렸다. 이날 서천의 향토사학자 유승광 박사는 서천 지역 초기 천주교 역사와 유적 활용 방안에 대해 발제를 했다. 다음은 유 박사가 보내온 발제문 요약이다.<편집자>

서천 천주교의 시작점 작은재 돌담·온돌 흔적 남아
홍산 월명산-서천 천방산 중심으로 교우촌 형성
진산사건 때 권상연 한산으로 피신, 전파에 간접 영향

▲유승광 박사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충남 솔뫼 성지를 방문한 후 초기 천주교 역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우리 지역 서천도 예외는 아니다. 천방자락에서 박해를 피하여 생활하다 순교한 교우가 57명이니 그 무게만큼 서천의 천주교가 예사롭지 않다. 현재 서천, 장항, 서면에 본당이 있으며 5000여명의 천주교 신자가 다니고 있다.

서천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의 근원은 천방산 자락을 중심으로 생활하다 박해를 받았던 믿음의 선조들이다. 교황의 방문과 함께 서천지역의 초기 천주교 수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이때 서천 초기 천주교 역사와 활용에 대한 방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서천지역의 초기 천주교는 179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추정이 된다. 이는 배교를 하고 1795년에 홍산으로 이주한 내포의 사도 루도비코 이존창(1752~1801)의 활동과 서천지역의 초기 천주교와의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존창이 홍산 도앙골에서의 전도 활동은 단순히 홍산지역에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서천지역도 전도 대상 지역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홍산지역 초기 천주교 연구와 서천지역의 초기 천주교를 살펴보면 홍산의 월명산과 서천의 천방산 자락을 중심으로 초기 천주교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다. 홍산 월명산 주변 교우촌과 서천 천방산 주변 교우촌은 시대적인 간극을 보이고 있지만 서천에 교우촌이 형성되기 전 이미 그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홍산 월명산 주변 교우촌은 도앙골, 삽티(황석두 루카 유해 매장 추론지), 서짓골(갈매못 순교자 4명 배장지), 산정말, 뒹굴, 내대, 쌩계 등이 있다. 이러한 교우촌은 월명산을 중심으로 한 시간 이내에 연통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서천 천방산 주변 교우촌에는 산막골(1858년 페롱신부 사목 중심지), 작은재, 독매, 한터, 불무골, 월봉 등이 있다. 이러한 교우촌 역시 천방산을 중심으로 한 시간 이내에 연통할 수 있어 월명산 교우촌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 월명산 교우촌과 천방산 교우촌은 다시 도앙골, 서짓골, 쌩계, 산막골로 연통이 용이한 거리의 교우촌이다.

서천지역의 초기 천주교는 1795년 이존창의 홍산 도앙골 거주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지며 그 영향으로 천방산을 중심으로 서천 교우촌이 형성되어 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1791년 진산 사건으로 인해 권상연이 한산 지역으로 피신 한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권상연이 피신한 한산은 안동권씨 집성촌으로 천주교 전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단정 지을 수 는 없지만 간접적으로 천주교의 전파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진산 사건의 주모자 권상연의 피신과 1801년 무장에서 순교한 최여겸의 처가가 한산이라는 사실 역시 한산 지역의 초기 천주교 수용과 무관하지 않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홍산으로 이사 온 시기와 최여겸이 한산으로 장가를 옴으로 작은재에서 만남 역시 서천 천주교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 이에 서천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 확산되어 천방산을 중심으로 한 교우촌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서천지역은 금강과 서해를 접한 곳으로 수로가 발달하였지만 내륙 깊은 곳에는 골짜기가 발달하여 은신처로 적합한 곳이 많다. 1801년 정부의 신유박해로 방방곡곡에 흩어진 천주교 신자들은 서천군 천방산 자락을 중심으로 교우촌을 형성하고 생활하였다.

비인군의 불무골, 한티, 띠안말, 서천군 지역의 산막굴, 독뫼, 정수골, 작은재, 한산군의 장구목, 동학곡, 군간리 교우촌이 형성되어 천주교의 교세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이에 최양업 신부, 페롱신부, 조안느 신부, 황루카 등 많은 신부들이 불무골과 산막골, 작은재를 사목지로 활용하였다. 이에 초기 천주교가 전래되어 형성된 사목 중심지 및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서천지역이 38명 비인지역이 12명 한산지역이 7명 총 57명이 순교하였다. 특히  작은재는 천방산 자락인 봉림산 북사면 계곡에 형성되어 있다. 작은재는 숲으로 우거져 있지만 1970년대까지 사람들이 살았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는 살구나무 2그루와 머위가 많이 나 있고 주변에는 계단식 경작지가 형성되어 있어 폐쇄된 마을 터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건물지로는 작은재 북사면에는 아직도 돌담 흔적과 온돌 흔적이 남은 가옥 모습이  있다. 또 샘이 1곳이 있다. 특히 큰 살구나무가 서 있는 곳은 작은재 공소가 있었던 곳이라고 전하고 있다. 살구나무는 부여 금사리 성당 공신부가 타고 온 말을 매어 놓던 나무라고 한다.

작은재를 비인 띠안말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작은재는 산막골과 달리 교우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생활하였던 곳으로 보고 있다. 계단식 농경지를 통하여 볼 때 자급자족을 위한 노력을 엿 볼 수 있다.

작은재와 관련한 천주교 역사는 1801년 최여겸이 한산으로 피신하였을 때 작은재에 머물면서 이존창을 만났을 것으로 여겨지는 데서 시작한다. 그 이후 이존창과 최여겸의 활동으로 천주교가 서천지역에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면 작은재는 서천의 천주교 시작점이다.

작은재에서 성장한 사람으로는 시몬 이우철 신부가 있다. 이우철 신부는 작은재에서 성장하다 금사리로 이사간 요한 이정병의 아들이다. 이정병의 할아버지가 바오로 이화만이다. 이화만은 갈매못에서 순교한 안주교 외 네분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다가 체포되어 두 아들과 순교하였다.

또한 작은재에서 순교했거나 자연사한 순교자나 교우들의 무덤으로 추정이 되는 작은재 줄무덤이 있다. 줄무덤은 1994년 임도를 개설할 때, 천주교와 관련된 유물이 발견되었으나 그 당시 유야무야 처리되어 존재를 알 수 없었다. 이를 근거로 2010년 서천본당에서는 작은재줄무덤 표석을 세웠다.

서천에는 세계 기후변화에 대한 연구와 교육, 전시를 위한 국립 생태원이 2013년 12월 개관하였다. 개관이래 전국에서 관광객이 일간 2,000여 명이 생태원을 찾고 있다. 또 인근에는 해양생물의 다양성과 어종을 보존하기 위한 국립해양생물자원관이 임시 개관하여 관광객을 맞고 있다. 특히 서천군의 관광안내는 생태와 역사문화를 연계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교육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있다.

이에 교황 방문과 함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천주교 역사와 연계한 관광 상품 개발이 절실하다. 또한 서천 서면 마량리는 최초 개신교 성경 전래지이다. 천방산 천주교 박해 성지와 더불어 개신교 최초 성경 전래지와 연계한 프로그램 개발도 필요하다.

서천에는 천주교, 기독교 유적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불교와 유교, 동학 유적이 있다. 불교유적으로는 한산 봉서사에는 보물 1751호인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舒川 鳳棲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이 대표적이다. 또한 서천지역에는 서천향교, 한산향교, 비인향교 등이 있다. 동학과 관련한 유적으로는 접주 조영구 관련 가옥과 이완용 누이 묘가 있다.

이를 활용한 서천 종교 유적 탐방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종교를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특히 최근 서천지역에서 각 종교에서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나눔과 봉사에 대한 가치를 공유할 기회를 가져 함께 성지순례를 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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