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우울증 극복사례③‘문학 할머니’ 이영복,
■노인 우울증 극복사례③‘문학 할머니’ 이영복,
  • 공금란 발행인
  • 승인 2014.12.29 11:53
  • 호수 7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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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바로 치매예방”

“3남 3녀 6남매 가르쳐서 자리 잡게 만들고 나니 허 해지드만, 이젠 내 인생 좀 살아 보자 싶었지”

▲ 배움으로 우울증을 극복한 이영복 어르신
친구들이 학교가고 소풍가는 게 부러웠다는 이영복 어르신의 말씀입니다.
다른 친구들은 다 학교 가는데 왜 나만 학교 안 가느냐는 물음에 아무 말씀 못하셨던 어머니 모습에서 ‘가난 때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고 하십니다.

열 네 살 되던 해에 아버지께서 떠나시자 가세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열일곱에 먹는 입을 줄이고자 어머니께서 고육지책으로 시집을 보내셨습니다. 시댁 역시 가난하여 살기가 막막한 터라 친정이 있는 읍내로 나와 남편이 양복짓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난을 면 하는 일은 오직 배움”이라는 판단으로 슬하의 3남 3녀 교육에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아들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딸들은 중학교 때부터 도회로 보내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 덕분에 모두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렸습니다.

몇 년이고 손톱 깎을 일이 없을 만큼 억척스레 일해서 자녀들이 자리 잡도록 돌보고 나니 가슴한 구석에 빈 듯했습니다. 그 이유를 배우지 못한 한이라 생각하셨습니다.
“꼭 십년 전에 내 이름 석자는 써야 하지 않겠냐”며 남편에게 공부하겠다 말하니 다 늙어서 무슨 공부냐는 핀잔이 돌아왔습니다.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찾은 ‘늘푸른 배움터’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습니다. 공부하러 온 사람들 중에 당신이 제일 나이가 많아 부끄럽기도 하고 겁이 나서였습니다.
담당자의 격려로 용기 내어 벅찬 가슴으로 “가갸거겨…” 써내려 갈 때는 열 살 소녀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공부시작한지 한 달 만에 남편이 척추협착증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어 공부를 놓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아픈 것도 안타까웠지만 배움에 인연이 없다는 서러움에 하염없이 울음이 나드만”
위기를 넘겨 퇴원하였으나 수족을 쓸 수 없는 남편, 할머니 도움 없이는 식사도, 대소변 보는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남편 수발을 들면서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접을 수 없어 두 시간 씩 짬을 내어 시작한 공부, 몇 달을 못했으니 다른 사람에 비해 많이 늦어졌습니다.

경험 삼아 본 첫 초등학교 졸업인증 검점고시에서는 고배를 마셨지만 이듬해 당당히 합격했습니다. 중학교 과정을 권유 받았지만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남편도 스스로 소변을 보게 되고 배움을 즐거움으로 행복했습니다.

세상에 다 좋을 수는 없나 봅니다. 마음으로 의지하던 남편과 갑자기 아들을 잃은 이영복 어르신. “그냥 죽어야겠다 싶고, 공부도 인생도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당시를 회상하는 눈에 살짝 이슬이 스칩니다.

이영복 어르신은 글로 마음을 표현하면서 위기를 극복하셨습니다. “치매 안 걸리려고 공부하는 거 하고 보건소 재활 교육은 꼭 챙기지, 공부하고 글 쓰면서 마음 다스려”
헛된 공상이 생기지 않도록 열심히 읽고 쓰기 시작한 것이 한국문해교육협회 체험수기 공모에서 최우수상을 수상 받고 서천군 백일장에서도 1등을 했습니다.
“군수님한테 상을 받는디 얼매나 울었는지 몰라, 자식 잃고도 이래 공부를 해서 상을 받는 구나 싶어서, 너무 우니께 사람들이 의아해 했지. 남들한테는 자식 잃은 얘기 안했거든”
남부럽지 않은 가세와 상을 타거나 생신 때면 자녀들에게 수백만 원을 축하금을 받아 장학금으로 내 놓아 유복하게만 보이는 분께 이런 아픈 사연이 있는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영복 어르신의 사연을 듣고 나니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도종환의 시가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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