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수첩/국채보상운동과 금연
■ 기자수첩/국채보상운동과 금연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5.01.13 15:02
  • 호수 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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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산면 목암리 7원 70전, 상직동 20원 40전, 하중리 27원 75전, 와리면 선곡리 3원 40전, 시우동 10원, 월곡면 하초평 7원 20전, 인화면 화정리 15원, 마유면 장상리 15원 25전, 장종리 6원 80전, 북방면 건건리 23원 20전, 팔곡일리 20원 70전, 팔곡이리 8원 5전, 둔대리 21원 65전, 속달일리 44원 90전, 속달이리 34원 40전, 대야미리 26원 45전, 도마교리 11원 10전, 성곶면 사리(四里) 37원, 분오리 17원 90전, 삼리 11원 2전 5리, 와리면 신각리 33원 55전, 신각리 야학사숙 1원 45전, 성두·무곡동 14원 55전.....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졌을 때 <대한매일신보>에 접수된 경기도 안산 군민들의 성금 내역이다. 일제의 차관을 갚기 위해 민초들이 금연운동에 나섰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21일 대구의 김광제·서상돈 등의 발기로 시작되었다 한다.

이들은 국채 1300만 원이 국가 존망과 직결된다는 판단 아래 2천만 국민들이 3개월 간 금연하고 그 대금을 모아 국채를 상환하자는 내용의 취지서를 발표, 모금활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러한 국채보상 취지가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일거에 범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되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했다. 민씨 척족, 노론 등 위정자들이 나라를 망조가 들게 하는 동안 민초들은 이처럼 단결해 위기에 처한 국권을 지키고자 했다. 그 정신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독립투쟁으로 면면히 이어졌을 것이다.

약 1년 6개월 간 지속된 국채보상운동은 각지, 각계각층을 망라한 전국 규모의 운동으로서 비록 통감부의 탄압과 방해 공작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외채 상환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전국민의 단합된 의지를 보여준 국권회복운동이었다.

새해 들어 담배를 끊었다는 사람들이 많다. 여느 해 같으면 새해 결심으로 금연을 시작했다가 작심삼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올해는 금연 이유가 예년과는 다른 경우가 많다. 정부가 담배에 부과되는 간접세를 대폭 올렸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민들의 건강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애연가들은 이를 ‘코메디’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세수가 극대화되는 선에서 가격을 결정했다는 말도 들린다.
이에 흡연자들은 조세저항 차원에서 금연을 결정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110년 전의 국채보상운동 시의 금연 운동과 대비가 되고 있다. 이들의 결심이 얼마나 지속될지 관심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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