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천이 낳은 명창 김창진
■ 서천이 낳은 명창 김창진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5.04.20 11:42
  • 호수 7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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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5명창 장점 살린 독특한 경지
판교에서 박동진 가르치고 비운의 생 마감

▲ 김창진 명창
영화 ‘서편제’에서는 시류와 타협하지 않고 제자들을 길러낸 후 건강 악화로 비운의 생을 마감한 ‘유봉’이라는 소리꾼이 나온다. 서천에서 태어나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살다 서천에서 제자를 길러내고 고난의 삶을 마감한 사람이 김창진 명창이다.

김창진은 1875년 장항 횡산리(빗그뫼. 현 성주리)에서 김정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서천 도만리 출신의 이동백과 함께 근대 5명창의 반열에 드는 김창룡(1872~1935)이다. 진양조를 창시한 김성옥의 아들 김정근은 강경에서 살다 장항으로 이주했는데 이곳에서 창룡에게는 소리를, 창진에게는 북을 가르쳤다.

예전에 명창들은 수행고수라 하여 자신의 소리를 전문으로 장단을 맞추는 고수와 동행을 했다. ‘일고수이명창’이라 한다지만 대접은 판이했다. 명창은 대우를 받지만, 고수는 밥을 먹을 때조차 댓돌 아래서 먹었다는 것이다.

형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수행고수 노릇을 하던 김창진은 한을 풀기 위해 부여 무량사로 들어갔다. 그곳 산신각에서 10년간이라는 긴 세월을 소리공부에 몰두했다.

소리공부를 하는 동안 옷이 다 떨어져, 거적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했다고 한다. 밑이 다 드러날 것만 같은 그런 꼴을 본 무량사의 주지스님이 옷을 한 벌 주었는데, 그 옷을 입으니 사문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자 옷을 벗어버리고 다시 거적을 쓰고 소리에만 전념했다 한다.

스스로 독공으로 득음을 한 김창진 명창은 서울로 올라와 소리판에 뛰어들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명창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제자 박동진 명창이 KBS_TV 다큐멘터리 ‘중고제’에 출연해 증언한 바에 따르면 당대 5명창의 수행고수 노릇을 하면서 이들의 특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김창진이기에 그 소리의 장점을 따서 만든 그의 소리는 5명창을 능가한다는 평을 들었다 한다. 김창진처럼 진양조를 느리게 한 사람이 없었는데 그렇게 하는 걸 ‘삼공잽이 진양’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당시 판소리계의 주류에서 따돌림을 받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는 이미 가문의 전통 법제를 어기게 되어 이 때문에 집안에서 쫓겨나다시피 했었다.
▲ 김창진 명창이 태어난 장항읍 성주리 집터 자리

김창룡과 김창진은 모두 아버지에게 소리를 배웠으나 뒤에 선생이 달라서 그랬던지 소리를 다르게 했다. 김창룡은 산골 장작 패는 식으로 소리를 하였고 김창진은 이쁜 각시 바느질하는 것 같이 소리를 했다고 한다.

김창진은 김창룡보다 7~8세 연하인데 중고제와 서편제를 섞어서 소리했고 아편을 했기 때문에 김창룡이 서울에 발을 못붙이게 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에 낙향하여 너더리(판교)에 정착했다. 이 때가 194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김창진은 판교에서 박동진에게 판소리 심청가를 전수하게 된다. 이후 아편으로 시름을 달래던 김창진은 너더리에서 불우한 생을 마쳤다.

일제 때 음반회사 ‘일축’은 유일하게 명창 김창룡과 김창진, 김창룡의 장남 김세준과 손녀 김차돈, 이렇게 중고제 가족 3대의 판소리 음반을 모두 제작한 유일한 회사였다. 김창진의 녹음은 1931년에 녹음한 판소리 춘향가 중 <몽중가>(고수:한성준) 유성기음반 한 장이 전한다. 사진도 음반 앨범에 나온 사진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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