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을 잃은 사회, 그래도 꿈꾸기
환상을 잃은 사회, 그래도 꿈꾸기
  • 정해용 칼럼위원
  • 승인 2015.06.01 16:15
  • 호수 76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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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 코미디에 ‘불편한 진실’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이를테면, 크리스마스 때 산타클로스가 하늘에서 썰매를 타고 내려와 선물을 준다는 이야기 같은 것은 꾸며진 존재다. 하지만 어린 아이는 산타클로스가 밤중에 와서 선물을 두고 간다고 믿는다. 산타클로스를 실제로 보기 위해 뜬눈으로 밤을 맞다가 어설프게 잠이 들고, 하필이면 산타클로스는 그 순간을 이용해 왔다 간다. 

“사실 산타클로스 같은 존재는 없어. 밤중에 산타클로스가 두고 갔다는 선물은 엄마 아빠가 사다놓은 거야. 몰랐지?”

산타클로스의 허구성을 일찍 깨닫는가 늦게 깨닫는가는 반드시 지능과 비례하는 건 아닐 것이다. 환경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티브이 같은 대중매체들이 ‘불편한 진실’이라는 걸 떠들어대는 정보 홍수 시대다. 아이들은 지난밤에 찾아온 산타클로스가 사실은 유치원 원장 선생님의 남편이거나 아빠의 사촌동생이거나 또는 크리스마스 선물 배달을 위해 백화점에 임시 고용된 택배회사 배달원이라는 것쯤은 젖떼기 바쁘게 알아차리고 있다.

과학문명은 발달하고 정보는 차고 넘친다. 손에 스마트폰이라는 이기를 들고 다니며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는 현대인들은 그야말로 정보에 치여 살고 있다. 굳이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옆 사람들로부터 전해 듣는 정보를 피할 수 없다.

장단점이 있다. 사람들은 그야말로 똑똑해진다. 예전 같으면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 유명인들의 사생활, TV 스타들의 시시껄렁한 뒷얘기, 보통 사람들이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던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알고 싶지 않아도 시시콜콜 귀에 들려온다. 정치인 종교인 유명 문인이나 학자들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세상에 존경하고 본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 허무함을 깨치게 된다.

많이 주워들어 그만큼 영리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이 피로해지고 환상이 사라지는 건 아무래도 부작용이 적지 않다. ‘넘치는 지성’에 치이는 건 차라리 무지함보다 못하다. 

옛날 어린이들은 우상이 있었다. 하다못해 학교 선생님만 보아도 세상일 모르는 게 없는 척척박사로 보였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선녀처럼 보였고,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이상형 남자로 보였다. 그들을 보면서 아이들은 ‘나도 선생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키울 수가 있었다. 하다 못해 만화영화나 동화를 들으면서 그 주인공들의 위대한 힘과 숭고한 정신을 본받고자 하는 열망도 있었다. 너무 똑똑해진 요즘 아이들에게 그런 게 있을까.

슬프게도 현대인은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과학의 힘으로 생명 탄생의 신비가 하나둘 베일을 벗게 되고 이제는 사람의 손으로 유전자를 조작하는 지경에 이르러 종교적 환상마저도 사라지고 있다. 대통령도 위인도 학자도 다 우리 같은 인간일 뿐이다.

전설이나 종교를 통해 ‘약속의 땅’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비해,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현대인의 삶은 더 힘이 든다. 왜 헌신적으로 살아야 하는지, 왜 고통스런 삶이라도 인내를 가지고, 때로는 자기희생까지 하면서 살아내야 하는지 회의를 갖기 시작하면 삶에 대한 애착도 줄어든다. 특히 급속한 문명과 지식발달의 길을 달려온 대한민국은 지금, 자살률이나 사회범죄 증가율이 세계 최고수준이다.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겠다는 자발적 동기는 줄어들고 법을 어기지 않고 산다는 최소한의 규범만이 남았다. 이런 삶이 재미있을 리 없다.

식자우환, 인간은 지식이 늘어나는 대가로 과연 점점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인간은 새로운 동화, 새로운 전설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신(神)이 가져다주는 저승의 천국 같은 것이 아니다. 저 높이 있는 누군가가 놀라운 영도력으로 우리를 이끌어줄 지상낙원 같은 것도 아니다. 똑똑해진 현대인은, 산타클로스의 부재를 눈치 챈 어린이처럼 막연히 의지하기만 하면 알아서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어줄 그러한 존재는 없다는 것을 이제 깨닫고 있다. 그것이 현대사회를 일순 허무주의로 끌어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엄연한 진실 하나를 깨달을 수 있다. 이제는 우리 손으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그릴 수 있고, 우리 힘으로 그것을 만들어나갈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동화를 읽던 어린이가 자라나서 자기 후세들을 위해 새로운 동화를 쓰는 작가가 되듯, 우리가 충분히 정신적으로 성숙했다면, 이제는 후세들을 위해 새로운 희망을 창조해내야 한다.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며, 일상 자체가 축제와도 같은 사랑과 평화의 시대를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막연한 공상을 넘어 그것이 가능한 사회를 스스로 설계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설계에 맞게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이 목표를 위해 우리의 삶을, 나의 삶을 어떻게 바꿔볼 것인가. 그것은 현대인의 심장을 점령하고 있는 허무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꿈을 꾸는 자체만으로도 가슴 속에 벌써 희망과 보람이 싹트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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