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의 근대화 길산포에서 시작됐다
서천의 근대화 길산포에서 시작됐다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5.08.24 14:17
  • 호수 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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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광 박사, “장항 개항 이전 자본주의 싹터”
노동조합·형평운동…‘식민지 근대화론’ 허구 밝혀

서천의 근대화는 길산포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 질메다리 건립 시주자들의 이름을 새긴 길산비. 옛 길산초등학교(현 서천요양병원) 입구에 있다. 마모가 심해 보호비각이 필요하다.
지난 18일 봄의마을 평생교육센터에서 열린 ‘서천 지역학’ 강의에서 향토사학자 유승광 박사는 “조선후기 금강하류의 내륙수로 발달에 따라 길산포가 비인, 서천, 한산의 물류 집산지가 역할을 함으로써 상업자본이 축적되어 자본주의의 싹이 텄다”고 말했다.

이는 일제가 장항항을 개항함으로써 비로소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됐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를 밝히는 내용이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유 박사는 강의에서 “길산포구와 길산장, 메가리깐으로 불리는 정미소가 자본축적의 기본 요소로 작용했으며 이에 따라 토지에 얽매이지 않고 육체노동만으로 생활을 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1920년대에는 이들 부두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정기총회를 열었다는 ‘동아일보’ 신문 기사를 소개하면서 백정들의 신분타파 운동인 형평사 운동도 길산포를 중심으로 발생했고 ‘장영근’이라는 인물은 무산자 아동들을 가르치는 야학을 세웠다고 말했다.

일제 강점 이후에는 길산포에 곡물검사소와 동양척식회사 지부가 길산포에 들어섰으나 1930년대 들어 철도와 장항항이 들어서면서 길산포는 그 역할을 장항항에 내주게 되었다.

한편 유 박사는 1530년 조선 중기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나오는 ‘질메다리’는 서천과 한산을 이어주는 다리로 근대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으며 다리를 세울 때 시주자들의 이름을 새겨넣은 ‘길산비’가 남아있는데 관리가 없이 방치되고 있어 심하게 마모되고 있다면서 보호각 등 시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비석에는 크고 작은 글씨로 시주자들의 이름만 새겨있어 민초들이 이 다리를 놓은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 시주자들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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