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평화 깃드소서!
한반도에 평화 깃드소서!
  • 최현옥
  • 승인 2003.06.06 00:00
  • 호수 17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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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전쟁의 상처는 두 부부의 한이 됐다.
전폭기들의 엔진소리와 공습 사이렌, 폭격음... 동트기 직전 도심의 거리는 엄청난 폭발음으로 흔들린다. 도시는 금방 검은 화염과 연기로 뒤덮이고 신음소리가 가득 찬다.
임영춘씨(77·남·비인면 성내리)와 박옥선씨(71·여) 부부는 지난 이라크 전쟁을 통해 또 하나의 영상이 머릿속에 스쳤다.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 동족상잔이라는 비극으로 민중의 흰옷에 핏빛이 온통 얼룩진 1950년. 반세기가 흐른 지금 많은 것들이 무디어질 법 한데 전쟁당시 입은 상처의 흉터와 이산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영원한 가슴속 한으로 남아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되었다.
“그걸 어디매 말로 다 표현합내까”
과거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손사래를 치는 임씨의 말투에는 아직도 함경도 사투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젠 모든 것을 잊고 싶다던 임씨는 그 당시 이야기가 나오자 금방 눈시울을 붉히며 창문 넘어 먼 산을 바라본다.
지난 이라크전을 바라보며 재앙을 자초하는 열강들의 모습에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는 임씨. 6월이 접어들면서 그 당시 기억과 북에서 헤어진 누나 생각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텔레비전을 통해 접할 때마다 자신에게도 저런 기회가 빨리 주어졌으면 좋겠다며 푸념을 늘어놓는 두 부부. 이들의 삶을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전쟁 반발당시 임씨는 학생이었다. 만학을 위해 18살 초등학교에 입학 후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당시 그는 연필 대신 총칼을 들어야 했다.
황해 송하군 태생으로 농촌에 거주하며 순박하게 살았던 그에게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핏줄이 서로 총부리를 겨루는 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러나 북에 거주하며 남한 세계를 동경했던 그는 인근의 야산 구월산에서 구성된 애국청년 유격대 구월산부대에서 활약하기로 결심한다.
북에 대한 반란군이었던 구월산부대는 무기도 없어 보완소(파출소)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해 한국군을 도왔으며 식량을 조달했다. 전쟁에서 활약 중이던 임씨를 비롯, 일부 부대원은 북의 포로로 잡혀 한달 동안 물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다행히 아군의 도움으로 풀려날 수 있었으나 한달 동안 매질을 당하며 속병이 깊어진 일부 동료들은 서서히 죽어갔다. 임씨는 모든 것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그 시점 주위를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그후 육지에서 5백m떨어진 서해의 섬에서 부모님과 거주하며 3차 상륙작전 교전 중 임씨는 다리부상과 검지손가락에 총알을 맞고 군산 도립병원에 후송된다.
“팽팽한 긴장이 감돌며 숨 가쁜 교전 중이라 다친 것도 몰랐다”는 임씨는 낮에는 아이들 울음소리, 밤에는 폭격소리에 시달리며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기원했다.
병원에 후송된 임씨는 현역이 아니었으므로 신분보장을 받을 수 없었다. 임시치료 이외에는 대부분 전쟁터로 다시 돌아가 자가치료를 받아야 했으며 처우 역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해 손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할 정도였다”는 임씨는 결국 제대 후 군산에 정착을 하게된다. 그때 임씨는 부인 박씨를 만나는데 그녀 역시 부모님을 북에 두고 피난 온 상태였다. 밑바닥 인생부터 시작했던 임씨는 안한 일이 없었으며 전쟁으로 입은 장애는 취업을 어렵게 만들었다. 미군부대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기 위해 서천으로 거주지를 옮긴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국가에서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임씨는 99년이 돼서야 참전용사로 인정, 2000년 국가유공자로 지정됐다.
“전쟁은 끝났지만 내 몸은 흉터와 장애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임씨는 “한반도 역시 자신의 몸처럼 후유증과 장애를 갖고 아직도 전세계 유일한 분단된 국가로 있다”며 통일을 기원하고 한반도에 하루빨리 평화가 찾아오길 소망했다. 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에게 깊은 조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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