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이여 활짝 피어나라
농업이여 활짝 피어나라
  • 최현옥
  • 승인 2003.06.13 00:00
  • 호수 17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전정신과 진취적 기상을 간직한 이씨가족 희망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에 쏟아지는 폭염, 모든 생물이 죽은 듯 숨죽인 낮 2시 수확의 기쁨에 더위도 잊은 가족이 있다. 천평 규모의 연동하우스에서 한방토마토를 수확하는 이들의 얼굴에는 희망이 가득하다.
“화훼의 불모지인 서천에서 특화작물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화훼단지 조성을 위해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논을 바라보는 이규희(서천읍 동산리)씨. 얼 듯 보기에도 초보 농사꾼인 그는 23살의 젊은 청년이다.
“친구들이 모두 농촌을 외면할 때 이곳에도 분명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이씨는 지난해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한국농업대학교 화훼과를 졸업했다.
농사에 뜻을 두고 농업대에 진학을 했고 졸업 후 1년 동안 부모의 농사를 도왔던 이씨는 이제 둥지를 벗어나려 날갯짓을 연습하는 어린 새 같다.
지난 1년 동안 부모에게 배운 농사 기술과 자신의 전공을 살려 국화단지를 조성할 계획. 이씨는 어머니 방미옥(47)씨와 예산에 위치한 국화 시험 재배단지에 가서 교육을 받고 왔다.
이런 아들의 비행연습이 안쓰러워 항상 도와주고 싶은 어머니 방씨. 그녀는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는 현시점, 희망을 걸고 묵묵히 일해주는 아들이 고맙다. 대부분의 부모가 자신의 자녀만은 하얀 와이셔츠에 펜을 굴리는 직장에 근무하길 원하는데 그녀는 달랐다. 타 지역으로 선진 농법을 연수받으러 가고 시험 재배를 통해 지역 주민들에게 기술을 보급했던 방씨는 농촌의 미래가 암울하지만은 않다는 신념이 자리 잡았다. 물론 이씨의 대학진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학창시절 농사를 짓는 친구들을 도우며 농사일에 대한 향수가 깊었다”는 방씨는 경남 진주에서 서천에 시집오며 농사일을 하게됐다.
농가소득이 안정돼지 않아 고민이 많았던 두 부부는 급기야 농촌을 등지고 서울로 떠났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병시중 때문에 고향에 내려왔고 다시 시작된 농촌생활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계속되는 실패 속에 농촌을 다시 떠나려 했지만 그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아버지 이철재(52)씨는 86년 농업인 후계자 영농자금을 받아 시설농업과 논농사 등을 하며 남보다 2∼3배 노력했다.
“농사일을 많이 하기 위해 힘이 세지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부부는 이제 시문작목반 사람들과 기술을 제휴해 한약을 이용한 토마토를 생산, 품질과 맛을 인정받아 소득이 늘고 있는 추세.
“농산물 개방 앞에서 처절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이 농촌 현실이지만 누군가는 이곳을 지켜야 한다”는 이씨는 부모가 농촌을 등질 수 없었던 것처럼 그 역시 마찬가지이다. 비록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시작한 것은 1년이지만 수확의 기쁨과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 등 애착이 커진 그의 모습은 배태랑 농사꾼 부럽지 않다.
“마음을 터놓을 또래친구가 없어 힘들다”는 이씨는 가끔 대학 친구들과 전화를 하며 위안을 갖는다. 또 뿔뿔이 흩어져 자신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간 친구들이 농촌에서 희망을 가꾸는 모습은 그 에게 힘이 된다.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국화를 재배하겠다”는 이씨는 “만약 화훼가 잘 되지 않아도 자신의 시도가 지역의 농민들에게 기술 도입과 특화작물 재배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젊은 일꾼 이씨, 그는 분명 농촌의 미래를 밝히는 횃불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