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연재/서천의 문화예술인을 찾아서(2)명창 김창진-2
■ 기획 연재/서천의 문화예술인을 찾아서(2)명창 김창진-2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5.12.21 15:19
  • 호수 79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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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움 딛고 이겨낸 혹독한 수련…명창 경지 도달
판교로 낙향, 박동진 가르치고 비운의 삶 마감

▲ 김창진 명창
금강 하류의 넓은 충적평야와 기수역을 차지한 서천군은 높은 생산력을 바탕으로 예로부터 많은 인물들을 낳았다. 특히 문화 예술계에서 활동하며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다. 뉴스서천은 이들을 추적하여 서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이들이 남긴 유산을 기리고자 한다. 지난호에 이어 명창 김창진의 삶을 추적한다.<편집자>

이동백·김창룡, 조선성악연구회 주도

1902년은 고종황제가 즉위한지 40년이 되던 해였다. 이에 이를 기념하는 서구식 예식인 ‘어극사십년칭경예식(御極 四十年 稱慶禮式)’이 열렸는데 기념식장으로 건축한 ‘소춘대(笑春臺)’라 불린 희대(戱臺)는 서구사회의 극장문화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황실재정(내탕금)으로 경희궁 흥화문 앞(현재 광화문 새문안교회 자리)에 세워졌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이 희대를 일컬어 “조선 최초의 극장이오. 한참시절 런던의 로얄희대, 비엔나의 왕립극장에 비의(比擬)하려 한 유일의 국립극장인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라고 했다.
서구식 극장을 표방한 소춘대(笑春臺)가 건립됨에 따라 그곳에서 연희할 광대와 기생들을 모아 만든 예인(藝人)들의 결사체라 할 수 있는 ‘협률사(協律社)’가 1902년에 결성되었다.

이 협률사에는 김창환이 단체 대표를 맡았고 이동백, 송만갑, 강용환, 김채만, 장자백, 유성준, 허금파, 강소향 등의 판소리 명창들이 참여했다.

1908년에 이인직(이완용 비서실장)이 신 연극을 표방하며 현재 정동극장 자리에 원각사(圓覺舍)라는 연
극장을 개장했는데 협률사는 원각사 전속 예인집단으로 기능했다.
1910년에 일제의 병탄이 이루어지자 협률사 소속 예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지방순회공연 등으로 명맥을 이었다. 한편 1912년 일제는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원각사마저 없앴다.

▲ 이동백, 김창룡, 심정순 등 중고제 명창들의 활동을 보도한 1925년 7월 29일 <매일신보>기사
1915년 서울 낙원동에 장안사와 연흥사라는 한국인 극장이 문을 열었는데 이동백, 송만갑, 김창룡, 한성준, 장판개, 강소향, 배설향 등은 이들 한국인 극장과 전속 계약을 맺고 판소리와 창극을 공연했다.
그러나 신파에 밀려 판소리와 창극의 흥행에 실패를 거듭하자 1933년 5월 10일 여성 명창 김초향(金楚香)의 제안과 순천갑부 김종익의 후원으로 이동백, 김창룡, 송만갑, 정정렬, 한성준 등 판소리 명창들의 중심으로 되어 산조(散調)명인, 경서도 소리 명창, 민속 무용수들이 규합하여 한국 전통음악의 공연과 전수를 목적으로 ‘조선성악연구회’를 결성했다. 이후 조선성악연구회마저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다.

서천이 낳은 명창 이동백(1867~1950)은 경상도 진주로 내려가 창원·마산 등지를 주요 활동무대로 삼고 9년간 활동했다. 이후 서울로 와서는 고종의 총애를 받아 고종으로부터 정3품 통정대부의 벼슬을 제수받았으며 원각사에서 김창환·송만갑 등과 함께 창극운동에 참여했다.

▲ 서울 정동 원각사 자리에 있는 이동백 명창 동상
일제의 병탄 이후 1912년 원각사가 폐쇄되자 송만갑의 협률사에 참여하여 전국을 순회하다 고향인 서천으로 돌아왔다. 수년 후 그는 다시 상경하여 장안사·연흥사 등에서 활동하는데 그와 서천에서 동문수학했던 김창룡이 그와 함께 했다. 이 무렵 이동백과 김창룡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서천 출신 두 명창은 이후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를 결성하고 판소리 보존과 후학을 기르는 데 정성을 쏟았다.

“독공으로 일가 이룬 소리, 5명창 능가”

그러나 김창진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없다. 공주 출신의 그의 제자 명창 박동진(1916~2003)은 판소리사에서 많은 증언을 남겼는데 그의 증언은 김창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 박동진 명창
박동진은 1916년 공주시 무릉동에서 태어났다. 대전공립중학교 졸업반이던 열 여섯 살 때 협률사 공연을 보고 소리에 반해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다. 청양의 손병두의 문하에 들어가 처음 소리를 익혔는데 손씨는 지역 일대를 주름잡던 상쇠꾼(꽹과리)으로 토막잡가를 잘했던 지방 명창이었다 한다. 손병두는 박동진의 재목을 알아보고 근세5명창의 하나인 익산의 정정렬(1876~1938)을 찾아가도록 했다. 공주 갑사에 머물고 있던 정정렬에게서 그는 퇴짜를 맞고 실의에 빠져 있던 중 1933년 판교 너더리의 김창진을 찾았다.

그는 김창진 밑에서 심청가를, 정정렬한테서 춘향가를, 유성준한테서 수궁가, 조학진한테서 적벽가, 박지용한테서 흥부가를 배웠다. 1962년 국립국악원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다가 1968년 최초로 5시간에 걸쳐 판소리 흥부가를 완창하면서 판소리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다음은 그가 2001년 <국악방송>에 출연해 증언한 내용이다.

김창진 명창은 당신이 공부했을 때의 그 괴로움, 그것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다” 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여. 지금은 안그러지만 옛날에는 고수, 북치는 고수하고는 한 자리에 앉아 밥을 안 먹어. 당신 형이 김창룡이라고, 한 자리에 앉아 밥을 안먹었어. 그러니까 그 냥반이 자기 형님의 책을 훔쳤어. 공주에서 책을 훔쳐가지고 부여 절로 찾어갔어. 절로 가서 그걸 딱 내놓고, 주먹만한 비상을 사들고가 그걸 내놓음서 “나 이 절에서 성공 못하면 나 여기서 죽을라요.” 중이 그 말을 듣겠어요? 고개를 살레살레 내둘렀는데 사흘을 굶고 졸라대니까 그 절의 짚신 삼아 대는 영감이 하나 있어요. 그 영감이 주지한테 말했어요. “저 사람 저러다 죽겠습니다. 내가 한 달에 쌀 서 되를 낼 터이니 공부를 시키십시요.” 그렇게 해서 공부를 허는디 그 공부를 한 내력이라는 것은 말도 못했어요.   

부여 무량사에서 10년 공부를 마친 김창진은 서울로 올라왔다. 1931년경 일본 음반회사인 축음기상회 <일축(日蓄)>에서 녹음한 판소리 춘향가 SP음반(유성기 음반)을 낸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서울로 다시 올라온 것은 1920년대 후반, 그의 나이 40대 중반으로 보인다.

김창진 명창은 고수로 활동하면서 당대 5명창의 소리를 모두 꿰고 있었기에 나름대로 독창적인 소리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독공으로 득음을 한 김창진 명창은 서울로 올라와 소리판에 뛰어들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명창으로 인정받았다.

김창진에게 판소리를 배운 바 있는 나성엽의 증언에 따르면 김창룡과 김창진은 처음에 모두 아버지에게 소리를 배웠으나 뒤에 선생이 달라서 그랬던지 소리를 다르게 했다 한다. 김창룡은 산골 장작 패는 식으로 소리를 하였고 김창진은 이쁜 각시 바느질하는 것 같이 소리했다고 한다.

제자 박동진 명창이 KBS_TV 다큐멘터리 ‘중고제’에 출연해 증언한 바에 따르면 당대 5명창의 수행고수 노릇을 하면서 이들의 특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김창진이기에 그 소리의 장점을 따서 만든 그의 소리는 5명창을 능가한다는 평을 들었다 한다. 또한 김창진처럼 진양조를 느리게 한 사람이 없었는데 그렇게 하는 걸 ‘삼공잽이 진양’이라고 한다.

당시 얼굴 잘나고, 소리 잘하고, 풍채 좋은 명창들은 많은 여성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동백을 한 여인이 사모했는데 그 여인이 김창진 명창의 소리를 듣고 그만 마음을 뺐기고 말았다. 그런 이유로 김창진 명창과 이동백 명창의 사이가 멀어졌는데  전주 명창대회에 함께 참가하였을 때 김창진 명창의 범피중류(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져 죽으러 가는 대목) 한 자락을 들은 이동백 명창이 화를 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판교에서 제자 박동진 가르치고 타계

1933년 이동백과 김창룡은 ‘조선성악연구회’의 결성을 주도했다. 그러나 김창진은 그 직전에 낙향을 했다. 김창진은 김창룡보다 7~8세 연하인데 중고제와 서편제를 섞어서 소리했고 아편을 했기 때문에 김창룡이 가문의 법제를 어겼다 하여 서울에 발을 못붙이게 했다는 증언이 있다.

“제가 선생님께 심청가를 배우러 갔을 때는 이미 아편을 시작한 뒤였어요. 그래도 한 점 흩어짐이 없이 소리공부를 시키고는 했습니다.” <박동진의 증언>

판교로 낙향한 김창진은 박동진을 만나 그에게 심청가를 가르쳤다. 박동진의 심청가를 들으면 김창진 소리의 특징이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김창진은 실의의 세월을 보내다 타계했다. 정확한 연대도 알 길이 없다. 1930년대 후반 이후로 추정된다. 노재명이 지은 <중고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있다.

김창룡은 서울에 가서 크게 성공했으나 김창진은 서울에 있지 못하고 낙향하여 아편을 하다가 미실미라는 마을에서 동가식서가숙하다가 작고하였다 한다.(이보형 조사·집필 <판소리 유파> 108쪽. 1992년 문화재 연구소. 나성엽 증언)

▲ 명창 김창룡의 증손자 김수현
뉴스서천 취재팀이 ‘미실미’라는 동네를 수소문해 찾아나섰다. 그러나 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지명총람>을 찾아보니 판교면 후동리에 ‘마살리들’이라는 지명이 보이며 ‘갓굴과 후동리 사이에 있는 들판’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미실미는 ‘마살리’의 와전인 듯 했다. 후동리에 찾아가 마을 어른들에게 물으니 흥림저수지 윗편 들판에  옛날에는 마살메라는 마을이 있었다 한다.

서천에서 중고제를 꽃피운 김정근 가문의 김창룡과 김창진, 그들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조상의 피를 물려받았음인지 연예계에서 왕성을 활동을 보이고 있다. 원로 영화배우 김인태는 김창룡의 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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