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의 마을 이야기/(1)시초면 봉선리
■서천의 마을 이야기/(1)시초면 봉선리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6.01.11 18:11
  • 호수 7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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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리, 조수드나들던 ‘갯가 마을’이었다
1926년 봉선지 축조로 대부분 수몰

서천의 들과 강과 산은 우리 조상들의 살과 피, 그리고 뼈입니다. 병신년 새해를 맞아 이를 더듬으며 서천의 마을 곳곳을 돌아보는 연중기획 ‘서천의 마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을에 담긴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현재 살아가는 우리를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하고자 함이 목적입니다. 관련 자료를 충분히 분석하고 전문가들의 자문과 함께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사실에 어긋남이 없이 내용에 충실을 기하고자 합니다. 선사시대 유적과 백제시대의 천제단이 발견된 시초면 봉선리편부터 연재를 시작하며 길산천, 판교천, 단상천, 비인천 등 서천의 많은 하천들의 수역별로 분류하여 취재를 할 계획입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질정을 바라며 많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편집자>

 

▲ 부엉바위에서 본 봉선지. 사진 가운데 부분이 선돌리, 왼쪽 아래 수몰된 부분에 세원리가 있었다.<뉴스서천 자료사진>
시초면 봉선리(鳳仙里)의 지명은 봉암(鳳岩)과 선돌(仙乭)에서 나왔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지장(支壯)리, 세원(世院)리, 냉정(冷井)리, 선돌리를 합해 봉선리로 통합한 것이다.
1926년 일제가 마산면 이사리와 봉암리 사이로 간신히 빠져 나오는 길산천의 협곡을 막으면서 마을은 크게 바뀌었다. 마을 북쪽의 선돌리와 그 아래 세원리, 지장리, 봉암리 등의 대부분이 수몰됐다. 송관섭 이장에 따르면 민가의 80%가 물에 잠겼다 한다. 선돌리와 세원리의 들판도 모두 물에 잠겼다.“지실가지만 남은 것이여”송 이장의 말이다. ‘지실가지’란 ‘기슭’이란 뜻이다. 봉선지의 물이 빠지면 지금도 마산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드러난다.

▲시초면 봉선리 위성사진
일제는 일찍이 금강 하구에 눈독을 들여 쌀 수탈을 위한 간척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를 위한 법적 근거가 1917년에 만든 공유수면매립법이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이 법은 없어졌으나 1961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부활됐다.
1923년 서천수리조합이 만들어졌고 1924년 옥남방조제가 만들어졌다.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논에 농업용수를 대기 위해 서천수리조합은 1926년에 길산천 상류에 봉선지를, 판교천 중류에 흥림지를 축조한 것이다.

▲ 숙곡(肅谷).
마을 북쪽의 문성산(文城山. 두루재산)에서 길산천 본류와 지류인 도마천의 수역을 가르며 동남쪽으로 뻗어내려 봉암[부엉바위]에서 멈춘 지맥의 중간을 뚫고 무너미 시설을 만들었으며, 근래에는 서천-공주간 고속도로가 관통하면서 지장 마을의 본래 모습은 크게 훼손됐다. 지장리와 세원리의 경계를 이루는 긴 골짜기가 있었는데 이곳을 ‘숙곡(肅谷)’이라 불렀다. 1961년 한글학회에서 발간한 지명총람에는 ‘숙굴’이라고 돼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장리에 사는 최규만씨가 바로잡아 주었다. 현재 이 골짜기 아랫부분은 물에 잠겨 있다.

 

지명으로 남은 바닷가 흔적  ‘배문이’

청동기시대~조선시대 유적·대량 발굴

문성산 서쪽 도마천 유역과 물에 잠긴 선돌리 앞까지 갯골이 나있어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문성산에서 서쪽 사면으로 흘러내린 낮은 구릉이 있었는데 도마천을 거슬러 올라온 배가 이곳까지 닿아 ‘배문이’라 불렀다. 80년대 경지정리 사업을 벌이며 지금은 이 구릉마저 흔적이 없어 ‘배문이’라는 지명도 마을 노인들의 기억으로만 남았다.

▲일제가 처음 세운 봉선지 기념비. 일제 연호가 들어간 부분을 주민이 정으로 쪼아낸 것으로 보인다. 마산면 이사리 제방 부근에 있던 것을 무너미가 있는 봉암마을로 옮겨 다시 세웠다.
이처럼 조수가 드나들었던 봉선리에 선사시대 때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서천-공주간 고속도로 공사를 하다 그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2003년 충남역사문화원에서 봉선리 581번지 외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한 결과 청동기시대부터 마한·백제·조선시대에 이르는 360여기의 다양한 유구가 조사됐으며 500여점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2006년 11월 6일 ‘서천봉선리유적(舒川鳳仙里遺蹟)’이란 명칭으로 국가 문화재로 지정됐다. 사적 473호.

봉선리 유적1.2.3 지역을 조사한 결과 청동기시대 분묘군과 생활유적군, 마한시대 분묘군, 백제시대 분묘군과 생활유적군, 조선시대 분묘군과 생활유적군 등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유적이 시기를 달리하면서 확인돼 당시 사람들의 문화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충남역사문화원 발굴팀이 2014년 12월 사적 봉선리 유적 발굴 조사를 하다 유적지 안의 문성산[두루재산] 정상에서 제사 유적이 발굴됐다. 제단은 흙을 쌓아 평면 방형의 3단을 이루는 모양새이며, 윗부분은 평평하게 만들었다. 또, 제단의 서쪽 능선에는 제사 의례를 준비하고 돕는 딸림시설터가 확인됐는데, 구덩이를 판 백제시대 수혈주거터 5기가 층위가 겹쳐진 채 드러났다. 부근에는 저장시설로 추정되는 목곽창고 터도 있었다. 수혈주거지에서는 제사 의례에 쓴 뒤 묻은 것으로 보이는 발 세 개 달린 삼족기, 기대 조각, 뚜껑이 덮힌 접시(개배) 등이 출토됐다.

발굴팀은 “제단이 능선 꼭대기에서 평지를 조망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고, 고분군과도 떨어져 있어 성격상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등의 특수 용도를 지닌 시설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말했다.
이 제사 유적은 1500여년 전 백제인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제단이라는 것이 관련 학계의 결론이다. 삼국시대에 하늘에 제사를 지낸 제단 유적은 처음 확인되는 것이어서 고고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쏠려 있다.

▲봉선리 유적 발굴 토기
한편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발굴팀은 2014년 10월부터 봉선리 유적의 정비 및 전시관 건립을 위해 문화유적 시굴 조사를 벌이고 있다. 현재 주차장 부지의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는데 이 작업이 끝나면 제사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갈 예정이다.

한편 봉선리 마을에서는 4년 전부터 대보름 전날인 정월 열나흗날 두루재산(문성산)에 올라 고사를 지내던 전통을 부활해 올해 4회째를 맞는다. 최규훈씨에 따르면 이 전통은 예로부터 이어져 일제 강점기에도 중단되지 않았는데 6.25사변 이후 중단됐다고 한다. 송만호 이장은 “이 행사를 다시 부활하면서 마을 단합이 잘 되고 있다”며 “올해에도 두루재산에 올라 고사를 지내고 마을회관 앞에서 달집태우기 등 마을 행사를 벌일 계획”이고 말했다.

▲봉선리 마을 지킴이. 왼쪽부터 최규훈·규만씨 형제, 송관섭 이장
현재 봉선리에는 54가구 120여명이 살고 있다. 60, 70대가 대부분이다. 1980년대 초만 해도 90가호가 넘었다 한다. 이들은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90년 전 마을 대부분을 봉선지에 빼앗겼지만 지금까지 봉선지로부터 얻는 혜택은 아무것도 없다. 주민들은 봉선리 유적지와 봉선지를 활용한 관광 사업이 주민 소득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고 큰 기대를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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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제단’의 의미

백제인의 자주의식 ‘천제단’에서 확인

 

유승광/향토사학자, 공주대 객원교수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1514년 전인 AD 501년 11월 동성왕은 사비 서쪽으로 사냥을 나온다. 눈이 많이 내려 마포촌(오늘의 마산면 관포리)에서 유숙했다고 한다.

왕이 사냥을 나온다는 것은 우리가 연상하는 것보다 만만치 않다. 백제군이 동원된 기동합동훈련이라고 보면 된다. 훈련장소가 마포촌 즉, 서천이었다면 당시 서천에 사는 백제인들은 왕을 맞이하기 위해 마을 전체가 동분서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동성왕은 대규모 기동합동훈련을 위해 서천이라는 변두리 지역을 선택했을까?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가설을 내린 다음 그 가설을 증명할 유적지를 찾는 방식으로 동성왕의 마포 사냥에 대한 의문을 풀어본다. 그 의문은 2014년 12월 서천군 시초면 풍정리 산성에서 풀렸다. 사적 473호 봉선리 유적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풍정리 산성을 발굴했는데 정상에서 제사유적이 확인됐는데 학자들은 이를 하늘에 제사지내던 천제단으로 결론을 내렸다. 백제 지역에서 유일한 천제단이 발굴된 것이다.
천제단이란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중국의 천자뿐인데, 시초에서 천제단이 발견된 것이다. 천제단 발굴은 당시 백제가 중국과 대등하게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의미로 읽어낼 수 있다. 이는 백제가 얼마나 자주적인 국가의식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천제단은 자주적 백제인의 의식이 담겨있는 만큼 귀하게 활용되어야 한다. 서천을 넘어서 국가의 중요한 유적지가 되도록 한 마음, 한 뜻으로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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