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의 마을 이야기/(2)마산면 관포리
■서천의 마을 이야기/(2)마산면 관포리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6.01.18 11:32
  • 호수 79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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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마을이냐?…배 드나들던 포구였다”
동성왕 넋 달래던 별신제…6.25 이후 전통 끊겨

▲ 관포리 위성사진
마산면 관포리(官浦里)는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관촌(官村)리와 대포(大浦)리를 병합해 태어났다. <서천군지>에 따르면 관촌(冠村)은 갓을 만드는 사람들이 살아서 '갓마을'이라 불린 데서 비롯되었다. 갓의 재료는 대나무이다. 지금도 상관마을에 대밭이 남아있다. 다리목 윗쪽의 상관 마을을 웃개멀, 다리목 아래의 하관마을을 아랫개멀이라 불렀다.

상관 양지편에 있는 동네를 ‘양지뜸’이라 하고 그 동쪽에 있는 마을을 ‘구례(九禮)골’이라 부른다. 관포교회 아래에 있는 마을을 ‘모가골’이라 부르는데 마을이장 이봉구(75)씨에 따르면 모과나무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라 고 한다. 한자로는 ‘모각(毛角)골’이라 한다. 상관마을 북쪽에는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데 ‘수당고개’(부여 수당리로 가는 고개라는 뜻)라 부른다.

▲ 배가 와 닿았다는 대포리 마을 전경
관포리 사람들은 외지에 나가면 “바닷가 마을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하관마을 아래에 있는 대포리는 옛날에 포구였다고 한다. 그것도 큰 포구라서 대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런 산골 마을에 바닷물이 드나들었다니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봉구 이장은 “2005년 경지정리를 할 때 하관 마을회관 앞 논에서 닻의 일부로 보이는 물체가 출토됐다”며 “옛날에 배가 드나들었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고 전했다. 대포리 맞은편 응달에 6가호가 있는데 이 마을을 ‘음산(陰山)말’이라 부른다.

‘마산(馬山)’, ‘대포(大浦)’라는 지명은 백제 24대왕 동성왕(AD 479~501)을 떠올리게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3년조에 이런 기록이 있다.

“十一月, 獵於熊川北原, 又田於泗백西原, 阻大雪, 宿於馬浦村. 初, 王以백加(芍加) 鎭加林城, 백加不欲往, 辭以疾. 王不許. 是以, 怨王. 至是, 使人刺王, 至十二月乃薨. 諡曰東城王(11월, 왕이 웅천 북쪽 벌판과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에서 묵었다. 이전에 왕이 백가로 하여금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을 때 백가는 가기를 원하지 않아 병을 핑계로 퇴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승락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백가는 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 때에 와서 백가가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러서 12월에 이르러 왕이 죽으니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

백제 24대 동성왕(東城王:479~501)은 수도를 공주로 옮긴 문주왕의 동생 비지의 아들로 한성(漢城)에서 온 남래귀족(南來貴族)을 누르고 금강 유역권을 지배기반으로 한 신진세력들을 중앙귀족으로 등용해 자신의 세력 기반을 구축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당시 중국은 위진남북조시대의 혼란기였는데 이를 틈타 남제(南齊)와 손잡고 북위를 공격하여 요서지역에 진출했으며 거듭되는 북위의 공격을 막아내 당시 고구려의 문자명왕과 함께 우리 민족의 최성기를 맞고 있었다.

이러한 동성왕이 귀족층의 반란으로 사망에 이른 것이다. 이 해에 동성왕은 가림성(오늘의 부여군 임천면 성흥산성)을 완공했는데 백가를 보내 이곳을 지키게 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백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장소가 사비 서쪽 벌판 마포촌이었다.

위 기사에 나오는 마포촌에 대해 사학자 이병도는 “현재의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옛 이름이 마산, 마읍(馬山·馬邑)인 것에 미루어 볼 때 마포촌(馬浦村)을 서천군 한산면에 비정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고 해석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마포촌’을 오늘의 마산면 관포리라 해도 무리한 추정은 아니다.

▲ 별신제가 열리던 자리에 들어선 교회
이봉구 이장은 이 마을에서 행해지던 별신제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관포리 별신제는 부여군 은산면 은산별신제(중요무형문화제 제9호)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규모가 컸다. 별신제에 참여하기 위해 인근에서 관포리로 모여드는데 관포리에 연고가 있는 사람은 쉽게 숙식을 해결했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관포리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두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고 한다. 현재 하관 마을에 25호, 상관마을에 30여호가 살고 있지만 70년대만 해도 100여호가 넘었으니 별신제가 열릴 때에는 1000여명 이상이 북적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별신제는 지금의 관포교회가 있는 너른 터에서 열렸다. 이곳은 신기가 서린 곳이어서 별신제를 지내기 위한 나락을 말리기 위해 널어놓으면 새들이 이를 먹고 죽었다 한다. 그래서 새들이 얼씬도 못했다는 것이다. 언덕 아래에 정자나무가 있는데 그 아래에서는 말을 타고 가다가도 반드시 말에서 내렸다고 한다.

이 자리에 관포 교회가 들어선 것은 63년 전이었다 하니 6.25 전쟁이 끝나갈 무렵 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대대로 노씨 집안에서 별신제를 주로 관장했는데 마지막으로 별신제를 주관하던 노봉호씨도 기독교로 개종했다. 기독교 영향으로 갈수록 별신제가 쇠퇴해지자 어느날 그는 마을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교회 마당에서 제복을 입고 마지막 고유제를 지낸 후 별신제에 사용하던 깃발, 제구, 각종 문서 등을 모두 불태웠다. 이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이봉구 이장은 유물을 모두 없앤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은산별신제는 백제부흥운동을 벌이다 뜻을 이루지 못한 복신, 도침 등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이다. 관포리 별신제는 동성왕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조선 초기 4성씨가 들어와 살면서 심은 노거수
관포리에는 고목이 된 정자나무가 세 곳에 남아 있다. 금녕김씨, 강릉함씨, 교하노씨, 한산이씨의 네 가족이 정변을 피해 이곳에 낙향해 살았는데 이들이 심은 나무들이라 한다.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이봉구 이장은 이의 13대 후손이며 다른 집안도 13대 후손이 나이가 비슷하다 한다. 이 정변은 사육신난으로 판단된다.
1929년 광주학생의거가 일어났을 때 전주 신흥학교에 다니다 전주에서 이 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 함수만이 이 마을 출신이며, 한국 영화사에 길이 빛나는 영화배우 김진규가 이 마을 출신이다.
▲ 영화배우 김진규 생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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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함수만(咸壽萬. 1907. 12. 22~1930.5. 19)

전주에서 학생운동 주도한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함수만.(사진제공/증손 함형모)
함수만은 1907년 12월 22일 마산면 관포리에서 함연우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5세 때부터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는데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한다. 13세 때인 1919년 3월 27일 마산 새장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면서 반일 항쟁 민족 감정이 싹텄다.

이후 신학문에 뜻을 두어 한학을 중지하고 화양면 구동리에 있는 간이학교에 다니다가 군산에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에서 세운 영명학교에 입학했다. 기독교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에 가입하고 이후 1927년 전주 신흥학교에 편입하여 교우회 운영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전주 신흥학교 학생들도 이에 호응하여 이 학교 개교기념일인 12월 15일 경에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했으나 일본 경찰의 저지로 무산됐다. 함수만은 비밀결사대를 조직해 재차 시위를 계획했다. 1930년 1월 25일 기숙사생 100여명 전원을 모아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결의문을 낭독한 뒤 경찰부로 진입하다 동교생 24명과 함께 체포됐다.

일제 경찰의 모진 고문 끝에 죽음 직전에 풀려나 전주 예수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5월 19일 순국, 고향 관포리에 묻혔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으며 1995년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1995년 10월 3일 관포교회에서 동생인 함정옥 장로의 미수 감사예배와 함께 65주기 추모예배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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