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고쟁이에 배 닿던 유서깊은 마을
풍정리 산성 천제단 발굴에 주민들 기대 커
풍정리 산성 천제단 발굴에 주민들 기대 커
풍정리는 신굴과, 행정(또는 향정), 유산의 3개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다. 14가구의 귀촌 세대가 정착해 모두 68세대가 살고 있다. 서천에서는 자연마을 중에서 가장 많은 귀촌인들이 살고 있다.
행정마을 남쪽에 5가호가 있는데 이 마을은 들축나무로 불린다. 들축나무란 상록관목으로 사철나무의 일종이다. 나무 이름이 그대로 지명이 된 특이한 곳이다. 옛날에 이곳에 서당이 있어서 지금도 서당굴이라 부른다.
신굴마을 안쪽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곳이 안뜸이다. 마을에는 흥씨 부자가 살았다 해서 흥부터라 부르는 곳이 있다. 예전 마을회관이 있었던 곳인데 지금도 기왓장이 출토되고 있다.
후암리로 넘어가는 당산재 고갯길이 시작되는 삼거리가 뱃고쟁이이다.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한다. ‘남양’이라 부른 풍정리 마을 앞 들판은 먼 옛날에는 바다였음을 지명이 살아남아 말해주고 있다.
기원전 5000~6000년 경의 빗살무늬토기는 주로 강 하구나 바닷가에서 출토되는데 기원전 1000년 전의 무문토기는 보통 낮은 구릉지에서 출토된다. 고고학에서는 무문토기가 출토된 곳도 당시에는 바닷가나 강가였다고 한다. 이후 차츰 해수면이 낮아졌다.
풍정리 뱃고쟁이에 언제까지 배가 드나들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조선시대까지 갯골의 형태로 남아있다가 오늘의 길산천과 도마천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때까지 삼산리 질메다리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서천~공주간 고속도로는 마산-시초-기산-화양면의 산줄기를 종으로 관통하며 2003년부터 시작됐다. 이 때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적들이 발굴되었는데 화양면 추동리에서는 백제시대 무덤과 청동기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무덤, 집자리, 건물터 등 다양한 성격의 유규가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백제시대 돌방무덤 6기가 유산마을 산기슭으로 옮겨져 복원되었다.
무덤 안에서는 백제 토기 및 금동제 귀걸이와 은제 팔찌 및 여러 가지 귀중한 유물이 출토됐다. 이로 보아 무덤의 주인공들은 웅진(공주)과 사비(부여)에 도읍했던 백제 중앙 세력과 관계가 있었던 유력집단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학계의 분석이다.
향토사학자 유승광 박사는 “봉선리 유적과 천제단에서 발굴된 유물에는 마구와 관련된 것이 일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풍정리 산성은 수군이 주둔하며 해안을 방어하던 곳으로 백제의 수도를 지키는 지키는 중요한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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