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의 마을 이야기/(5) 마산면 군간리
서천의 마을 이야기/(5) 마산면 군간리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6.02.09 13:29
  • 호수 79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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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가 진을 치면 외부에서 공격하기 어려워
‘사비성 탈환작전’ 펼치던 백제부흥군 주둔지

▲ 군간리와 라궁리 위성사진
봉선지로 흘러드는 물줄기는 크게 둘로 나뉜다. 문산면 은곡리에서 발원하여 지원리와 후암리를 거쳐 흘러드는 길산천 본류와 군간리, 라궁리, 관포리 등지에서 발원한 물줄기를 모아 흘러드는 라궁천이다.

마산면 북쪽 끝 부여군 충화면과 접경을 이루는 군간리는 이처럼 길산천 상류 발원지 부근에 깊숙히 자리잡은 산간 마을이다. 백제 때에는 마산현에 속했고 조선시대에는 한산면 상북면에 속했다.

마을 북쪽에 우뚝 솟아있는 노고산(해발 229m)에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의 혈처가 있어 ‘군간이’로 불리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군간리(軍干里)가 되어 마산면에 편입되었다.

▲ 군간리 마을전경
군간리에는 전쟁, 군사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1974년에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지명총람>에는 노고산을 전장산(戰場山)이라 하고 그 아래 마을을 산정멀, 산정촌(山亭村)이라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정(亭)’은 시초면 향정리에서 보듯 군사가 주둔한 곳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곳에는 가뭄에도 쉽게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

귀향해서 이 마을에 살고 있는 김은환씨에 따르면 이곳에서 숟가락이 출토됐는데 손잡이 끝이 제비꼬리처럼 갈라진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이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군간이 마을에는 도굴꾼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한다.

▲ 범죄없는 마을로 세차례 표창을 받은 군간리
마을 동남쪽 부여군 충화면의 청등산은 백제의 계백장군이 무예를 연마하고 군사훈련을 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군간마을 서쪽의 고라(古羅)마을은 고려 때 군대가 주둔해 유래된 이름이며 전장(戰場)멀은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었다 한다.

전장멀 옆으로 613번 도로가 나있다. 이 고개를 진등고개, 또는 장수고개라 하는데 부여 홍산으로 이어진다. 이로 보아 군간리와 라궁리는 백제시대에 사비성을 지키는 중요한 길목임을 알 수 있다. 향토사학계에서는 군간리와 라궁리 일대를 사비성 탈환작전을 펼치던 백제부흥군의 주둔지로 보고 있다. 이 때의 상황을 살펴본다.

661년 2월 복신은 북쪽의 임존성과 호응하여 사비성을 포위해들어갔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당고종은 유인궤(劉仁軌)를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에 임명해 백제로 급파했다. 복신은 유인궤가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웅진강구에 두 책을 세우고 당의 유인궤를 맞았다. 부흥군은 유인궤의 당군이 사비성의 유인원과 합세하는 것을 막고자 총력을 다했으나 신라군이 합세한 나당 연합군에게 패하여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양식이 떨어진 신라군이 철수하자 부흥군은 다시 사비성을 향해 포위해 들어갔다. <삼국사기>는 이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인궤가 군사를 엄정히 통솔하고 전전(轉戰)하면서 전진하니 복신 등이 웅진강구에 두 책을 세우고 막았다. 인궤가 신라병과 합쳐 이를 치니 아군이 퇴각하여 책으로 들어와 강으로서 막았는데, 다리가 좁아서 떨어져 빠지고 싸우다 죽는 자가 만 여명이 되었다. 복신 등이 도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나 임존성을 보전하였는데 신라인은 양식이 다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니 용삭원년(661년) 3월의 일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이 기사로 보아 유인궤의 구원군이 오기 전에 백제군은 금강하구를 막고 사비성의 장군을 포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당연합군에 패한 백제군은 임존성과 주류성으로 물러나 다시 전열을 정비했다. 도침은 스스로 영거장군(領車將軍) 복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하며 지휘체계를 갖춘 후 군사를 불러 모았다. 세력이 더욱 커진 백제는 사비성을 포위하며 고립된 당군을 압박해 들어갔다. 도침이 유인궤에게 말했다.
 
“듣건대 당나라가 신라와 서약(誓約)하기를 백제인은 늙은이 젊은이를 묻지 않고 모두 죽인 연후에 우리 나라를 신라에게 넘겨주기로 하였다 하니 [앉아서] 죽음을 받는 것이 어찌 싸워서 죽는 것만 같으랴? [이것이 우리가] 모여 스스로 굳게 지키는 까닭이다.”<삼국사기 백제 본기>

이같은 상황으로 보아 군간리는 백제부흥군이 진을 치고 사비성을 되찾기 위해 전투를 벌이던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형으로 보아 이곳에 군대가 진을 치면 외부에서 공격하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다.

이같은 치열한 전투 현장이었던 군간리는 산에 밤나무를 심고 관정을 파서 골짜기 논에 물을 대 논농사를 지으며 이웃과 함께 오둔도순 살아가는 평화로운 곳이다. 범죄없는 마을로 세차례나 도지사 표창을 받았다.

▲ 왼쪽부터 주민 이상하, 신동원, 김은환씨. 이들은 마을 세대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안타까워했다.뒤로 솟은 봉우리가 전장산이다.
군간이와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의 새멀에 모두 25세대 54명이 살고 있다. 귀촌한 세대가 4세대이다. 대부분 나이가 60~80대이지만 30대와 40대도 있다. 지금도 아침이면 유치원 차가 들어온다.

마을 남쪽 산지에 밤나무 단지가 15만평 가량 조성돼 있고 연간 100여톤의 밤을 수확하는 밤 집산지이다. 최근에는 부추작목반이 구성되며 큰 소득원이 되고 있다.

옛날에는 산정멀 뒤로 장고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용하는 사람이 없다. 동쪽으로 동마고개가 부여 충화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간신히 승용차 한 대가 오갈 수 있다. 이 고갯길을 넓혀 교통이 원활해지고 외지에서라도 귀촌을 해서 마을의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 마을 주민들의 바램이다.<구술/마을주민 신동원·김은환·이상하·이영주 이장 신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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