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천의 마을 이야기/(7)문산면 구동리
■ 서천의 마을 이야기/(7)문산면 구동리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6.03.07 11:35
  • 호수 8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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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산면에서도 귀농인들 가장 선호하는 곳
한해 농사 풍흉 점치는 쌍정자나무 3곳

▲ 내동리 마을 입구
▲ 소라틔에서 본 구변리
▲ 내동리 홍골 쌍정자
▲ 금복리 쇳골에서 구변리리로 넘어가는 요오고개
▲ 내동리 삼생이마을
문산면 구동리는 조선말 서천군 두산면 지역이었다. 은곡리와 지원리 중간에 있으며 두 개의 긴 골짜기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 구변리(九邊里)이고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 내동리(內洞里)이다. 구변리를 구변골이라고도 부른다.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두 마을을 합쳐 한 글자씩 따와 구동리라 했는데 법정 행정마을로 구변리가 오늘의 구동1리, 내동리는 구동2리이다.

구변리 남쪽에 있는 마을 이름은 고라실이다. 골짜기 마을이란 뜻이다. 지금은 민가가 없다. 구변 서북쪽에 민가 10여호 가량이 있다. 이곳의 지형이 소라를 닮아 ‘소라틔’라 부른다. 이곳에서 금복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요오고개이다. 이 고개를 넘어 버스가 운행하고 있으며 예로부터 구동리나 은곡리, 지원리 사람들이 판교장을 왕래하던 고개였다.

소라틔에는 조선조에 정6품 이조좌랑, 정4품 사헌부 장령을 지낸 평산신씨 신사온(申士溫)의 묘와 신도비가 있으며 인근은 그 후손들의 묘역이다.
소라틔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절굴이라는 곳이 있다. 절이 있었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 절굴에 귀농인 2세대가 정착해 살고 있다.

구변 남쪽에 있는 마을을 참샛골이라 하는데 찬 샘물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모두 25세대 가량 사는 구변리 골짜기의 가운데에 있는 마을 이름은 가운데에 있다 해서 중뜸이다.

구동리 북쪽 골짜기인 내동리에는 모두 40여 세대가 살고 있다. 김재섭 마을 이장에 따르면 내동에만 70여호가 살았었다고 한다. 동서로 길게 놓은 골짜기 북쪽 양지바른 곳에 민가가 늘어서 있다. 볕이 잘 들고 얕은 산 자락이 바람을 막아줘 아늑한 풍취를 느낄 수 있다.

내동리 골짜기 끝 부분분에 감나무골이 있다. 감나무골 남쪽에 있는 산을 장구 모양이어서 장구봉이라 하며 서쪽 에 있는 산을 원퉁이산이라 부른다. 감나무골에서 금복리 쇳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 이름을 쇳골재라 부른다. 오가는 이들이 없어 거의 폐쇄된 상태이다.

감나무골은 문산면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하우스들이 모여있다. 주민들은 시설채소 농업으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감나뭇골 아래 마을을 홍골, 그 아래가 황골이며 내동리의 으뜸 마을이다. 611번 지방도에서 내동리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첫 마을이 삼성이며 주민들은 ‘삼생이’라 부른다.

홍골과 황골마을에 쌍정자나무가 3곳에 있다. 가장 오래 된 것은 수령 500년이라 하는데 군의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남쪽에 있는 쌍정자 나무 중 1기가 수년 전 태풍에 넘어져 죽었다. 마을 사람들을 이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이 나무들은 가뭄이 드는 해에는 잎이 늦게 피어 그 해의 풍흉을 점치기도 한다.
문산면은 서천에서도 공기가 맑은 청정지역으로 귀농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대형 축사가 없는 구동리는
공기가 좋아 문산면에서도 귀농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역 가운데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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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말살한 땅 이름에 담긴 혼 

사람이 땅에서 살며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붙여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발을 붙이고 사는 땅에는 산과 계곡, 들과 내, 바다와 섬 등의 보통명사로부터 시작해 다른 지점과 구분하기 위해 하천, 산봉우리, 다리, 호수, 마을 등에 고유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이는 오랜 공동체 생활을 해온 지역민들 간에 서로 공감하는 최소공배수이며 사회적 계약인 동시에 기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땅 이름이 형성되기까지 자연환경은 물론 그 시대의 사회, 문화, 환경 등 실로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면서 명명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이름에는 반드시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공동체가 공유하는 무형의 문화유산이다.

이러한 땅이름이나 마을 이름은 문자생활 이전부터 지어진 것으로서 원래는 순수한 우리의 고유어로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 후 한자를 사용하면서 우리의 고유어명(固有語名)이 점차 한자명(漢字名)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지금도 고유어로 된 지명과 한자어의 지명이 공존하고 있는 곳을 많이 볼 수 있다. 우리 고유어 지명의 끈질긴 생명력을 엿볼 수 있다.

이 땅을 송두리째 삼켜버린 일제는 조선총독부령을 발하여 1914년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우선 조선팔도(朝鮮八道) 제도를 고쳐 13개의 도(道)로 세분하고 마을 몇 개씩을 뭉뚱그려 행정적 법정마을로 묶었다.

법정마을이란 행정관청에서 그들의 행정행위의 편의를 위하여 몇 개씩의 자연마을을 묶어 놓은 마을을 말함이며 자연발생적인 마을 이름과는 사실상 무관하다. 두 마을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새롭게 명명됨으로써 고유의 내력과 혼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들 행정마을에는 구장(區長)을 임명하고 면장(面長)이 이를 관리하는 제도를 실시했다. 그리고 한국의 밑바닥 경제까지도 그들이 독점하고 착취하기 위하여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금융조합으로 하여금 독점 착취하게 하였는데 마을마다에 이를 주관 운영케 하는 주사(主事)와 부주사(副主事)를 임명하였으며, 식산진흥회장(殖産振興會長)을 구장에게 겸임시켜 감시하고 착취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행정의 최말단까지 완전히 장악한 일제는 마을마다 구장을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주민의 동태를 감시 보고하게 하고 우리의 역사 문화가 응집되어 있는 땅이름을 망가뜨리고, 마을의 공동신앙 의식인 당산제도 지내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급기야는 한국말도 사용 못하게 하고 성(姓)까지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하는 등 악랄한 민족말살정책을 폈다.

이같은 지방행정기구의 조직체계는 지금까지도 일제의 침략적 기구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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