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장터 / 학교 밖을 맴도는 아이들
■모시장터 / 학교 밖을 맴도는 아이들
  • 권기복 칼럼위원
  • 승인 2016.04.25 20:39
  • 호수 8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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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죄송합니다. ○○가 어제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오늘 학교에 나왔나요?”
“아니요. 1교시 전까지 안 왔어요.”
○○의 아빠가 1교시 시작한 직후에 보낸 핸드폰 문자 메시지였다.

1교시가 끝난 후에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를 학생부장이 발견하여 데리고 교무실로 들어왔다.
“어제 밤은 어디 있었니?”
“집에요.”
“너 집에 안 들어온 것 다 아는데, 거짓말 하는 구나! 사실대로 말해보렴.”
그 때에야 작은 목소리로,
“○○온천 목욕탕 입구 계단에서 잤어요.”
“고생했겠구나.”
“예!”
“집에서 부모님이 그렇게 들어오라고 하여도 왜 안 들어가는 거야?”
“집이 싫어요.”
“그럼, 학교는?”
“학교도 싫어요.”
“그럼, ○○는 어디서 살고 싶어?”

○○는 대답 대신 고개만 푹 숙였다. 나도 더 말문을 열지 않고, 교실로 들여보냈다. 혹자는 그럴 때 담임교사가 더 자상하고 따뜻한 말로 타이르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것 봐! 집은 부모가 간섭하니까 싫고, 학교에서는 싫어하는 공부를 억지로 하라니까 싫은 거지? 그럼, 네가 부모나 선생님으로부터 간섭 안 받는 대신 보호받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있니? 그러니까 네가 완전히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는 부모님과 선생님의 보호를 받는 대신 간섭을 마다하지 않아야 돼.’

그동안 수없이 했던 말이다. 때로는 미안하다고 하고, 잘못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돌아서면 끝이다.
○○는 학년 초에 서울에서 전학을 왔다. 부모가 일찍이 이혼하고, 그는 전국을 나돌아 다니는 친부 밑에서 버려진 아이처럼 성장하였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절도죄로 보호관찰 대상이 되어 재혼으로 새 가정을 꾸민 엄마가 데려가는 조건으로 우리 반에 오게 되었다. 첫인상부터 예사로운 아이가 아니라는 풍모가 물씬 풍겼다. 그동안 교감 직을 수행했기에 5년 만에 담임교사를 맡게 되었다. ‘비뚤어진 아이일지라도 내 품에서 따뜻함을 느끼게 해 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챙겨주었다.

처음에는 비뚤어진 자세에 남을 경계하고, 의심하는 눈초리를 가득 품고 있었다. 8시 반까지 등교하기로 약속된 시간을 다른 아이들이 어기면 엄하게 혼내다가도, 그 아이에게는 부드럽게 대해주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지각은 여전해도, 눈빛은 완화되었다. 문제는 그의 무책임과 자유분방함이었다. 무엇이든지 힘이 들거나 어려운 것은 회피했다. 등교시간이나 수업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서 대수롭게 여기지를 않았다.

더 큰 문제는 그의 행동에 동조하는 아이들을 꼬드겨 서울에 데리고 가서 여자 친구를 주선해주고, 함께 어울리는 일이었다. 이에 맛 들린 아이들까지 5인조는 주말만 되면 서울로 올라가더니 서로 왕래를 하게 되었다. 급기야는 월요일까지 연장되고, 서울에서 따라 내려온 아이들을 부모님들의 가출 신고로 경찰서에서 보호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만 15세까지는 아동으로 분류되어 사회적 보호를 받는 대상이기에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 주어져 있다. 학교는 그 아이들을 떠안을 수밖에 없고, 학교 밖을 맴도는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해야만 되는 지경이다. 담임교사는 학부모들과 함께 안타깝게 찾으러 다니는데, 남은 반 아이들은 그들이 없는 교실을 좋아한다. 그들 5명만 없으면 수업 분위기가 살아나고, 활기찬 교실분위기가 된다는 것이다.

저, 학교 밖을 맴도는 피노키오들을 위하는 길은 무엇일까? 그 누가 그들을 설득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설득할 수 있을까? 설득의 한계를 넘었다면, 그들을 위해 학교가 아닌 그들만의 즐거운 마당은 없겠는가? 그들이 음성적이고, 범죄에 접근되는 음지를 벗어나올 길은 없을 것인가? 우리 다 같이 학교 밖을 맴도는 아이들을 위해 학교의 대안을 생각해 볼 때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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