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민주주의는 그의 희생 댓가”
“오늘의 민주주의는 그의 희생 댓가”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6.04.26 09:20
  • 호수 8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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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첫 희생자 노희두 열사
매년 모교 서천초 교정에서 추모식

▲ 4.19묘지 영정각에 모셔진 노희두 열사 영정 사진
지난 19일 서천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노희두 열사 위령비 앞에서 4.19혁명 때 희생된 노희두 열사를 기리는 추모식이 열렸다. 이 추모식은 1975년 동국대학교 서천동문회가 결성되면서부터 동문회의 주최로 지금까지 매년 4월 19일 오전에 열리고 있다.

이날 추모사에서 노희두 열사의 대학동기동창인 김기수(서천읍 사곡리)씨는 “노희두 열사의 희생으로 오늘의 민주주의 한국이 있음을 되새기자”고 말했다.
노희두 열사는 서천초등학교와 서천중학교, 장항농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법학과 3학년에 재학 중 4.19를 맞았다.
다음은 동국대 4·19혁명유공계승자회 수석부회장인 김칠봉(2010년 당시 70세)씨의 증언이다.

1960년 4월19일 오전 8시께 서울 중구 동국대 운동장. 동국대생들은 전날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려대생들이 당한 테러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위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당시 법학과 3학년이던 김씨는 강당과 강의실, 도서관을 돌며 “동국의 학우들이여, 공부가 머릿속에 들어옵니까? 학원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운동장으로 집결합시다”라고 외치고 다니며 학생을 끌어모았다. 재학생 4천여명 가운데 1천명 이상이 모이자 선발대 600~700명은 오전 11시께 캠퍼스를 나왔다. 학생들이 을지로입구, 서울시청을 거쳐 국회의사당 주변을 지날 때 김씨는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러 경무대로 가자”고 말했고 학생들은 ‘동국대학교’가 적힌 붉은색 바탕의 현수막을 들고 경무대로 방향을 틀었다. 중앙청 부근에서 경찰과 맞닥뜨린 시위대는 상수도관을 굴리며 저지선을 뚫으려 했고, 무장한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저지했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던 사이 무장 경찰이 사격했고 김씨의 법학과 동기인 노희두가 총알을 맞았다. 동료들이 병원으로 옮겼지만, 노씨는 끝내 숨을 거뒀다.

▲ 동국대학교 만해광장 동우동산에 있는 노희두 열사 흉상. 2010년 동국대학교4.19혁명 계승자회에서 세웠다.
경무대 앞에서 시위하는 과정에서 나온 첫 희생자였다고 김씨는 회상했다.
당시 노 열사의 나이 22세, 초등학교와 중학교, 대학 동문인 추모위원장 김기수(서천읍 사곡리) 씨는 “그날(4월 19일) 아침 경무대(현 청와대) 앞에서 노 열사와 대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데모의 선두에 섰다.

갑자기 경무대 방향에서 경찰들이 발포를 시작했고 총소리에 놀라 스크럼이 흩어지며 학생들이 우왕좌왕 했다. 하지만 노 열사는 경무대 쪽으로 달려가 담장을 넘으려다가 총알이 가슴을 관통했고 숨을 거두기 전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며 산화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막내 숙부 노옥래씨가 시신을 찾아와 고향 기산면 두남리 뒷산에 안장했다. 2008년 3월 이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뉴스서천 취재팀이 두남리 노 열사 묘소와 노옥래씨를 찾아뵈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학업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노 열사의 작은아버지 노옥래(당시 78세) 씨는 “너무 아까운 애다.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 했으며 인품도 좋았다”고 회상했다.

                                                                                노 열사는 2008년 3월 서울 수유리 ‘국립 4·19 민주묘지’로 이장해 동료들과 함께 영면하고 있다.
▲ 지난 19일 오전 서천초등학교 교정에서 열린 노희두 열사 추모식

▲ 서천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노희두 열사 위령비

▲ 추모사를 읽고 있는 노희두 열사의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동기인 김기수씨

▲ 2008년 3월 4.19묘역에 안장된 노희두 열사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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