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장터] 막다른 나라를 보고 배울 점
[모시장터] 막다른 나라를 보고 배울 점
  • 정해용 칼럼위원
  • 승인 2016.05.25 09:38
  • 호수 8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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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나라 필리핀에서 한국인 피살 사건이 또 발생했다. 2016년이 채 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여기서만 세 번째 일어난 한국인 피살 사건이다. 그 나라에서 유독 한국인이 많이 죽는가 하며 민족 감정을 일으킬 일은 아니다. 한국인이라서 죽은 게 아니라 그저 사람의 생명이 파리 목숨 같은 나라일 뿐이다. 우리가 그들을 유독 차별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부턴가 세계의 여행자들은 은근히 필리핀을 꺼리고 있다.

지리적으로 비슷한 거리, 비슷한 조건에 있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필리핀 지역으로 가는 패키지 관광요금이 턱없이 싸다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동남아 휴양지들은 비용만 해결된다면 신변 안전에 대한 걱정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다녀올 수 있다. 그에 반해 필리핀은 ‘혹시 모를’ 위험의 리스크 비율이 높다. 자연 환경이 주변 나라들에 비해 열악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저 민심이 문제다.

올 들어서만 한국인이 세 번째 피살되었다는 사실은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필리핀을 방문했다가 살해당한 한국인의 숫자는 2012년 6명, 이듬해부터는 연속 두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다.

범죄 살인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는 건 민심이 흉흉하다는 뜻이다. 한때 아시아에서 가장 개발된 나라였고 경제적으로도 앞선 나라였던 필리핀이 오늘날 이렇게 변한 까닭은 무엇일까.

5월초 필리핀 대선에서 당선된 로드리고 두테르테(71)에 관한 얘기로 궁금증을 풀어보자. 이 선거에서 두테르테 후보는 혼자서 거의 절반의 표를 얻어 다른 두 경쟁자를 가볍게 따돌리고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그런데 그가 별반 존경받는 지도자는 아니었다는 데 이 선거 결과의 묘미가 있다. 그는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에 가깝다. 두테르테가 대선에서 내건 공약은 “모든 범죄자를 처형하겠다”라든가 “인권을 위해 법은 잊어버려라”와 같이 과격한 약속들이었다. 그는 “범죄자 10만 명쯤 죽여 물고기 밥이 되도록 바다에 던지겠다”고도 했다. 말을 함부로 한다고 해서 미국 대선에 출마중인 도널드 트럼프와 비교되었다. 일명 ‘필리핀판 트럼프’다. 그가 당선되자 당장 필리핀에서는 30년 전에 폐지됐던 ‘사형제’ 부활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두테르테는 다바오시의 시장이었는데, 그가 이끄는 지방정부는 잔혹한 법집행으로 유명했다. 그가 법 또는 ‘정의의 이름’으로 처형했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피살자의 숫자만도 1천7백여 명이나 된다. 중국인 소녀를 유괴해 성폭행한 범인 세 사람은 직접 총을 쏴 죽였다고도 했다. 그는 시장으로서 사법제도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사병(私兵)처럼 거느리고 있는 주민자치 치안조직을 만들어 ‘재판 없는 심판’을 행사하기도 했다. 법 위에 군림하는 폭군이었던 셈이다.

필리핀 국민들이 그런 사람을 압도적 지지로 선택한 것은 대단한 아이러니다. 게다가 1억 인구의 대부분을 신도로 거느리고 있는 필리핀 가톨릭교회는 선거기간 동안 두테르테에게 투표하지 말 것을 종용했었다. 그럼에도 두테르테가 몰표를 얻은 이유는 무얼까.

역설적이게도 시장이 초법적 권한을 휘두른 다바오 지역에서는 전국적으로 무수한 잡범들이 발붙일 곳이 없었다. 덕분에 다바오가 필리핀에서 가장 안전한 치안지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부정부패와 살인 범죄 앞에서 국가 공권력이 무력해지고 보니, 필리핀 국민들은 준법이나 인권 이전에 먼저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켜줄 지도자를 필요로 하게 된 것 같다. 근래 필리핀을 경험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필리핀의 도시들에서는 누구도 거리를 안심하고 돌아다니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얼마나 나라가 기강을 잃었으면, 국민들 스스로 ‘가장 무서운 정치’를 선택을 했을까.

우리나라는 아직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에 속한다. 관광객이든 지역주민이든 국내의 어떤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주변을 살펴야 하는 불안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도 위태로워지고 있는 건 아닌지 슬슬 걱정이 된다. 서울 한복판 공중화장실에서 평범한 시민이 아무 이유도 없이 칼에 맞아죽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검찰청이 그제야 공개한 통계에 따르면 이유 없이 남을 찔러 죽이는 ‘묻지마 범죄’는 2012년 이후 매년 50건 이상 벌어졌다고 한다. 폭력 절도 강도 사기 등 사회 범죄의 증가율이 두드러지게 높아졌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다.

사회범죄의 증가가 지도층의 도덕성 상실이나 곤두박질치는 경제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먼저 여러 종류의 통계들을 늘어놓아야겠지만, 굳이 그런 증명을 늘어놓지 않더라도 그 상관성은 이미 여러 가지 역사적 사례들로 입증되어 있다. ‘위험한 필리핀’ 역시 그 나라 정치의 오랜 부정부패와 연관되어 초래된 현상이다. 도덕심이 땅에 떨어지면 인간은 동물의 시기로 퇴보한다.

각종 사회 통계와 지표들, 정치현상들이 우리 사회의 현저한 퇴행을 보여주고 있는 즈음에, 이웃나라의 우울한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적이 우려를 품게 된다. 도덕성, 정치인은 정치인답고, 학자는 학자답고, 종교인은 종교인답고, 공직자는 공직자답고, 농부는 농부답고, 부모는 부모답고, 자식은 자식답고, 언론은 언론답고, 노동자는 노동자다운, 그 정도(正道)가 무너지고 나면 온 나라가 저 암울한 이웃나라처럼 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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