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천의 마을 이야기/(9)문산면 수암리
■ 서천의 마을 이야기/(9)문산면 수암리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6.06.08 14:40
  • 호수 8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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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군 진산 천방산 아래 자리잡은 정수골
천방루-작은재-독뫼 임도 단풍 아름답기로 정평
천주교도들 왕래하던 작은재, 수난의 역사 간직

▲ 문산면 수암리
수암리(水岩里)는 본래 서천군 두산면 지역이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시 건암리, 정수리, 유망리 일부를 합해 수암리라 이름을 짓고 문산면에 편입되었다.

수암1리는 서천군의 진산인 천방산과 봉림산의 북사면에 자리잡은 골짜기 마을로 아래로는 문산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다.
옛날에는 정수리(淨水里)였다. 마을 중앙에 물맛이 좋고 가뭄을 타지 않는 샘물이 있어 정수마을이라고 불렀다. 정수굴이라고도 불렀는데 천방산 바로 아래까지 깊은 골짜기 가장자리에 60여호가 살고 있다. 정수굴 북쪽을 윗굴, 음지 쪽에 있는 남쪽을 음지뜸이라 부른다.

▲ 천방산 아래 계곡에 자리잡은 정수마을
골짜기 끝 고갯길이 시작되는 곳에 독뫼마을이 있다. 마을 입구에 알과 같은 산이 있어서 알래봉이라 하며, 독뫼는 알처럼 따로 있는 산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곳에 독뫼공소가 있다. 고갯길은 독뫼재라 불렀으며 지금은 작은재라 부른다.
<서천군지>에 따르면 큰골과 봉림산이 있는데 비봉포란형의 명당이 있다하여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다녀가기도 한다. 또한 천방산 북쪽에 있는 큰골의 북쪽 산중턱과 위쪽에 절터가 있는데, 큰 바위로 성벽과 같이 쌓아 올린 것으로 보아 규모가 상당히 큰 사찰이 었던 듯하다.

큰골 남쪽 산중턱에는 굴이 있는데 입구는 한사람이 겨우 엎드려 들어가면 안쪽은 방과 같이 넓고, 그곳 바위에서 솟아나는 약수는 효험이 좋아 그 물로 환자를 치료하면 특효가 있었다 한다.

천방산 정상-문산면 신농리-천방루 주차장과 연결된 등산로 입구까지 600미터이다의 둘레길이 6월중 개통을 앞두고 있다. 이 길이 새로 열리면 기존의 천방루에서 작은재까지의 임도 와 연결되어 정수마을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으로 예측된다. 천방루에서-작은재-독뫼공소에 이르는 임도는 서천에서 단풍이 가장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있다.

▲ 독뫼공소
작은재 고개 정상은 천주교도들의 수난을 간직하고 있다. 작은재는 문산면 수암리와 판교면 금덕리를 잇는 고개로 판교의 작은재 공소 신자들과 문산의 독뫼공소 신자들이 통발을 하던 곳이다. 이곳에는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한 신자들의 무덤 30여기가 있었다. 1994년 천방산 임도 포장을 하면서 파묘되었고 연고가 없어 인근에 재매장되었다 한다, 지금도 무덤 2기가 고갯마루 부근에 있다.

서천은 금강과 서해를 접한 곳으로 수로가 발달했지만 내륙 깊은 곳에는 골짜기가 발달하여 은신처로 적합한 곳이 많다. 1801년 정부의 신유박해로 방방곡곡에 흩어진 천주교 신자들은 서천군 천방산 자락을 중심으로 교우촌을 형성하고 생활했다.

향토사학자 유승광 박사에 따르면 비인군의 불무골, 한티, 띠안말, 서천군 지역의 산막골, 독뫼, 정수굴, 작은재, 한산군의 장구목, 동학곡, 군간리에 교우촌이 형성되어 천주교의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이에 최양업 신부, 페롱 신부, 조안느 신부, 황루카 등 많은 신부들이 불무골과 산막골, 작은재를 사목지로 활용하였다. 이에 초기 천주교가 전래되어 형성된 사목 중심지 및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유 박사는 서천지역이 38명 비인지역이 12명 한산지역이 7명 등 총 57명이 순교했음을 밝히고 있다.

▲ 수암리3층석탑
신농리에서 판문로를 따라 수암리로 들어서면 왼편에 탑골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 고졸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석탑 1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수암리3층석탑이다. 문헌에 따라 4층석탑으로 기록된 것도 있는데 이는 기단부가 2개 층인 것을 잘못 보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세운 것으로 안내판에 씌어있다.

▲ 건암마을 전경
30여세대가 살고 있는 수암2리 건암 마을은 선바위[建岩]가 있어 생긴 지명인데 마을 중앙에 건암서원이 있었다. 건암서원은 현종3년(1662년)에 지방 유림들의 발의로 명곡 이산보,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중봉 조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금의 문산면 명곡리(鳴谷里. 현 지원리)에 세워졌다. ‘명곡서원’이라는 명칭으로 사용되다가 숙종39년(1713년)에 건암리로 이건하고 국왕으로부터 사액된 이후에는 ‘건암서원’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건암서원은 서천의 인재를 육성했던 학문의 도장이었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됐다.

▲ 수질환경 최우수마을로 선정된 건암마을
건암 마을 동쪽 낮은 안부에 고갯길이 있어 지원리와 연결되었다. 이 고개를 원동고개라 했는데 지금은 숲이 우거지고 통행이 없다.
건암마을은 2004년에 충청남도 수질환경 최우수마을로 선정됐는데 이를 기념하는 비가 마을 입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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