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천의 마을 이야기/(10)문산면 지원리
■ 서천의 마을 이야기/(10)문산면 지원리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6.06.15 16:50
  • 호수 8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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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산천 관통하며 넓은 들 이룬 대명당
선조 때 문신 이산보의 효행 담긴 명곡서원

▲ 문산면 지원리 위성사진
문산면 지원리(支院里)는 길산천이 은곡리를 빠져 나와 넓은 개활지를 만난 곳에 있다. 북으로 태봉산(태뫼산)이 가리웠고 서쪽으로는 신석골 서쪽의 안갑봉과 길산천 본류와 마산면 라궁천의 수계를 가르는 지맥이 태봉산에서 뻗어내려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었다. 들판 중앙으로 북에서 남으로 야트막한 산줄기가 뻗어내려오다 멈추었으며 남동쪽으로 수구가 열려 후암리로 빠져 나간다. 지형을 살펴보면 누가 보아도 대명당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백제 때는 설림군이었다가 신라와 고려시대 서림군에 속했던 지역이다. 조선 말 서천군 두산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팔지리, 서원리, 구변리, 유립리와 시왕면의 후동리의 각 일부를 합하여 팔지와 서원의 이름을 따서 지원리라 했다.

▲ 지원리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산천. 은신처가 많아 인근 야산에 사는 고라니 등이 내려와 물을 마시는 곳이다.
지원리 중앙으로 뻗어내린 낮은 구릉지에 옹기종기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지원리의 중심이 되는 이 마을을 좌수뫼라 부른다. <서천군지>에 따르면 좌수뫼는 옛날 좌수 한 사람이 권세를 누리고 살다 죽은 마을이라 하는데, 그는 좋은 일도 많이 했으며, 그의 무덤 부근이 명당자리라 하여 풍수지리사 들이 자주 찾지만 아직도 혈처를 발견하지 못했다 한다.

좌수뫼 동쪽, 길산천 서쪽의 마을을 섶바탱이라 부르는데 섶이 많은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섶바탱이에 칠성암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성암초등학교는 이를 본따서 붙인 이름이다. 이 학교는 1998년에 폐교되었으며 지금은 서천군귀농인지원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길산천 동쪽 태봉산 아래가 팔지마을인데 안부를 넘어 마산면 지산리 팔지마을과 구분하여 서팔지라고도 부른다. 태봉산 아래에는 그릇을 굽던 곳이 있다 해서 증굴이라 하는 곳이 있고, 증굴 곁에는 지금도 파면 백토가 나오는 백토굴이 있다고 한다.

태봉산은 옛날 싸움터였다 하며, 산에 오르면 계단식으로 편편한 곳이 있어 인근 학교와 교회 등의 소풍지로 이용 되었었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한다.

▲ 좌수뫼. 대명당의 혈처가 있다고 한다. 민가는 주로 서쪽 사면에 있다.
팔지마을 아래 동쪽으로 깊숙한 골짜기에 형성된 자연마을이 여술이다. 여술은 옛날 여수(여우)가 많이 있었다 하여 ‘여수울’이라 부르다가 생긴 이름이다. 섶바탱이와 팔지, 여술이 합해 지원2리이다. 지원 2리는 태봉산 아래 양지 녘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난곡이라고도 한다. <서천군지>에 따르면 난곡은 마치 신선의 난 잎 같다 하며, 엉켜도 곧바로 뻗는 난 잎처럼 생기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 전해지고, 또한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다 가곤 했다는 곳이다.

지원1리는 좌수뫼와 좌수뫼 서쪽 골짜기인 지름실, 그 아래에 자리잡은 신석골, 그리고 지원리 가장 남쪽의 명곡마을로 되어 있다.

▲ 명곡. 골짜기 끝 안부를 넘어가면 수암리 건암마을이다.
지름실은 마을에 괘등형(卦燈形)의 명당이 있다 해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으며, 유곡, 또는 유립이라고도 부른다.

명곡(鳴谷) 마을은 조선 중기의 문신 이산보(李山甫, 1539년 ~ 1594년)와 관련된 사연이 얽힌 곳이다. 이산보는 본관은 한산(韓山), 호는 명곡(鳴谷).1568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해미현감과 사간원 정언, 성균관전적 등을 지내고 북도 순안어사로 파견되었다. 그 뒤 홍문관의 직책을 지내다가 동인의 공격을 받고 종부시정으로 좌천되었다가 동부승지와 대사간 등을 지냈다. 토정 이지함은 그의 삼촌이 되며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는 그의 사촌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인 박수환 전 한산면장에 따르면 명곡 이산보의 양모(養母) 조 씨가 1578년12월19일 사망하자 이산보가 이 곳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명곡리에 자리 잡았던 사당인 명곡서원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당시는 명곡정사(鳴谷精舍)로 기록하고 있다. 명곡정사 즉 명곡서원(사당)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곳이 그 여막의 자리 옆에 이산보의 양모 조씨와 양부 이지영(李之英)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1579년에 세워진 양부모 묘비의 기록을 보면, 양모 조씨가 선조11년(1578년)에 사망하자 당시 벼슬이 정랑(正郞)이었던 이산보가 상복을 입고 서천 문산 명곡으로 돌아가서 묘 곁에 여막을 짓고 시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19년(1586년)기록을 보면 조헌은 붕당의 시비와 학정의 폐단을 논한 상소문을 올렸는데, “ 신(臣-조헌)의 관하인 공주에 공암정사(孔巖精舍)가 있고, 서천에는 명곡정사가 있습니다. 공암정사에는 양인(良人) 서기(徐起)라는 자가 있는데 후학들을 가르쳐 생원, 진사에 합격한 사람이 많습니다. ..(중략) ... 그러나 서천의 명곡정사는 특별히 주장하는 스승이 없는데 지난해 신이 한번 지나다가 그곳 생도들이 매우 영특하여 가르칠만한 자들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신의 생각으로 대학자인 송익필(宋翼弼)을 찾아 명곡정사 산장(山長)으로 삼았으면 합니다”라고 하고 있다.

현종3년(1662년)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명곡 이산보,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중봉 조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금의 문산면 명곡리에 명곡서원이 세워졌다. 서원은 조정의 공식 인가를 얻은 사액서원(賜額書院)이 아닌 사우(祠宇) 성격이 짙은 서원이었다. 이러한 관계로 ‘명곡서원’이라는 명칭으로 사용되다가 문산면 건암리로 이건하고 국왕으로부터 사액된 이후에는 ‘건암서원’이란 서원명이 따랐다.

명곡리에는 평해 구씨 안장공파 종중 사우인 청덕사가 있다. 사괴석 담장으로 두른 경내에 솟을삼문(문이 세 칸인 맞배지붕의 대문에서 가운데 문의 지붕을 좌우 대문보다 한 단 높게 세운 대문)으로 된 청덕문과 1910년에 묘막으로 건립된 경현재, 그리고 1918년에 건립된 사우가 일곽을 이루고 있어서 유교사 연구 및 역사적 가치가 커 2011년 1월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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