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일에 생각하는 평화의 소녀상
경술국치일에 생각하는 평화의 소녀상
  • 편집국 기자
  • 승인 2016.08.31 10:04
  • 호수 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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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앗아간 일본은 1909년 조선 병탄의 방침을 내각회의에서 확정한 상태였다.
이러한 낌새를 알아챈 일진회의 송병준은 1909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팔아먹기 흥정을 벌였다. 일본 조야의 거물 정객들을 상대로 ‘합병’을 역설했다 한다.

송병준의 이러한 활동을 눈치 챈 이완용은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란 자에게 접근하며 조선 병탄 문제를 흥정했다. 이완용은 일본어를 할 줄 몰랐기 대문에 그의 비서였던 이인직을 내세워 교섭에 나섰다.
‘합방의 주역’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이완용은 “현 내각이 붕괴되어도 그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면서 자기 휘하의 내각이 조선 합방 조약을 맺을 수 있음을 자진해서 통감부에 알렸다. 나라팔아먹기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을 병탄한 일본은 조선귀족령을 발표해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에게 작위를 주고 은사금까지 주었다.

이로부터 30년이 지나 조선의 젊은이들은 일본이 벌이는 전쟁에 강제 동원되었다. 조선의 처자들은 위안부로 끌려가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조국 광복이 된지 70년이 지나서 이러한 아픔을 잊지 않는 역사 인식 확립과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 후세의 역사 체험교육의 장으로 삼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평화의 소녀상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외면한 채 정부는 지난해 12월 28일 일본과 위안부 피해 해결 방안을 합의했다. 최근 일본 정부는 이에 따른 기금 10억 엔(우리 돈 111억 원)을 집행키로 확정했다는 소식이다. 약속한 기금을 출연키로 함에 따라 향후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 이전을 일본이 집요하게 요구하는 분위기다. 1910년의 그 인물들을 연상케 한다.

소녀상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 그들에 의해 꽃다운 나이에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들의 한 서린 삶을 위로하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상징 조형물이다.
전국적으로 봇물 터지듯 세워지는 소녀상이 28일 현재 40곳이 넘고 올 연말엔 60곳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서천에서도 시민단체의 주도로 평화의소녀상을 건립하기 위한 모금활동이 벌어지고 있다. 오는 9월중에 건립이 될 예정이다. 아픈 역사를 되새기는 동시에 그 아픔을 잊지 말자는 염원의 표출이다. 많은 군민들의 관심 속에서 서천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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