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연재/서천의 문화예술인을 찾아서(3)/영화감독 이강천-1
■ 기획 연재/서천의 문화예술인을 찾아서(3)/영화감독 이강천-1
  • 허정균 기자
  • 승인 2016.09.07 17:32
  • 호수 8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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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천면 석촌리 출신…전주에서 활동하며 한국영화 주도
빨치산 영화 ‘피아골’, 김진규·허장강·이예춘 등 스타 배출

▲ 이강천 감독
금강 하류의 넓은 충적평야와 기수역을 차지한 서천군은 높은 생산력을 바탕으로 예로부터 많은 인물들을 낳았다. 특히 문화 예술계에서 활동하며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다. 뉴스서천은 이들을 추적하여 서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이들이 남긴 유산을 기리고자 한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활동하며 한국 영화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이강천 감독에 대해 2회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영화감독 이강천(李康天, 1921~1993)), 그는 1954년 ‘아리랑’, 1955년 ‘피아골’을 내놓으며 한국 영화 전성기를 열었으며, 1955년 영화인에게 주는 금룡상의 첫 회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는 일제 때 동경 유학시절 미술을 전공한 미술학도로 영화미술을 하다가 영화 감독을 맡았으며 또한 일생 동안 화가로도 활동했다.
그의 고향은 서천이다. 뉴스서천 취재팀은 그가 태어나 자란 마을이 어디인지를 수소문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서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더구나 그가 태어나서 자란 마을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 8월 초 서천군미디어문화센터 구재준 센터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강천 감독이 태어난 동네를 알아냈다는 것이었다. 장항 출신의 구 센터장은 영화계를 수소문해 이장호 감독 등 영화인들이 매년 이 감독을 기리는 모임을 갖고 있다는 것과 이강천 감독 장남의 전화번호까지 알려줬다.

종천면 석촌리에서 출생

▲ 이강천 감독이 태어난 석촌리 마을 전경.
이강천 감독이 태어나 자란 곳은 종천면 석촌리이다. 석촌리는 서천군의 진산 봉림산에서 한 산줄기가 길산천과 판교천의 수계를 가르고 뻗어내려오다 군청 뒤 오석산에 이르기 전 멈칫하며 남쪽을 향해 좌우로 팔을 벌려 산세를 형성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종천 농공단지가 마을 앞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비옥한 농토였다. 판교천이 마을 우측으로 흘러내리고 희리산이 우뚝 서 겨울에 서북풍을 막아주고 있다. 누가 보아도 살기좋은 명당에 자리잡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이 마을을 ‘행주(行舟)형국’의 명당이라 하는데 예로부터 이 마을에서 많은 부자가 나왔다 한다. ‘서천군지’에 따르면 이 마을에서는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을 뚫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우물을 파는 것을 금했으며, 부자가 나오면 배에 짐을 많이 싣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부자가 되면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이강천 감독 석촌1리에 있는 집터 자리 친척 이인재씨
석촌리에서 만난 이인재(77)씨는 이강천 감독 집안과는 먼 친척이다. 그는 “옛날에는 이 마을이 부촌이었지. 이 근동 사람들 머슴 살려면 다들 이 동네로 왔어.”라고 말했다.
이강천은 1920년 석촌리에서 태어났다. 이인재씨의 안내로 그가 태어난 집터를 가보았다. 집터는 마을 정 중앙 부근에(지금의 석촌1리) 자리잡고 있다. 지금도 감나무 등이 남아있어 집 자리였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집터 옆에는 샘이 있는데 올해같은 가뭄에도 샘물이 그치지 않고 흘러넘치고 있었다. 샘 바로 아래에는 습지를 조성해 미나리를 키우고 있었다.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 이 물 먹고 살았는데 지금은 상수도가 들어와 이 물은 먹지 않아.”
이인재씨의 말이다.
이 마을은 전주이씨 효령공파의 집성촌이었다. 이인재씨가 효령대군파 19대손이라 하니 그의 아저씨뻘 되는 이강천은 효령대군파 18대손이다. 마을에서도 큰 부자였던 그의 집안은 이 감독이 어려서 서울로 이거했다고 한다.

영화 ‘끊어진 항로’에 출연

이강천은 1939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동경미술학교는 1885년에 세워진 학교로 1877년에 세워진 동경음악학교와 함께 미술과 음악 부문에서 일본 예술계를 대표하는 학교였으며 유명한 예술인을 다수 배출했다. 두 학교는 1949년에 합병하여 ‘동경예술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화가로 활동하며 영화에도 관심을 가졌다. 해방 후인 1948년  ‘R.X.K 프로덕션’이 제작한 영화 ‘끊어진 항로’에 출연했다. 이만흥 감독의 16mm 무성영화 ‘끊어진 항로’는 전북에서 처음 제작된 영화로 군산시를 포함한 전라북도 일원에서 촬영되었다.

이강천은 이 영화에서 미술 담당과 배우로 출연했다. 극중에서 이집길과 이강천은 다정한 친구 사이이다. 하지만 이집길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밀수범이고, 이강천은 성실히 살아가려 노력하는 월급쟁이다. 이강천은 바르게 살자고 이집길을 설득하지만, 이집길은 정부(情婦) 유계선과 미리 밀수품을 실어놓은 배로 탈출을 시도한다. 결국 이집길은 밀항 계획을 알고 달려간 친구 이강천의 끈질긴 노력으로 탈출을 포기하고 당국에 자수한다.

밀수 근절을 계몽하는 이 영화에 함께 출연했던 이집길(1923년 출생)은 익산 함라면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 음악대학을 마치고 해방 후 귀국해 영화배우로 활약했다. 유명한 영화배우 김진규, 도금봉 등이 그의 문하생이었다 한다. 그가 출연한 영화로는 ‘끊어진 항로’ 외에 ‘성벽을 뚫고’, ‘애정산맥’, ‘열애’ 등이 있다.

전주를 한국영화의 중심으로

▲ 영화 아리랑 포스터
이강천은 처음 출연한 ‘끊어진 항로’에서 연기자로서 인정받지 못해 연기를 단념하고 무대장치나 극장 간판을 그리는 등 힘든 생활을 했다 한다. 그가 살던 전주는 6.25 전쟁이 끝나가던 무렵부터 한국 영화의 메카가 되었다.
일개 지방 도시에서 영화산업이 번성했다는 사실이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그 뿌리는 군산에서 찾을 수 있다. 군산은 개항 이후 외래 문화가 어느 지역보다 풍성했다. 전북 최초의 공연장인 군산극장과 영화관인 희소관이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1949년에 영화 ‘끊어진 항로’가 군산에서 제작됐다.

한편 전주에서는 1925년에 개관한 제국관을 전라북도에서 인계받아 ‘도립전주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운영하다 1957년에는 1000석 규모의 중앙극장이 개관해 오늘의 전주국제영화제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영화제를 열기도 했다. 1959년에는 비록 1회 행사로 그쳤지만 ‘제1회 전북영화상’ 시상식이 열리기도 했다.

이처럼 1950, 60년대 한국 영화는 전북을 중심으로 절정을 맞았는데 이같은 전성기의 막을 연 영화인이 바로 이강천 감독이었다. 이강천 감독은 1954년에 나온 ‘아리랑’과 1955년에 나온 ‘피아골’을 감독했다.
나운규의 ‘아리랑’을 시국에 맞추어 번안각색한 반공영화인 이강천 감독의 ‘아리랑’은 한국 최초로 경무대에서 시사회를 열기도 했다. ‘아리랑’에는 당시 악극단에 몸담고 있던 허장강이 출연해 이후 영화배우로 자리를 잡게 한 작품이기도 하다.

▲ 영화 ‘피아골’의 촬영 장면. 왼쪽부터 노경희, 이강천, 김진규
‘피아골’은 지리산 피아골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빨치산 아가리부대의 이야기이다. 당시 이 영화의 소재를 이강천 감독에게 전해준 사람은 전북 경찰청 공보과에 근무하던 김종환이란 경찰이었다 한다. 그는 이 감독에게 그가 가지고 있던 지리산 빨치산에 관한 여러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빨치산만이 등장하는 이 영화는 빨치산의 인간적인 면을 그렸다 해서 용공시비가 붙어 한 때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실은 사실성이 매우 짙은 훌륭한 반공영화이다. 이 영화를 통해 서천 마산면 관포리 출신의 김진규, 노경희, 허장강, 이예춘 등이 스타덤에 올랐다. 1955년에 처음 제정된 금룡상에 이강천 감독은 ‘피아골’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후 그는 전주의 영화문화를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한국의 영화산업은 이후 그와 함께 발전과 성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 이강천 감독의 금룡상 수상을 알리는 당시 신문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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